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따와 배려, 무엇이 진실일까?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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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따와 배려, 무엇이 진실일까? 2편
  • 문지온
  • 승인 2022.11.22 08: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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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온의 심온재 이야기
사진=문지온
사진=문지온

환대는 애초에 기대하지 않았다. 나라도 어느 날 갑자기 낯선 사람이 나타나면 얼마쯤은 경계하는 마음을 갖고 지켜볼 거니까. 하지만 별다른 잘못이나 해를 끼친 것도 없는데 난데없이 ‘왕따와 추방’이라니! 이건 지나친 처사이고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복잡해졌다. 심란할 때면 흔히 그랬듯이 밖으로 나가는 대문의 빗장을 닫아걸었다.

S 자매님을 포함하여 고흥에서 알게 된 인연들에게 ‘당분간은 글 작업에만 집중하고 싶다. 여유가 생기면 내 편에서 연락드리겠다’고 말했지만 그 말을 하는 순간에도 나는 알고 있었다. 나의 은둔이 글 작업을 위한 것이긴 하지만 그보다는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 될 것임을. 미처 몰랐던 것은 그 치유의 힘이 소박하지만 정성껏 꾸며놓은 기도방에서가 아니라 작은 마당에서 올 거란 것이었지만.

분잡한 관계에서 벗어나 홀로 머물게 되면서 제일 먼저 일어난 변화는 딱지가 앉을 만하면 새로 생기던 입술의 물집이 사라진 것이었다. 희미한 흉터는 남았지만 깨끗해진 입술을 보면서 생각했다. ‘그동안 내가 다른 문화와 정서를 가진 사람들, 거칠고 잡다한 말들 속에서 견디느라 많이 힘들었구나.’ 그래서 마음이 아팠던 날, 비로소 거울을 보았다. 꺼칠한 피부에 짙은 다크서클을 가진 여자가 지치고 슬픈 표정으로 거울 속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빛 속에 한 아이가 있었다.

힘들고 고단한 삶의 무게에 짓눌려 마음과 영혼이 바수어진 어른들이 저마다 안고 있었던 고통을 은근한 공격과 날카로운 독설로 풀어내는 전쟁터에서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사람들이 이러는 거지?’ 어리둥절 하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깊은 슬픔과 무력감을 느끼며 서 있는 예닐곱 살쯤 되는 여자아이가. 하얀 망초꽃이 수수했던 마당 있는 집에서 살다가 넷째 오빠의 치료비로 집을 팔고 어느 날 갑자기 철거지역이었던 영주동 산동네로 옮겨가 살았던 시절의 나!

그 아이에게 잃어버린 마당을 찾아줘야 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고, 나는 그 아이와 마당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때는 꽃샘 추위를 사라진 봄이었고, 네 평 남짓한 심온재 마당은 남도의 햇살과 바닷바람과 바람과 비를 맞으면서 자라는 생명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그 아이와 함께 그 아이의 눈으로 마당을 돌보고 마당에 깃든 생명들이 변화하는 모습을 즐겁게 관찰했다. 누렇던 잔디가 아주 느린 속도로 푸른 빛으로 변해가는 모습과 잔디에 눌려 깃들어 있는지도 몰랐던 이름 모를 풀씨들이 싹을 틔우더니 하루가 다르게 자라 꽃봉오리를 맺고 밤사이에 그 작고 앙증맞은 꽃잎을 펼쳐 자신만의 크고 아름답고 신비로운 우주를 보여주는 여정과 지렁이와 두꺼비, 도마뱀 등이 풀들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어느 순간 사라지더니 훌쩍 자란 모습으로 나타나 “오, 너 아직 여기 살고 있었구나!” 반갑게 말하게 되는 순간, 순간, 순간들을...

그러는 동안 봄이 지나갔고, 단언컨대 그 봄은 내 생(生)에서 가장 많이 감탄하고 환호하고 “오, 하느님!(이게 정녕 당신이 만드신 세상이란 말입니까? 어떻게 하면 이렇게 작은 풀꽃 한 송이도 이토록 완벽하고 독특하고 아름다운 자신만의 우주가 새겨넣을 수 있지요?! 당신은 누구십니까? 대체 당신은 어떤 분이시길래 이토록 작은 생명 하나에도 이렇듯 크고 섬세하고 완벽한 사랑과 정성을 기울이시는 겁니까?!)” 즐거운 탄성으로 기도했던 시간이었다.

그러는 동안 내 안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오랫동안 내 안에 죽어있었던 무언가가 살아나는 것을 느꼈고, 내가 아는 단어로 그 느낌을 표현하자면 ‘생명과 생(生)에 대한 찬탄과 경이로움’ 이었다. 오래전 갑자기 좋아했던 마당을 잃어버린 어린아이에게 마당을 되찾아준 대가로 받은 선물이자 내 안에 있던 상처로 인해 잠들게 했던 생명의 하느님께서 기지개를 켜며 몸을 일으키시는 소리...!

“밖에 나오지도 않고 혼자 집에서 뭐해요? 심심하지 않아요?”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나갔더니 S 회장님이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왕따와 추방’ 운운하던 사건으로 사이가 서먹해져서 어쩌다 길에서 마주치면 인사할 뿐, 서로의 집을 오가지 않게 된 지 두 달쯤 지난 후였다. 그 사이 뭔가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사이 내 마음의 평수가 넓어져 다르게 보인 것일까? 반짝이는 눈빛은 여전했지만 전에는 크고, 단단하고, 야무져 보이던 그녀가 작고 여위고 초췌해보여 깜짝 놀랐다.

들어와 차 한 잔 마시고 가라는 내게 S 회장님은 괜찮다며 방금 밭에서 뜯은 파 한 묶음을 주고 가셨다. 바쁘게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애잔한 감정이 느껴졌다. 몇 년째 투병 중인 남편 간병에 집안일에 크고 작은 마을 일까지 저 작은 몸으로 버텨내고 있으니 얼마나 고단하고 힘들까, 싶어. 바쁘다 보면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기 힘들겠다 싶어 냉동실에 넣어둔 즉석볶음밥을 그녀에게 갖다주려고 챙기는데 지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녀가 다녀갔다는 이야기에 지인이 물었다. 그녀의 행동이 ‘왕따’인지 ‘배려’인지에 대한 결론은 내려졌냐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뭐가 진실인지는 아직도 몰라. 이젠 굳이 알고 싶지도 않고. 그런데 그 일로 배운 것이 있어.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꼭 필요한 사람이고, 어떤 일도 좋기만 하거나 나쁘기만 하지는 없다는 거야. 그 일은 분명 내겐 안 좋은 일이었지만, 덕분에 혼자 머물면서 좋은 시간을 갖고 생명의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잖아.”

그로부터 6개월이 넘은 지금, 나는 아직도 확실히 모르고 있다. M 자매님이 내게 전한 ‘왕따와 추방’ 이야기가 사실인지,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마을 사람들이 나를 왕따시켜 쫓아내려 했는지. 그리고 지금은 그런 것이 내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이 마을에서 여전히 살고 있으며, 지난했던 삶의 무게와 어려움이 그대로 느껴지는 몇몇 마을 어르신들을 마음에서 우러나 좋아하고 있고, 즉석에서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음식이나 영양분이 많은 사골국물 같은 것을 보면 S회장님이 생각나 한 봉지 따로 챙겨둔다는 것이다. 때론 진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서로를 바라보고 작은 것이라도 나눌 수 있는 따뜻한 마음....!

 

문지온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방송작가로 활동하면서 몇몇 문학상을 수상했다. "글을 통해 따뜻함에 이른다"는 뜻으로 필명을 문지온으로 정했다. <남은 자들을 위한 800km>(ekfrma, 2016)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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