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 청소년의 망명정부, 이상한나라를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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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 청소년의 망명정부, 이상한나라를 기억한다
  • 한상봉
  • 승인 2023.01.15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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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칼럼

성탄절이 끼어있는 연말과 새해가 가까워지면, 교회에선 ‘성가정’에 관한 특별한 관심이 돋아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든든한 요셉과 섬세한 마리아, 아기 예수로 이루어진 ‘성가정’을 떠올리며 화목하고 신심 깊은 가족이 되길 희망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성가정은 정작 희망사항으로 남을 뿐 세상이 돌아가는 방향은 다른 쪽을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말 그대로 1인가구가 30퍼센트를 넘어섰다는 보도를 들은 지 오래되었고, 이건 비단 어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청소년에게도 해당됩니다. 청소년 1인가구도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가출청소년’이나 ‘비행청소년’, ‘불량청소년’으로 부릅니다. 하지만 원가족이 돌봄과 사귐의 울타리를 제공하지 않고 폭력적일 때, 청소년들은 ‘불가피하게’ 혼자 살기로 결심하고 집에서 뛰쳐나와 거리에서 생존을 위해 안간힘을 쓰게 됩니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거리로 유배된 가정

사실 복음서가 전하는 성가정 이야기는 우리가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눈물겹습니다. 마태오복음에서는 헤로데 대왕의 학살을 피해 낯선 땅 에집트로 피난 가는 한 가족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복음서에서는 이처럼 국가폭력을 피해 망명길에 나선 난민의 부류 안에 예수님 가족을 끼어 넣고 있는 것이지요. 루카복음에서는 방을 구하지 못해 헛간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밤이슬을 피하며 아기를 낳고 있는 성가족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처지가 짐승과 같아서 예수 아기는 구유 위에, 그야말로 짐승들의 밥그릇 위에 누워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참 복이 많은 아기였지요. 가난과 사회적 폭력으로 가족들이 사지로 내몰렸지만, 그래도 이 가족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성서학자들의 추측에 따르면, 아버지 요셉은 일찍 이승을 떠나고, 어머니 마리아는 과부인 채로 예수님을 양육하였다는 것인데, 그 아들은 결국 어머니 곁을 떠나 “목자 잃은 양처럼 흩어진” 백성을 위해 일하다 목숨을 버렸습니다. 하지만, 우리 곁에 즐비하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속사정을 지닌 가족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어떤 아이들은 가정폭력 때문에 낯선 거리로 유배당하는 경우가 있는 겁니다. 홈리스야학에서 주거권 문제를 다루는 수업을 하면서 ‘청소년주거권네트워크’라는 단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분들은 집밖 청소년들의 주거권을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처럼 ‘머리 누일 곳’이 없는 청소년이 있다는 것이지요.

청소년 자립팸 이상한나라

이 과정에서 ‘한낱’이라는 별칭으로 글을 쓰고 있는 ‘청소년 자립팸 이상한나라’(자립팸)의 활동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교육공동체 벗> 2020년 58호에 실린 <‘끝을 알 수 없다’는 절망에 대하여>라는 글은 탈가정을 선택한 거리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조목조목 들려주었습니다. 이런 거리 청소년들에게 “불안과 위기는 일상”이라는 것입니다. 자립팸은 18~24세 사이의 여성 청소년들이 너댓 명씩 모여사는 집이며, 최장 2년 2개월까지 머물 수 있습니다. 이 자립팸이라는 이상한 나라에 입국(입소)하려면 ‘엑시트’(Exit)를 통해야 합니다. 엑시트는 2011년, 사단법인 ‘들꽃청소년세상’과 사회복지법인 ‘함께걷는아이들’이 거리 청소년을 지원하기 위해 만든 기관입니다. 38인승 버스 내부를 청소년들이 놀고, 먹고, 쉴 수 있는 공간으로 개조하여 신림역 등 정해진 장소에서 매주 한두 차례 아웃리치를 하면서 거리 청소년들을 만납니다. 이들은 핸드폰을 매개로 청소년들과 24시간, 365일 소통하며 필요 시 긴급 출동합니다. 엑시트를 통해 안정적 주거가 필요한 청소년들은 ‘자립팸 이상한 나라’에 입국하게 됩니다.

자립팸에서는 시설이 아닙니다. 청소년들의 의사표현이 보장되는 ‘권리로서의 돌봄’을 제공하는 곳입니다. 이 집에 살게 된 청소년들은 함께 사는데 필요한, 청하는 방법 등 최소한의 약속을 그들이 직접 토론해서 결정합니다. 활동가는 이 집에 관리자처럼 상주하지 않고, 한 주일에 하루나 이틀 함께 지내고, 필요한 것을 지원합니다. 자립팸은 청소년들이 기피하는 ‘시설 보호’에 대한 대안으로 민간단체에서 제공하는 자율적 공간입니다. 2014년에 문을 연 자립팸은 예산 문제로 2021년 겨울에 문을 닫고 실험을 중단했다는 소식을 들으니 애석한 마음이 큽니다.

 

사진출처=비마이너
사진출처=비마이너

시설이 아니라 집이 필요한 청소년

정부의 탈가정 청소년 보호정책은 원가정 복귀와 시설 보호입니다. 하지만 탈가정 청소년들은 가정폭력이 발생한 가정으로 무작정 되돌아갈 마음이 없습니다. 또한 꽉 짜인 프로그램과 엄격한 생활관리를 강제하는 쉼터 등의 시설로 들어가는 것도 꺼립니다. 청소년 쉼터에 2020년 한 해 동안 2만 9,256명의 청소년이 입소했지만, 55.9퍼센트인 1만 6,352명의 청소년이 무단이탈, 자의 퇴소, 무단 퇴소 등 스스로 쉼터를 떠났다고 합니다. 유엔아동권리위원회에서도 2019년 10월 대한민국 제5·6차 국가 보고서에 대한 최종 견해에서 “구체적인 탈시설 계획을 통해 시설 보호를 단계적으로 폐지하라”고 권고했답니다. 청소년들에겐 병영이 아니라 ‘집’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거리에서 그들이 상처받은 영혼을 다독거리며 ‘곁’을 지켜줄 사람이 필요하고, 자신을 온전히 받아주는 집이 필요했던 겁니다.

이 청소년들처럼 “집 나가면 고생한다”는 걸 잘 아는 사람도 드뭅니다. 원가정에서 ‘이러다 죽겠구나’라는 공포가 밀려올 때, 마지막 수단으로 탈가정을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청소년들에게 도덕성을 잣대로 들이밀거나, 훈화, 교화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은 가혹한 일입니다. 실제로 자립팸에 들어온 청소년 가운데 먹고살기 위해 알바도 하지만, 오토바이를 털고, 휴대전화를 팔고, 사기와 절도 등 상당수가 범죄의 가해 또는 피해에 연루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여성 청소년의 경우엔, 성매매 착취를 경험하고, 때로는 “성매매와 성폭력, 연애의 경계가 불분명한 성적 관계를 이어 가며 동거를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자립팸의 ‘한낱’ 활동가는 이 모든 현상의 이유가 하나로 수렴된다고 말합니다. 그건 다름 아닌 생존입니다. 거리에서 살아남기 위한 그들의 엄청난 눈물어린 투쟁에 경외감을 느낄 때도 있다 합니다. 생존 앞에서 ‘도덕성’ 운운하는 훈계가 끼어들 틈은 없습니다.

사랑과 우정을 경험하는 새로운 가정

보호자의 동의가 없으면 휴대전화 개통도, 통장 개설도, 취업도, 부동산 계약도 할 수 없는 세상에서, 길거리 청소년들은 정상적으로 먹고 살 방도를 찾기 어렵습니다. 이런 법과 제도는 거리 청소년들에게 역설적이게도 ‘범법’을 가르치고 있는 셈이겠지요. 이들은 원가족과의 단절을 입증하지 못하면 기초생활 수급자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단절을 입증하지 못하면 부양 의무제 때문에 부모의 소득을 이유로 수급 선정이 불허되는 까닭입니다. 단기 알바 일자리조차 비슷한 연령대의 대학생에게 경쟁에서 밀려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이들에게 자립팸처럼 집 같은 집이 더 많이 제공될 수 있다면, 그곳에서 만난 동무들과 활동가 사이에 서로 보듬고 인격적으로 존중받을 수 있는 ‘새로운 가족’이 만들어질 수 있다면 얼마 좋을까, 생각합니다. 가정에서 상처받아 거리로 나온 영혼이 새로운 가족을 만나 사랑과 우정을 경험하고 치유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합니다. 길거리 청소년들을 위한 망명정부가 필요합니다.

 

* 이 글은 <경향잡지> 2023년 1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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