길고양이와 산다는 것, 심온재 마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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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양이와 산다는 것, 심온재 마당에서
  • 문지온
  • 승인 2023.01.18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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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온의 심온재 이야기-네시와의 동행(2)
요가 포즈 네시(사진=문지온)
요가 포즈 네시(사진=문지온)

“고양이랑 사는 거? 한마디로 말하면, 그냥 세 살배기 아이랑 사는 거라고 생각하면 돼. 작고 귀엽고 사랑스럽잖아.”

아기 고양이 두 마리를 키우고 있는 Y가 말했다. 그녀가 카톡으로 보낸 영상, 털이 복슬한 아기 고양이 두 마리가 서로의 털을 다정하게 핥아주는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워 전화로 물었을 때였다. 고양이랑 함께 사는 건 어떤 것이냐고. 네시와 함께 사는 것을 염두에 두고 했던 질문이었다. 겉모습으로 보면 네시는 인기 있는 품종이라 분양가가 높은 그녀의 고양이들처럼 작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존재는 아니었다. 하지만 정을 들이고 사랑의 눈으로 보면 그런 존재가 되지 말란 법도 없었다. 그녀와 통화를 하면서 마음을 정했다. 네시도 인연이 있어 심온재를 찾아왔을 터이니 잘 돌보면서 함께 지내보자고.

네시와 함께 한다고 생각하니 그려지는 그림이 있었다. 깨끗한 그릇에 담긴 사료와 물을 맛나게 먹는 네시, 낮에는 따사로운 햇살을 즐기며 잔디밭에서 뛰어놀다가 밤이면 보드라운 천을 깔아 놓은 박스 집에서 편안하게 잠든 네시의 모습 등. 그리고 녀석과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평소에도 네시가 즐겨 앉는 대문 옆 낮은 담벼락에 팔을 얹고 턱을 괸 후 고흥만 들판 위로 아름답게 펼쳐진 노을을 함께 지켜보는 것이었다.

처음엔 이 그림이 순조롭게 완성될 것 같았다. 네시는 빠르게 변해갔다. 밥때가 되면 나타나 그릇만 비우고 재빨리 담벼락을 넘어 사라지던 녀석이 어느 날부터 자주 나타나 마당을 어슬렁거린다 싶더니 한달이 지나지 않아 반나절은 마당에서 지냈다. 햇볕이 따가울 때는 그늘을 찾아 장독 옆에 자리 잡고, 햇살이 좋을 때에는 잔디밭이나 마루에 앉아. 마당에서 지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녀석의 표정과 포즈도 변해갔다. 긴장된 표정과 몸집을 크게 보이려고 불룩하니 등을 세워 앉아있던 모습에서 네 다리를 뻗고 비스듬히 옆으로 누워 느긋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모습으로.

나는 그런 녀석의 변화를 지켜보는 것이 즐거웠다. 그리고 녀석이 한쪽 다리를 공중으로 뻗고 인도의 요기(Yogi)나 할 수 있을 법한 요상한 포즈로 그루밍을 하는 모습을 보고 알았다. 녀석이 나를 안전한 존재로 믿고 있으며 심온재 마당을 ‘안전하고 편안한 곳’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기뻤다. 나와 다른 종(種)의 생명체, 그것도 위협적인 환경에서 살아야 했기에 의심이 많은 길고양이에게 믿음을 심어주었다는 사실에 얄팍한 자부심 같은 것도 느꼈고.

네시와의 관계에서 문제가 생긴 것은 유자나무에 작고 파란 열매가 맺히기 시작될 무렵이었다. 밖에서 고양이 싸우는 소리가 들리길래 나가봤더니 네시가 자기 몸집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고양이를 담벼락 아래 구석진 곳으로 몰아넣고 사정없이 공격하고 있었다. 그동안 심온wo 마당을 두고 네시가 다른 길고양이들과 영역 싸움을 하는 일은 자주 있었다. 한밤중에 크렁대고 으렁대며 싸우는 소리에 여러 번 잠이 깨었을 만큼. 똑같이 어렵고 힘든 처지에 있는 녀석들끼리 싸우는 게 정말 보기 싫고, 밉고, 화가 났지만 꾹 참았던 것은 친구의 말 때문이었다. “고양이 세계에도 자기들만의 법칙과 질서가 있으니 자기들끼리 해결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좋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대부분의 싸움은 내가 나타나고, 나의 등장에 네시가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면 그 틈을 타서 상대 고양이가 담을 넘어가는 것으로 싸움이 끝났는데 그때는 아니었다. 몸집이 작은 고양이는 겁에 질려 꼼짝을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어디를 심하게 다친 것인지 그냥 그 자리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걱정되어 다가갔다가 그 이유를 알았다. 누구에겐가 잔인한 일을 당했던 듯 꼬마 고양이의 꼬리가 잘려져 있었다. 짧고 뭉텅한 꼬리...

평상시의 나라면 그런 상황에서 네시에게는 쬐려보는 것으로 약간의 분노를 표현하고, 꼬마 고양이에게는 새 그릇에 사료를 담아 먹게 해주는 것으로 안스러운 마음을 표현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는 달랐다. 뭉텅하게 짤린 꼬리를 보는 순간, 내 안에서 격렬한 분노가 올라왔고 내 힘으로는 도무지 제어할 수 없었던 그 분노는 네시를 향해 터졌다. “싸우지 마, 제발! 난 싸우는 소리가 제일 싫어!”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어린 시절 가족을 포함,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갈등하고 싸우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무력감이 이런 식으로 표출되었던 것 같다.)

쌓기는 힘들어도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이 믿음이라 했던가. 내 편에서 보면 잘 돌보고 참아주다가 딱 한 번 버럭질을 했을 뿐인데 네시에겐 그 일이 엄청난 충격과 상처가 된 것 같았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네시는 하루에 두세 번, 밥때가 되면 정확히 나타나서 야옹거리는 소리로 밥을 요구하지만 심온재 마당에서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리고 참 신기하게도 꼬마 고양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중에 두 마리, 하루에도 몇 번씩 나타나는 꼬마 고양이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다. 네시를 많이 닮은 회색털 고양이에겐 “네쥬”, 검고 윤기 나는 털에 하얀 발을 가진 고양이는 “꼬팡”이란 이름을.

네시와 동행한 지 8개월, 이제 나는 더 이상 네시와 함께 하는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여전히 네시는 나에게 특별하고 애착 가는 존재이지만 심온재 마당을 찾는 여느 길고양이들과 마찬가지로 대접받는다. 깨끗한 물과 밥, 그리고 다른 길고양이들과 싸우지만 않으면 아무런 위협 없이 쉬어갈 수 있는 공간. 이것이 내가 네시를 포함, 다른 길고양이들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길고양이로 태어나 길에서 살아야 하는 네시가 야생성을 지킬 수 있는 ‘적절한 거리’이기도 하고.

 

문지온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방송작가로 활동하면서 몇몇 문학상을 수상했다. "글을 통해 따뜻함에 이른다"는 뜻으로 필명을 문지온으로 정했다. <남은 자들을 위한 800km>(ekfrma, 2016)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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