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사 사천왕상 앞에서, 부끄러움 없는 우리는 참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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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사 사천왕상 앞에서, 부끄러움 없는 우리는 참 아프다
  • 유대칠
  • 승인 2022.12.18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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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칠 칼럼
노트르담 성당 가고일(사진출처=위키피디아)
노트르담 성당 가고일(사진출처=위키피디아)

중세 성당은 대체로 ‘서’에서 ‘동’으로 가는 축 위에 세워졌다. 성당의 중심에서 바라보면 ‘제단(presbyterium)’은 동편이고, 성당의 ‘입구’는 서편이다. 그러니 서쪽에서 들어와 동쪽을 바라보며 걸어가 동편을 바라보는 게 중세의 성당입니다. 물론 지금과 같이 좋은 기구가 없으니 정확한 동과 서는 아니어도 대개 이와 같습니다.

‘동편’은 그들에게 예수의 공간이었습니다. 유럽 사람에게 근동은 그러합니다. ‘서편’은 자신들의 공간입니다. 자신들이 살아가는 일상의 공간을 의미합니다. 때론 욕심으로 누군가를 괴롭히고, 때론 아집으로 자기 이익만 계산하며 살아가는 그런 자신들이 홀로 자기 혼자 행복하기 위해 애쓰는 바로 그곳입니다.

그들에게 동편은 다릅니다. 그곳은 모두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내어놓은 예수의 공간입니다. 홀로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이를 부끄럽게 하는 그런 공간입니다. 서에서 동으로 성당을 만든 건, 자기만을 위해 홀로 살아가는 이들이 이젠 전체를 위해 더불어 살아가자는 뜻이 녹아든 것일지도 모릅니다. 정말 물리적 동쪽이 아니라,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우리 마음의 동쪽을 마음에 두자는 뜻도 녹아든 것일지 모릅니다.

전쟁으로 근동을 지배하고 예수의 흔적을 고고학적으로 찾아야지만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동쪽으로 가는 건 아닙니다. 그저 자기 자신만을 위해 홀로 살아가는 그 삶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알면 그것이 동쪽을 향해 살아가는 삶의 시작일지 모릅니다.

노트르담 대성당을 보자. 중앙 정문은 최후 심판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악마와의 싸움을 지휘하는 미카엘 대천사가 선 뒤로 성당에 들어서지 못하고 지옥을 향하는 이들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자세히 보면 성경 속 신의 뜻에 따라 살다 구원받은 이와 그렇지 않고 지옥으로 간 이들이 가득 새겨져 있다. 미카엘은 이곳에 악마가 들어설 자리가 아님을 보이며 악마,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이의 그 마음을 응시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 조각들은 우리에게 지금 너는 너만 행복하기 위해 홀로 살다 지옥에 갈 사람인지 모두 더불어 행복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놓은 더불어 삶을 살며 천국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인지 돌아보라는 말은 건넨다. 그런 자기 ‘돌아봄’ 이후 성당에 들어선다. 아니, 진짜 성당은 그렇게 자기를 돌아본 이들이 들어서는 곳이다. 예수의 자리, 모두를 위해 자기를 내어준 바로 그를 향한 삶은 바로 그러한 돌아봄에서 시작될 수 있기에 말이다.

 

사진=유대칠
사진=유대칠

직지사를 찾았다. 나에게 직지사는 참 편한 곳이다. 그냥 그곳에 가면 마음이 편하다. 그곳 직지사를 찾아 직지사 대웅전을 향해 걸으면 천왕문을 지나게 된다. 그곳을 지나며 당연히 크게 우람한 ‘사천왕’을 마주하게 된다. 사천왕의 앞에서 나는 나를 돌아본다. 불교는 붓다를 믿는 종교심보다 내가 부처가 되려는 애씀이 참된 종교심인 종교다. 사천왕 앞에 부끄러움이 없을 때, 나의 욕심으로 누군가에게 독이 되지 않고, 나의 아집으로 나 자신에게 나 자 자신이 독이 되지 않을 때, 드디어 불이문을 지나 붓다의 공간인 대웅전, 그것에서 붓다, 어쩌면 진짜 나를 마주하며 마음의 평화를 누리게 된다. 조건은 사천왕 앞에, 그 무서운 눈앞에 부끄러움이 없을 때다.

10월 29일 너무나 비극적인 일이 또 일어났다. 158명이 억울하게 고통 속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들을 그렇게 떠밀어 죽음에 이르게 한 그 힘은 이 땅의 부조리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그 무게는 이 땅 부조리의 무게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책임이 소임인 이들은 하나같이 변명뿐이다. 부끄러움을 모른다. 심지어 그들의 그 죽음 앞에 차마 입에 담기 힘든 독설과 조롱을 일삼는 이들, 심지어 정치인을 본다. 직지사 사천왕의 발아래 밟힌 마구니 같은 이들이 가득하다. 세월호의 비극을 그저 별것 아닌 사고라 조롱하고 모욕하던 이도 여전히 그 자리에서 또 다른 언어로 그저 자기 자신의 욕심을 따라 살고 있다. 부끄러움 없이 말이다.

중세 성당의 기둥엔 괴물들이 새겨져 있다. 그곳에 앉아 신에게 자신의 복을 비는 이들을 향해 부끄러움이 없는지 누려 보고 있다. 부끄러움 없이 성당 입구를 지나 자신만의 복을 빌기 위해 그 자리에 앉은 이들을 그렇게 노려보고 있다. 그러나 자기밖에 모르는 이, 감은 눈으로 자기 욕심만 따라 사는 이는 그 노려봄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다. “거기가 너의 자리냐!” 노려보아도 부끄럽지 않다. 사천왕의 이 그렇게 큰 눈으로 힘주어 노려보아도 하나도 마찬가지다. 부끄럽지 않다. 성당에 들어설 때, 사찰에 들어설 때, 자신을 돌아보자. 어쩌면 그 노력이 10.29 참사 더 깊고 깊은 아픔마저 조롱하는 ‘마구니’가 되지 않는 삶의 첫걸음일지 모르니 말이다.

나는 사천왕의 앞에서 지금의 우리가 참 아프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한다.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고전 세미나와 연구,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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