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살 거 걱정 한나도 안 해도 된당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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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살 거 걱정 한나도 안 해도 된당께!
  • 장진희
  • 승인 2022.12.18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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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이 살려낸 것들 13 - 진도에서: 우물과 텃밭이 있는 토담집에서 살다(2)

아침입니다.
험한 세상, 잘못 살아온 이력으로 이명도 있고 몸이 늘 가뿐하지만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아침은 참 가볍고 산뜻합니다. 아무런 기척도 없이, 아무도 깨우는 사람 없이 오롯이 몸이 눈을 뜹니다. 천지는 또 한번의 개벽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개벽의 빛이 깨운 새들이 소란스럽습니다. 그 소란스러움이 이미 내 몸을 두드렸는지 모르겠습니다. 동북쪽으로 난 봉창이 환합니다. 참 오랜만에 혼자 맞는 아침입니다. 그것도 어제까지도 남의 집이었던 집에서..... 나이 먹을수록 낯설다는 것이 고통이 되어갑니다만, 이 아침의 낯섦은 달콤하기까지 합니다. 구들장은 아직까지도 뜨끈합니다.

눈 뜨면 "**해야 한다"가 줄줄이 기다리고 있었던 아침, 서울 떠나서는 그것은 아니라도 오늘은 이것, 내일은 저것, 하고 싶은 것도 할 일도 많습니다. 그러다가 가끔은 소리를 지르곤 했지요.

"으으으으으아아아아아아악! 내 사전에 '**해야 한다'는 없다!"

그러곤 가끔씩 '사는 것 파업'을 할 때가 있지요. 하지만 이 아침은 '파업'이 아니라 '휴업'입니다. 꼭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정해놓지 않고 몸이 가는 대로, 마음이 가는 대로 사는 것을 허락합니다. '휴업'이 아니라 야심차게 '제대로 살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곳에 가면 늘 하는 버릇대로 마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지점을 가늠하며 신발을 여밉니다. 개울은 산골짜기 밑구멍으로 파고 들고 있는데 개울 옆으로 난 길은 금방 개울을 버리고 양지바른 쪽 양(兩) 산의 사타구니로 기어들고 있습니다. '아하! 나는 살겠소, 태양만 비친다면'입니다.

 

사진=한상봉
사진=한상봉

따뜻한 남쪽나라 바다 가까운 곳이라 햇살 좋은 곳에서는 벌써 쑥잎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경사진 농로가 끝나고 산비탈에 묵정밭이 보이자 밭두렁에 앉아 쑥을 캡니다. 왜 묵정밭이냐고요? 그 정도는 눈치채셨을 텐데요. 요즘 논두렁 밭두렁에는 그눔의 제초제 땜에 겁나서 뭐 뜯어먹겠습디까? 훨씬 덜 나 있기도 하고요.

한참을 캐야 쑥국 한그릇 끓이겠습니다. 나물칼이라도 챙겨올 걸? 뭐 이 없으면 잇몸입니다. 흙 가까운 어린 쑥대를 손톱으로 톡 끊어냅니다.

바람도 없는 날입니다. 햇살도 좋습니다. 여린 쑥잎 만지는 손끝이 와아! 겁나게 좋다 합니다. 손톱 끝에 와닿는 흙이 포근포근 합니다. 손톱 밑이 까매지기 시작합니다. 오른쪽 잠바 주머니가 볼록해졌습니다. 이 정도면 쑥국 한 그릇, 훌륭하겠습니다.

식구들 멕일라고 담뿍담뿍 캐는 쑥도 좋지만, 혼자 묵을라고 단촐하게 한 줌 끊는 맛도 거 괜찮습니다.

참으로 순하고 착하게들 엎드려 있는 우리네 마을, 시골집들입니다. 사람 사는 곳 어디나 백팔번뇌, 백팔그악스러움 없는 곳 없습디다만, 그래도 모양새를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순하고 선하게 살아왔는지 마음이 짠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렇게 순하고 선한 사람들만 골라서 잡아묵는 귀신들, '돈'과 '권력'을 거머쥔 놈들! 아니, 이 이 신성한 아침에 왜 또 그놈들이 내 대가리에 끼어드는 것입니까? 씹어갈! 호랭이 물어갈 놈들!

산으로 접어들수록, 살아 있음을 생생하게 느낍니다. 일부러 돌 위를 딛는 발이 좋아라 하고(그러면 허리가 시원해집니다), 숨이 좋아라 하고, 머리에 이명소리가 걷힙니다. 온몸이 좋다 합니다. 눈은 이미 저 혼자 땔감 나무를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내려올 때 칡줄기로 묶어 짊어지고 갈 요량입니다.

이쯤 되면 본의와는 전혀 다르게 나를 쫓아낸 꼴이 된 내 짝꿍이 고맙기까지 합니다. 너무 열심히 살고 있다 싶으면, 이렇게 한번씩 사고를 쳐서 나를 집떠나게 하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대형사고를 쳤을 때는 정말로 머리만 안 깎았지, 입산수도 백일을 채웠으니까요. 이러다 이런 호젓함이 참 좋아 다시는 지지고볶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살아봐야 알 일입니다. 정해놓고 살면 재미없습니다. 다만 마음이 가지 않는 어떤 짓도 하지 않겠습니다. 그건 삶에 대한 예의입니다.

왼쪽 주머니에 볼록한 면장갑을 꺼내 나무를 합니다. 톱도 낫도 가져오지 않아 오늘은 손으로 꺾어 엮을 수 있는 나무만 해가기로 합니다. 간벌 해가고 간 자리에 잔가지들이 제법 됩니다. 톱이나 낫을 가져오면 꽤 굵은 가지도 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절대로 하루나 이틀치 이상 나무를 하지는 않기로 합니다. (비 올 때를 대비해서 이틀치 정도씩은 하기는 해야겠습니다.) 하루 온 종일 먹는 것, 몸 뎁히는 것, 하여간 내 한몸 살게 하는 데만 집중하기로 합니다.

'돈' 없이 '돈' 필요없이 사는 것이 내 야무진 꿈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도 가장 쉬운 꿈입니다. 그것만 하고 살면 죄지을 일도, 머리 번잡할 일도, 호흡 까빠질 일도 없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것에 매일 감사만 하고 살게 될 것이 뻔합니다. 그렇게 좋은 일을!!!

도시 사람들은 어쩌다 휴가를 가서 쑥을 캐거나 고사리를 끊거나 밤을 줏으면 겁나게 좋아합니다. 조개를 캐도 좋아하고 물고기를 잡아도 좋아하고 그걸로 매운탕 끓여먹으면 더 좋아합니다. 그러면 일년열두달삼백육십오일 그렇게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정말로 좋겠지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렇게 좋은 것을 계속해서 할 수 있다고 하면 다들 도망갑니다. 그리고 자식들한테도 그렇게 좋은 것만 시킬 수 있다고 하면 더 기겁을 하고 도망갑니다.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귀가 안 들리는 주인아짐은 내가 감격해서 듣고 있으니까 목소리를 높여 말하셨더랬습니다. "여그는 증말로 존 데여. 봄에는 산에 가서 고사리 끊고 두릅 끊어서 하루 멫 만 원은 벌어. 아! 그라고 쩌쪽 바다, 뻘에서 나는 벨거 벨거 다 잡아다 새끼들 믹이고 입히고 갈쳤어! 내가 낙지 잡는 선수랑께! 내가 담번에 오믄 각시랑 항꾼에 가보까?...... 그래, 그래, 산에도 가도 바닥에도 가장께! 먹고살 거 걱정 한나도 안 해도 된당께! 아, 글고, 그래 해서 산에 댕기고 바닥에 댕기믄 건강에도 좋고, 하루하루가 소풍이여. 닐리리 날라리여어!"

캬! 기가 막힌 말씀이십니다. 주인아짐 오실 날이 또 기다려집니다

 

장진희
돈 안 벌고 안 쓰고 안 움직이고
땅에서 줏어먹고 살고 싶은 사람.
세상에 떠밀려 길 위에 나섰다.
장터로 마을회관으로.
무주에서 진도, 지금은 곡성 죽곡 보성강변 마을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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