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이 되어 불도(佛道)를 나누었다-도리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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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이 되어 불도(佛道)를 나누었다-도리사에서
  • 유대칠
  • 승인 2022.10.24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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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칠 칼럼
도리사 (사진=유대칠)
도리사 (사진=유대칠)

불교 사원을 흔히 ‘절’이라 부른다. ‘절’을 많이 하는 곳이라 ‘절’이라 부른다지만, 그 말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몸을 굽혀 경의를 표현하는 ‘절’은 중세 국어에도 ‘절’로 표기되지만, 불교 사원을 뜻하는 ‘절’은 ‘뎔’로 표기된다. 즉, 중세 국어에서 이 두 말은 서로 다른 발음을 가진 완전히 다른 말이었다. 그렇다면 불교 사원을 두고 부르는 그 ‘절’이란 말은 도대체 어디에서 어떻게 비롯된 말일까?

신라 최초의 불교 사원은 구미 선산의 도리사(桃李寺)다. 도리사는 고구려 승려로 신라에 와서 불교를 전한 아도화상(我道和尙)이 창건한 사찰이다. 고구려에 불교를 전한 순도(順道)는 중국의 전진 사람이고, 백제에 불교를 전한 마라난타(摩羅難陀)는 역시나 중국의 동진 사람인데, 신라에 불교를 전한 ‘아도’는 중국 사람이 아닌 고구려 사람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전해지는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는 우리 역사 속 가장 오랜 승려이기도 하다.

아도화상은 중국 위나라에서 불교를 공부하고 고구려로 돌아와 어머니의 권유를 따라 고구려가 아닌 고구려와 사이가 좋지도 않은 신라로 가 불교를 전한다. 이때가 눌지 마립간(눌지왕) 2년, 즉 417년이다. 아직 신라 사람에게 불교는 익숙하지 않았다. 신라가 공식적으로 불교를 수용하는 이차돈(異次頓)의 순교, 즉 법흥왕 14년 즉 527년보다 110년이나 앞선 시기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아도’가 열심히 불법을 전하려 하여도 익숙하지 않은 불교를 신라 지도층은 차갑게 거부하였다. 비록 향(香)을 사용하여 미추 이사금(미추왕)의 딸인 성국 공주의 병을 치료하면서 미추 이사금의 도움을 받아 지금은 사라진 흥륜사(興輪寺)를 경주에 세워 불교를 신라 사람에게 전파하려 하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미추 이사금의 죽음 이후 다시 신라 지도층의 배척 대상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에 지금의 구미 선산으로 피해 ‘묵호자(墨胡子)’란 이름으로 숨어 지낸다. 이때 아도를 품어준 이가 바로 당시 모례(毛禮)다. ‘아도’는 모례의 집에서 그저 불법을 묵상하며 살지 않았다. 낮이면 품삯 하나 받지 않고 모례의 가축 수천 마리를 돌보며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 노동자의 삶을 삶았다. 한마디로 그곳에서 그곳 사람과 다르지 않은 그곳 사람의 벗이 되어 산 거다.

하루의 노동이 끝난 밤 ‘아도’는 ‘모례의 집’에서 자신의 벗과 불법(佛法)을 두고 대화하였다. 높은 자리에서 권위로 명령하거나 훈계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일하던 벗으로 벗에게 말하고 또 벗으로 벗에게 질문하며 불법을 두고 대화하였다. 괴로움으로부터 해탈(解脫)하는 방법은 무엇을 가지고자 하는 마음, 무엇이 되고자 하는 마음, 무엇으로 고정되어 변하지 않으려는 마음, 바로 그 아집(我執) 때문이라며 말이다.

벗과 벗 사이의 대화로 깊어지는 불심을 점점 더 깊어갔다. 왕의 도움으로 경주 높은 자리에서 불법을 전하던 흥륜사의 ‘아도’가 아닌 민중의 벗이 되어 민중과 더불어 일하고 더불어 먹고 더불어 울고 더불어 웃는 모례의 집 ‘아도’에게서 신라 불교는 시작된다. ‘아도’와 더불어 있던 ‘모례’는 신라의 첫 불자(佛者)가 된다. 그리고 모례의 누이 사씨(史氏)는 신라 최초의 여성 불가 수도자가 되고, 이후 영흥사(永興寺)를 짓는다.

 

도리사 (사진=유대칠)
도리사 (사진=유대칠)

도리사는 바로 모례의 시주(施主)로 세워진 사찰이다. 그러니 지금도 도리사 주변엔 ‘모례장자터’와 ‘모례장자샘’과 같은 곳이 남아 있다. 또 ‘아도’가 소를 치며 벗과 일하던 곳은 지금도 ‘쇠골’이라 부르며, 아도가 살며 불법을 가르치던 마을은 불도(佛道), 즉 불교의 가르침이 열린 곳이라 하여 ‘도개(道開)’라고 한다.

중세 국어에서 절은 ‘절’이 아닌 ‘뎔’이라 했다. 모례, 즉 毛禮의 이두음(吏讀音)은 ‘털례’다. 쉽게 모례의 ‘모’가 ‘털 모(毛)’이기에 ‘털례’라고 이해해도 되겠다. 여기에서 시간이 지나며, ‘례’가 사라지고, ‘털’이 되고, ‘뎔’이 되어, ‘절’이 되었다고 한다. 어쩌면 신라 최초의 불교 사찰, 즉 신라 최고의 ‘절’은 불법을 두고 묻고 답하며 불심이 깊어진 첫 공간인 ‘모례의 집’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 신라인에게 불교 사찰에 간다는 말은 ‘모례의 집’에 간다는 말이 아니었을까? 그러니 ‘절’이란 말이 ‘모례’에서 나왔다는 말이 영 이상한 말은 아니게 들린다.

‘모례의 집’에서 가축을 키우는 아도는 벼농사를 짓는 벗과 자신과 같이 가축을 키우는 벗과 더불어 불법을 궁리하여 대화하였다. 그 대화 속에 모례를 비롯하여 마을 사람은 신라의 첫 불자가 되고, 모례의 시주에 마을 사람이 힘을 모아 도리사를 세운다. 또 신라의 첫 여성 불가 수도자가 나온다. 화려한 옷을 입은 권위의 자리가 아닌 가축 똥 냄새 녹아든 아도에게서, 민중의 벗으로 살아가는 아도에게서 신라 사람은 진짜 불교를 만난 거다.

어쩌면 지금 우리네 민중도 '아도'와 같은 참 종교인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면 누군가의 집은 기꺼이 또 다른 모례의 집이 되겠지. 크고 화려한 성당이나 교회 그리고 사찰이 아니라도 말이다. 종교의 힘이 사라져가는 시대라는 요즘, 어떤 차별 없이 모두의 해탈을 바란 아미타불의 공간인 도리사의 극락전 앞에서 ‘아도’를 생각해본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한다.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고전 세미나와 연구,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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