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에서 다시 무주를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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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에서 다시 무주를 찾다
  • 장진희
  • 승인 2022.10.24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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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이 살려낸 것들8 - 진도에서: 기억의 이치

참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멀리서 사는 친구 둘과, 몸이 다 자라도록 나를 키워낸 도시의 바닷가를 우연히 가게 되었습니다. 마침 바람이 엄청나게 불고 있었고 밤늦은 포장마차였습니다. 친구 둘이 하도 열심히 심각해지고 있어서, 나만 살짝 빠져 나와 공중에 높이 매달린 도로표지판이 날아갈 듯 흔들리는 길가 시멘트 말뚝에 앉았습니다.

껌껌한 하늘과 바다와 땅 사이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습니다. 어슴푸레 바다 쪽으로 튀어나온 땅 끝에서 나는 소리. 그 소리는 마치 미친 듯이 불어제끼고 있는 바람에 장단이라도 맞추는 듯한, 징! 무징소리였습니다.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누가 이런 날, 이런 시간에 저렇게 환장하게 징을 두들겨대고 있을까?

너무도 희한해서 두 친구에게 갔습니다. 그런데 두 친구는 그 소리가 안 들린답니다. 이 친구들이 취해서 정신이 없나 보다 하고 포장마차 주모에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건 또 왠일입니까? 주모 귀에도 그 소리가 안 들린다는 것입니다.

"아니! 저렇게 생생하게 들리는 저 징소리가 안 들린다고요?"
"......"
주모 표정이 멀뚱해집니다.

"저기, 바다 쪽으로 튀어나온 저 끝에서 들리잖아요?"
"거기믄...... 옛날에 암자가 있던 자린디, 근디 그 암자는 없어진 지 오래 됐제. 그때는 새벽에도 기도한다고 징 뚜드리는 소리가 들리고는 했는디."
머리가 쭈뼛해지는 순간입니다. 아직도 내 귀에는 그 소리가 끊임없이 들리고 있습니다.

밖으로 나와 도로 그 자리에 앉았습니다. 젊음이 시작되는 날, 이 도시에서 길은 북쪽으로만 나 있었습니다. 남쪽으로는 바다와 섬이 있을 뿐, 길이라고는 없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속에서 뜬금없는 소리가 일어납니다.

'길은 남쪽으로 나 있다!'
'길은 남쪽으로 나 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요. 생전 처음으로 내 땅과 내 집을 갖게 된 지 채 한 해도 되지 않은 때입니다. 나는 한 그루 나무가 된 것처럼 그 산골에서 뼈를 묻으리라 생각하고 있었지요. 머리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고 생각해본 적도 없는 소리가 내 안에서 제 멋대로 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그 일은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그 후 오륙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보니 나는 정말로 남쪽으로 옮겨와 있습니다. 바다 건너 섬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이사를 온 것입니다. 노래 가사처럼 "산과 바다에 우리가 살고..."가 되었습니다.

이곳은 참으로 아름다운 곳입니다. 보이는 것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흥도 신명도 남아 있는 곳입니다. 그래도 늘 내가 살던 산골이 그립습니다. 워낙 거리가 멀어 큰맘 먹고 나서지 않으면 어어 하는 사이에 몇 년 세월 흐르게 생겼습니다. 나는 최소한 일 년에 한 번씩은 가지 않으면 안 될 일을 만듭니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산골에는 소금과 해산물이 귀하고 비쌉니다. 요즘이야 워낙 교통이 발달해서 예전처럼은 아니더라도 소금 같은 경우, 중간에서 하도 장난을 쳐서 제 맛 나는 천일염을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음식 맛은 장맛'이고 '장맛은 소금맛'이라고, 그런 소금을 넣으면 김치고 된장이고 쓰고 맛이 없습니다. 또 이곳에서 나는 다시마는 싸고 질이 좋습니다.

나는 일 년에 한 번씩 염전에서 받아온 소금과 여기에서 말린 다시마나 미역 같은 것을 트럭에 싣고 산골 마을로 '소금장사'를 나섭니다. 기름값이 나오니 여비걱정 없이 다녀올 수 있습니다. 또 굳이 날짜를 잡고 손님처럼 가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운 사람들이 밭에서 일하고 있거나 집안 일을 하고 있거나 마을회관 앞에 모여 있을 때 그냥

"소금 사려어!"
"다시마 사려어!"
하고 들이닥칩니다. 그렇게 그리운 사람들끼리 까무러치게 반가워합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별일은 없는지...... 소금 내려놓고 다시마, 미역 풀어놓고 차도 마시고 밥고 같이 먹으며 회포를 풉니다.

그 사이, 순이 아줌마네 돌이 아저씨도 돌아가시고 근배 아저씨도 돌아가셨습니다. 근배 아저씨는 우리가 이사 갈 무렵에 돌아가셨고, 돌이 아저씨는 언젠가 꿈에 보여 전화를 했더니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고 해서 알았습니다.

순이 아줌마는 만나자마자 눈물이 그렁해집니다.
"자네들이 울 아저씨 살렸었는디...... 그 뒤 몇 년 동안은 도로 일도 하고 괜찮았는디......"
"근데 어쩌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넘어져서 머리를 좀 다쳐 몸이 안 좋았거든, 근디 머리는 괜찮아졌는디 운동 삼아 자꾸 걸어 다녀야 한다고 해서, 나는 일하러 가고, 울 아자씨는 혼자서 얇은 옷 입고 바깥에 나다니곤 했던 모양이여. 감기가 폐렴으로 갔는디, 병원에 갔더니 이미 늦었디야. 으휴! 내가 잘못했어. 맨날 일한다고 그 양반 제대로 챙겨 주지도 못하고......"
순이 아줌마 눈물을 보니 또 가슴이 미어집니다. 막걸리 한 병을 받아 들고 산소에 갑니다.

"수길 아버지! 장진희 왔어."
순이 아줌마가 새삼 소개를 합니다. 절을 합니다. 어느새 새 한 마리가 나무 끝에 앉아 있다 반가운 소리를 내며 머리 위로 지나갑니다. '큰나무 할아버지'가 굽어보고 있는 양지 바른 땅입니다. 이제는 순이 아줌마 혼자 부치는 밭 바로 옆입니다. 차가운 땅에 누워 있어도 늘 같이 할 수 있어 남아 있는 사람에게는 훨씬 다행입니다. 마음이 짠해져서 입에서는 고약스런 소리가 납니다.

"순이 아줌마! 밭에서 일하다 말고 힘들면 여기 와서 뗏장 쥐어뜯음서 영감 욕 좀 해주쑈. 야, 이 영감탱이야! 혼자서 편하게 누워 있능께 몸띵이 편하고 좋제? 그라고 말이요오."
"안 그래도 그라고 있구만. 그려, 그려, 내 욕도 하고 쥐어뜯기도 하고 그럴 티여."

이제 순이 아줌마 혼자서는 힘에 부쳐 ‘큰나무 할아버지’ 밑에 있는 밭은 묵어 있습니다. 한참 밑으로 평평한 밭에만 농사지은 흔적이 보입니다. 그 눈길을 눈치 채고 순이 아줌마가 말합니다.
"자네들이 저 소나무 살려놨제? 저짝 골짜기 올라가는 삼거리에 있는 큰 소나무도."
"자리가 좋네요. 저렇게 좋은 소나무도 가까이 있고."
"긍게 말이여. 아! 그때 자네들 아니었으믄 저 소나무 없어질 뻔했제? 우리가 멋도 몰르고 돈 십만 원에 팔아불 뻔했능께. 자네들이 퇴비 줘서 울 아자씨가 저 밭에 뿌렸었는디......"

순이 아줌마 기억하고 내 기억하고는 딱 맞아떨어집니다.

저녁에 다시 순이 아줌마 집에 들릅니다. 낮에 이웃들이 모여 있어서 순이 아줌마한테 못 드린 다시마를 살짝 드리고 가려고. 순이 아줌마도 고추장 단지를 준비해 놓고 계십니다. 안 그래도 다시 들렀으면 좋겠다 하고 기다리고 계셨다 합니다. 한참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는데 근배 아저씨네 아주머니가 저녁 먹고 밤마실을 오십니다.
"아이고! 이게 누구야아! 그래 잘 살아?"
"예, 아짐도 잘 계셨어요?"
"그려, 오랜만이네. 아, 내가 자네 집 가서 고추지도 담가 주고 그랬는디."
"아! 맞아요. 아짐한테 고추지 담는 것 처음 배웠어요. 저는 여기가 친정 같아요."

순이 아줌마도 한마디 하십니다.
"그려, 그려. 자네는 여가 친정이제. 그람, 여그 오면 밥 걱정이 있나 잠자리 걱정이 있나, 다들 식구 같응게...... 아, 그래 바닷가로 가니까 좋아?"
"예, 거기도 좋기는 좋아요. 여기보다는 먹고 살 것도 더 있고. 애들이 있는 동네라 애들 갈치는 일도 하고요."
"그려, 잘 살믄 됐어. 그나저나 이라고 와준께 겁나게 반갑네."

한참 수다를 떨다 보니 서쪽 달이 기울어 갑니다.
"너무 늦기 전에 가봐야제. 또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많을 것인디....."
순이 아줌마가 먼저 사정을 봐줍니다. 내년을 기약하고 인사 하고 나옵니다.

나오면서 재미있는 생각이 듭니다. 근배 아저씨네 아짐 기억하고 내 기억하고 둘 다 맞기는 맞는데, 아짐은 당신이 고추지 담가준 기억이 더 나는 모양입니다. 나는 그 아짐을 보면 내가 술대접해드리던 생각이 먼저 납니다.

그렇게 훌륭한 심성을 가졌던 근배 아저씨도 집에 가서 마누라한테는 고약한 영감이었습니다. 아짐은 영감한테 모진 꼴을 당한 다음날이면 우리 집에 오곤 하셨습니다.

"장진희!"
순이 아줌마가 그렇게 부른 뒤로 좀 친해진 아짐들은 전부 그렇게 부릅니다.
"예! 오셔요? 얼릉 들어오셔요."
하고 마주 앉고 보면 아짐 얼굴에 멍이 들어 있습니다. 그렇게도 사람 좋은 아저씨가...... 이 지점에서 나는 마음이 헷갈립니다. 사람이라는 것이 참으로 첩첩산중입니다.

"나 술 한 잔 다오."
"예! 매실주 담가 놓은 것 있는데 그것 드릴까요?"
하고 술을 내드리면 아짐은 한 잔 쭈욱 들이키시고 이제 신세한탄을 시작하십니다.
"내 우세스러서 어디 가서 말도 못하고...... 자네한테 속이라도 좀 풀라고 왔네."
"예에, 근디 아저씨는 어째 그러신데요? 술 잡숫고 그래요?"

그렇게 장단을 맞추기 시작하면 아짐은 일배 일배 부일배 하고, 원없이 영감 욕도 하고 꺼이꺼이 울기도 하십니다. 나는 아짐 가슴 속에 맺혀 있는 것 다 토해 낼 때까지 같이 취하고 같이 웁니다. 술은 그럴 때 약입니다.

사람살이가 그렇습니다. 어디 가서 실컷 하소연이라도 하면, 금방이라도 숨넘어갈 것 같던 마음이 풀리면서 시원해집니다. 좀 살 것 같아집니다.

그제서야 아짐은 취기를 다스리며
"옴메, 시방 내가 뭐하고 있다냐? 고구마 순 끊으러 왔다가 한정없이 이라고 앉었네."
하고 일어나십니다. 좀 있다는 아직 이른 고구마 몇 개 캐서 우리 집 마루에 놓고 가십니다.

내가 드린 술 한 잔이 가슴 속에 홧병 뭉쳐 있는 것 조금이라도 풀어지기를 고대하던 마음, 내가 아짐에게 도움이 되었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는지 나는 그 생각부터 납니다. 그런데 그 아짐은 아직 고추지 담그는 것도 모르는 나한테 손수 당신 밭에 끝물 고추 따다가 소금 풀고 항아리 준비 시키고 고추지를 담가 주셨던, 당신이 도움이 되었던 일이 마음에 더 남으셨던 것입니다.

내가 받은 것보다, 내가 주어서 남한테 도움이 되었던 마음이 더 오래 마음에 남는 걸 보면, 사람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훨씬 마음에 좋은 모양입니다. 석가모니가 이 집 저 집 고루 탁발을 하고 다닌 이유를 알 것도 같습니다.

 

장진희
돈 안 벌고 안 쓰고 안 움직이고
땅에서 줏어먹고 살고 싶은 사람.
세상에 떠밀려 길 위에 나섰다.
장터로 마을회관으로.
무주에서 진도, 지금은 곡성 죽곡 보성강변 마을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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