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선이 제도나 서비스가 되어서는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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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선이 제도나 서비스가 되어서는 안 돼
  • 최태선
  • 승인 2022.09.25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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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오늘 아침 서영남님이 올리신 이반 일리치의 글이다.

서기 300년 무렵에 마침내 그리스도교가 공인되었습니다. 주교들은 마치 행정장관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이 새로운 주교들이 맨 처음 한 일이 ‘환대의 집’을 세운 것이지요. 다시 말해, 예수가 우리에게 개인적 소명으로 주었던 것을 제도화한 것입니다. 그들은 피난민을 위해, 이방인들을 위해 지붕을 만들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1600년 전 그 당시의 많은 위대한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이 즉각 이렇게 소리쳤다는 사실입니다. “당신들이 그렇게 한다면, 당신네들이 자선을 제도화한다면, 당신네들이 자선이나 환대의 관습을 개인의 일이 아니라 공적인 사업으로 전환한다면, 그리스도교인들은 지금까지 누렸던 명성을 더 이상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리스도교인들은 대문을 두드릴지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언제나 여분의 이불과 빵조각과 양초를 준비해 두고 살아온 것으로 유명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치적인 이유로 서기 400년 내지 500년 이후 교회는 국가의 주요 수단이 되었고, 국가는 교회를 먹여 살림으로써 교회로 하여금 궁핍 속에 있는 사람들의 작은 일부를 제도적으로 돌보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평범한 그리스도인 가정은 문을 두드리는 사람을 기다려, 그에게 문을 열어주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임무를 면제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자선의 제도화되고 서비스라는 관념, 서비스 경제라는 관념의 역사적 근원입니다.

이반 일리치는 가톨릭 신부였다. 그러나 그는 가톨릭으로부터 스스로 물러났다. 나는 그가 물러나야 했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한 말은 옳은 말이다. 그러나 결국 그 옳은 것이 가톨릭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선을 넘지 않을 때까지는 괜찮다. 그러나 일정한 선을 넘고 그 영향력이 커지면 가톨릭은 가차 없이 자신의 존재를 위태롭게 만드는 이를 파문하거나 물러나게 한다.

내가 알고 존경하는 가톨릭 신자들은 대부분 파문을 당하거나 교회와 일정 거리를 유지하는 사람들이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가를 반드시 면밀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반 일리치는 자선의 제도화의 역사적 근원을 지적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변질된 그리스도교의 정체를 드러냈다. 그러나 교회는 일리치의 지적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일리치는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을 쫓아내는 곳이 되었다는 말을 한다. 맞다. 교회는 그런 곳이 되었다. 복음이 요구하는 것을 수용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복음대로 살거나 복음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것을 말하는 이들을 파문시키거나 쫓아낼 수밖에 없는 곳이 되었다.

이반 일리치가 신부였다는 사실 역시 중요하다. 만일 그가 신부가 되지 않았다면 그는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사람을 죽여도 되는 그리스도인과 죽이면 안 되는 그리스도인을 나누었다. 주교와 같은 성직자들은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평신도들은 사람을 죽여도 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었다. 이반 일리치는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는 그리스도인에 속했기에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가능했다. 사람을 죽여도 되는 그리스도인은 없다.

그리스도인은 애초에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폭력적으로 관철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비폭력으로 인내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의 비폭력저항이 실제로 강력한 로마를 이기고 로마를 무너뜨리기에 이르렀다. 이에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의 붕괴를 막고자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락해야 했다. 이것이 내가 이해하는 '신앙의 자유'이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는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특히 그의 이성은 냉철하고 뛰어났다. 그런 그의 이성이 결정적으로 그리스도교의 기반을 허물었다. 그리스도인을 살인을 해도 좋은 그리스도인과 살인을 해서는 안 되는 그리스도인으로 나눈 것도 그의 비상한 머리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교의 근간을 허문 것은 단지 그것만이 아니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께서 병자들을 방문하고 극도로 가난한 자들을 위로하는 것을 강조하셨던 것에 대해 언급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의 격정이 살아났다. 그는 불평등을 비판하고 ‘영예로운 사람이 열등한 사람보다 위에 서는 것’을 부당하다고 여기는 사람들(분명히 전통적인 그리스도인들)을 비난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성이 보수적이고 귀족주의적인 자비를 베풀게 한다고 여겼다. 그렇기에 부유한 자들이 ‘자선적인 분배를 통해 자기들이 가진 것을 가난한 이들과 공유한다.’

이 내용이 이반 일리치가 지적한 자선의 제도화, 자선의 서비스화의 출발점이다.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께서 병자들을 방문하고 극도로 가난한 자들을 위로하는 것을 강조하셨던 것에 대해 언급했다.” 이렇게 말한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의 재정으로 빈민구제소를 설치했다. 로마의 재정이 투입된 빈민구제소는 그러나 그리스도인 개인의 환대를 사장시켰다. 그렇게 시작된 국가의 빈민구제소를 따라 교회도 ‘환대의 집’을 설치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이 무슨 문제인가를 알지 못한다. 그것을 공동선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공동선을 행하는 것이 교회의 의무라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알지 못하는 것은 교회가 공동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정의를 위해 일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위에 인용한 글에서 말하는 것처럼 콘스탄티누스의 격정이란 “불평등을 비판하고 ‘영예로운 사람이 열등한 사람보다 위에 서는 것’을 부당하다고 여기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로마의 황제로서 콘스탄티누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부당한 것이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곁에 불러 놓고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는 대로, 이방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몸값으로 치러 주려고 왔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의 초석이다. 그런데 콘스탄티누스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부당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황제로서 “이성이 보수적이고 귀족주의적인 자비를 베풀게 한다고 여겼”고 그렇기에 부유한 자들이 “자선적인 분배를 통해 자기들이 가진 것을 가난한 이들과 공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그가 만든 것이 빈민구제소이다.

위대하고자 하는 예수의 제자들은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원동력인 능력주의와 정 반대의 주장이다. 능력주의는 약자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희생의 체제’를 형성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예수의 제자들의 사회는 희생양이 없는 평화(샬롬)의 나라인 하느님 나라를 형성한다. 모두가 자매와 형제가 되어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오직 유일한, 모든 사람들이 사람 답게 사는 나라가 된다. 그 사람들의 특성이 바로 데리다가 말하는 “무조건적인 환대”이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콘스탄티누스의 이성을 따르는 곳이 되었다. 이반 일리치가 지적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자선은 제도나 서비스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자선을 베푸는 사람들이 아니라 환대의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무조건적인 환대가 로마를 이기는 힘의 원동력이었고, 콘스탄티누스는 자선을 제도화함으로써 환대의 사람들이었던 그리스도인들을 무력화했다.

이반 일리치는 이것을 지적했고, 그것은 가톨릭의 근간을 허무는 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조직이 된 가톨릭은 그것을 수용할 수 없었다. 이반 일리치는 모든 직을 버리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누가 옳은가.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에 따라 우리의 길은 달라져야 할 것이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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