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 데이: 가난한 이를 받아들이는 일, 그리 간단치 않다
상태바
도로시 데이: 가난한 이를 받아들이는 일, 그리 간단치 않다
  • 도로시 데이
  • 승인 2022.09.13 12: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도로시 데이의 빵과 물고기 12-아기는 항상 겨드랑이에 빵 한 덩어리를 가지고 태어난다

아기는 항상 겨드랑이에 빵 한 덩어리를 가지고 태어난다. 
이 말은 새 아기가 막 태어나려 할 때 내 남동생의 스페인 계통의 장모가 말하곤 했던 위로가 되는 표현이었다. 사람들이 가난한 생활을 견딜수 있게 해 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철학이다.

나는 사람들이 “나에게 기회만 주어봐” 라고 말하는 소리를 듣는다. “내 빚만 갚게 해주시오. 내가 필요한 약간의 것들을 얻게 해 주시오, 그러면 나는 가난과 그것의 보상의 대하여 생각하기 시작할 겁니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요.”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강요된 가난과 자발적 가난 사이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가난의 희생자가 되는 것과 가난의 승리자가 되는 것의 차이를 알지 못한다. 나는 성 프란치스꼬가 “가난부인” 이라고 부른 가난이란 말을 인정하지만 강요된 가난을 궁핍이라고 부르고 싶다.

우리는 비참함이 가난한 사람을 만드는 원인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성프란치스꼬는 “작은 가난한 사람”이었으며 그보다 더 기쁨에 찬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프란치스꼬는 그의 성난 아버지를 피해 한 동굴에 숨어 있으면서 두려움과 공포에 떨며 눈물로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정당한 유산의 몫이라고 생각하며 아버지 재산 중 일부를 한 교회와 그가 살려고 했던 수도회를 재건하는데 사용하였다. 그가 가난부인을 사랑하게 된 것은 후의 일이었다. 아마 나병환자에게 키스한 것이 그를 질병의 공포와 까다로움으로부터 해방시켰을 뿐만 아니라 거대한 재물에 대한 애착으로부터도 자유롭게 해준 위대한 발디딤이었을 것이다.

한 방문자가 당신에게 어떻게 그와 그의 가족이 지하실방에서 살며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밤에 노동착취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지 그리고 집주인이 와서 과도한 집세를 신속하게 내지 않는다고 비난하는지 말할 때 가난을 옹호하는 것은 어렵다.

이웃의 셋방에서 최근에 강제로 퇴거를 당해서 길거리로 쫓겨난 사람들이 크리스티가의 뒷골목 벽 한쪽에 가구들을 쌓아 올렸을 때 가난을 옹호하는 것은 어렵다.

특히 우리가 따뜻한 집에서 편안하게 살고 풍성한 식탁에 앉아 있으며 따뜻하게 옷을 입고 있으면서 그런 사람들에게 “기뻐하고 즐거워하시오, 하늘에 큰 보상이 있을 것이오”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지난달 나는 집없는 가족들을 보호하기 위한 시의 구호시설을 방문하였다. 나는 그곳에서 몇시간 동안 한 가족의 가난과 궁핍을 주의 깊게 관찰하면서 앉아있었다. 두 명의 아이들은 부모의 팔에 안겨 잠들어 있었으며 다른 네 명의 아이들은 부모들에게 버둥거리며 매달리고 있었다. 또 다른 젊은 부부는 기다리고 있었다. 부인이 임신중이었다.

나는 스파이처럼 보이기를 원치 않았다. 그곳에 갔던 이유는 집 없는 가족들이 어떻게 아파트를 얻을 수 있는지 최근 정보를 알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나는 담당하고 있는 젊은이에게 나를 소개했다. 그는 사람들 사이에 앉아 있으라고 했던 것을 사과했다. 그는 나를 “단지 의뢰인들 중의 한사람”이라고 생각했다고 설명하였다.

때때로 성 프란치스꼬의 경우처럼 까다로움으로부터의 자유와 세속 재화로부터의 이탈은 한 걸음에 도달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이렇게 생각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나이가 더 들어감에 따라 인생은 수많은 단계들로 이루어지며 그 단계들은 매우 작은 걸음들이며 거대한 발걸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더 깨닫게 된다. 나는 “나병환자에게 키스”를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의도적으로 했지만 그것 때문에 내가 훨씬 나아졌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첫 번째는 이른 어느날 아침 성혈성당의 계단에서였다. 얼굴이 암에 걸린 한 여자가 구걸하고 있었는데(빈민가에서만 거지들의 구걸이 허용되었다), 내 쪽에선 희생도 아니고 단순히 누군가가 내게 주었던 희사금을 다시 그녀에게 건네 주는 것이었는데, 그때 그녀는 내 손에 키스하려고 하였다.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눈과 코가 있었던 자리가 움푹패인 그녀의 더럽고 늙은 얼굴에 키스하는 것뿐이었다. 그것은 영웅적인 행동처럼 들리지만, 그렇지가 않았다. 우리는 너무나 빠르게 추함에 익숙해지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피한 어떤 것은 사랑에 대해서 조금더 배우고 나면 내일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있다. 간호사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으며, 또한 어머니들도 그렇다.

두 번째는 내가 몸집이 크고 이빨이 빠졌으며 거칠게 말을 하고 밤의 악몽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술취한 매춘부에게 잠자리를 주는 것을 거부하고 있을 때였다. 그녀는 집안에 소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나는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가 당신이 아니오 라고 말해야 했을 때, 누군가에게 어떤 것을 거절해야 했을 때 그 사람이 약간이라도 기분 좋게 돌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가 최소한의 것을 하는 것이 좋다고 말한 것을 계속 기억하였다. 나는 이 여자에게 잠자리를 거절해야 했으며, 그녀가 내게 키스해 달라고 요구했을 때 그렇게 했다. 그녀의 행동은 역겨운 것이었다. 그것은 정상적인 인간애정의 표현이 아니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로 괴로워하고 또한 그것들은 기억에서 희미해진다. 그러나 매일, 매 시간 우리자신의 소유물을 포기하는 것과 특히 우리자신의 충동을 억누르고 다른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은 어렵고도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어려움들이 앞으로 더 쉬워지리라고 생각할 수가 없다.

당신은 발가벗을 수 있고 또 발가벗길 수 있으나, 여전히 문어처럼 안락과 귀찮음이 없는 시간, 편안함과 상쾌함을 찾아 나설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내적인 감각을 만족시키는 책들이나 음악일 수 있으며, 혹은 음식이나 술, 커피나 담배일 수도 있다. 한 가지를 포기해야한다는 것은 다른 것을 포기하는 것보다 더 쉬운 것이 아니다.

때때로-자주 베네딕또 요셉 라브르 성인과 같은 전기를 읽고 나서 우리는 공공임대주택이나 가까이 있는 구세군에서 온 사람들이 자주 그렇게 하듯이 가난에 대해서, 홀로 나가는 것, 오갈 때 없는 사람들과 사는 것, 공원 벤취나 시구호소에서 자는 것, 교회에서 사는 것, 성체 앞에 앉아 있는 것에 대하여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들이 따뜻한 봄날에, 아이들이 공원에서 뛰놀고 있을 때, 바깥에 나가는 것이 기분좋을 때에 찾아온다면 우리는 자신들을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그 때에 우리는 그저 사치스러운 꿈을 꾸고 있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따뜻한 햇빛과 휴식이고 생각하고 독서할 수 있는 시간이며,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우리에게 압력을 가하는 사람으로부터의 자유인 것이다. 아니다, 이 가난이라는 문제는 간단하지가 않다.

 

<빵과 물고기>는 미국 메리놀선교회 출판사인 올비스사에서 1997년에 발간된 Dorothy Day의 <Loaves and Fishes>(빵과 물고기)를 '참사람되어'에서 2000년 3월호에 번역한 것입니다. 도로시 데이가 이 책을 쓴 것은 1963년으로, 가톨릭일꾼공동체 운동이 시작된 지 30년만에 운동의 시작과 일꾼들의 삶을 간결하고도 따뜻하게 회상하고 있으며 운동의 입장과 신앙과의 통합을 선명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