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세월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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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세월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 최태선
  • 승인 2022.09.13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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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사람들이 원하는 삶은 즐기면서 사는 행복한 삶이다. 사실 즐긴다는 것도 행복하다는 것도 말처럼 간단한 것이 아니다. 실컷 즐기고 나서 후유증으로 오래 고생하거나 실컷 즐긴 것 때문에 인생에 탈이 나기도 한다. 행복은 더 모호하다. 행복이란 동화 파랑새 이야기와 같다. 파랑새의 저자 ‘마테르링크’가 말하고 싶은 것은, 사람들은 행복을 찾아 이리 저리 헤매지만,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옆’에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항상 함께 있는 그 행복의 파랑새가 파랗다는 것을 못 느끼며 살아갈 뿐이다.

결국 인생을 산다는 것은 간단하면서도 쉽지는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세계관이며 선택이다. 세계관에 따라 세상이 달라 보인다. 당연히 즐거운 것도 행복도 세계관에 따라 달라진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몇 년 전 우리는 교회 때문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가족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말레이시아의 코타키나발루였다. 우리는 ‘샹그릴라’라는 값비싼 리조트에서 귀족 같은 바캉스를 즐겼다. 말 그대로 샹그릴라(이상향)였다. 하지만 그곳에 머무는 동안에도 말레이시아의 시장에서도 나는 마음 한 구석이 항상 불편했다. 그것이 내가 사는 세계관에 따르면 사치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에도 나는 보진 못했지만 방청소를 해주는 사람들이 눈에 밟혔고, 그들이 남겨놓은 손길이 고마웠다. 샹그릴라에서도 재벌인 화교 소유주에게 고용되어 허드렛일을 하는 종업원들이 애처로웠다. 그들이 제대로 된 임금이나 받고 있는지 궁금했고, 그들이 친절할 때마다 애처럽게 느껴졌고, 그것이 나는 언제나 불편했다. 종으로서의 내 정체성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그래서 소중한 가족여행을 마침내 다녀왔으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돈이 아깝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런 내가 카리욧 유다를 닮은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수전노의 스크루지를 닮았는지도 모른다. 그런 면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그런 이유는 내가 하느님 나라의 세계관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장에서 어린애를 끌어 앉고 구걸을 하는 어머니에게 주었던 그 나라에서 가장 큰 돈이 내겐 가장 의미가 있었다. 더 주지 못했던 것이 아쉬웠고, 바닷가 그늘에서 바퀴벌레처럼 모여 자고 있던 아이들을 깨워 아침식사와 간식을 사주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실제로는 하지도 못하면서 이런 생각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생각들로 나를 제외한 우리 가족들의 버킷리스트였던 가족여행을 온전히 즐기지 못했고, 온전히 행복하지도 못했다.

나는 그런 내게서 세상 속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의 숙명을 발견한다.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삶이란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다. 살아있는 매 순간 긴장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하지 않으면 후회가 남는 삶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이처럼 어렵다. 다르게 산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내가 얼마나 사람들에게 불편한 존재인가를 날마다 글을 쓸 때마다 느낄 수밖에 없다. 정말 미안하다. 내 글을 읽고 얼마나 불편할까. 그것도 신실한 사람일수록 그 불편함은 더 할 것이다. 오죽하면 사람들이 늘 내게 찔린다는 말을 할까. 그래서 한동안 내 글을 읽다 떠나는 분들도 많다. 이해한다. 내 말대로 실천하는 삶은 불가능하다. 또 다른 누구도 나처럼 가난을 찬미하지 않는다. 맞다. 가난해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 분들에게 가난해져야 한다는 내 말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신실하기 때문에 괴로운 그분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다.

내 아내나 내 자식들에게도 그것을 강요할 수는 없다. 뭐라 말할 수도 없다. 다만 내가 열심히 복음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을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 그걸 보고 아내나 딸들이 따라 하기도 쉽지 않다. 아내는 가끔씩 당신은 신부나 수사가 되었으면 잘 할 사람이었다는 말을 한다. 신부님들이나 수사님들이 들으면 화가 날 내용이다.

하지만 아내가 말하는 것의 의미는 간단하다. 자신은 나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살래도 살 수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다른 분들은 어떨까. 나와 40년을 넘게 산 아내가 그럴진대 다른 분들이야 말해 무엇할까. 그런 아내에게 미안하다. 가장으로서 다른 사람들처럼 고고하게 살 수 있었던 사람을 백화점에 나가 일하는 종업원이 되게 한 책임을 안 느낄 수 없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내게 딸들 등쳐먹고 아내 고생시키는 짓을 고만하라고 이야기했다. 정말 실증적인 지적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정말 그렇다.

그러나 그런 내가 가족들에게 짐만 되는 것은 아니다. 아내도 딸들도 결정적일 때는 나를 믿는다. 인정하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내 삶을 존중하고 본받으려 한다. 지난 번 가족여행을 갔을 때 길에 삼천 원짜리 짜장면을 파는 곳이 있었다. 큰애가 그곳에 차를 댔다. 우리는 삼천 원짜리 짜장면을 먹었다. 그런데 그곳은 정말 지저분했다. 음식의 맛과 상관없이 식당 전체에서 화장실 냄새 같은 것이 진동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가족들에게 미안하다. 정말 많이 미안하다. 그래도 그렇게 우리 가족은 드러내놓지는 않아도 내 삶을 존중해준다. 정말 많이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 67번째 생일날에는 작은 아이가 내 사진이 들어가 있는 작은 배너를 생일축하 소품으로 만들어왔다. 그곳의 글귀가 나는 정말 고마웠다.

“아빠의 세월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그렇다. 아이들은 나를 보고 있다. 안 배우는 척 하지만 보고 배운다. 그런 아이들이 나보다 더 좋은 신앙인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언제나 내 마음 한편에 있다. 사실 내 삶은 아이들이 보는 것보다 신실하지 않다. 아이들이 내 속마음을 볼 수 있다면 아이들은 이내 실망할 것이다. 그래도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내 허물들을 아이들은 들춰내지 않는다. 내가 자신들을 등쳐먹고 있다는 생각도 안 하고, 돈이 없어 권력도 없는 나를 어느 정도 존중해주기도 한다. 사실 이것이 하느님 나라 권력의 실체이다. 그래서 나는 말없이 섬기고 또 섬긴다. 그것은 작은 희생이기도 하다. 가끔은 아비로서 섭섭할 때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무력감에 속이 상할 때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에서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권위라는 사실을 나는 안다.

이 권위가 바로 하느님 나라 공동체의 밑바탕이다. 그것은 오직 희생할 수 있는 권위이며 인내하고 또 인내해야 하는 권위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 지도자가 되려면 바로 이 권위를 배워야 하고 이 권위가 일상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일은 어렵다. 그래서 사람들이 힘과 영향력이 주는 즉각적이고 강력한 권력에 함몰되는 것이다. 특히 돈이 가진 유사전능성으로 해결되는 것에서 하느님을 향한 시선을 놓치게 되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다.

나는 늘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어려운 것은 커지는 것이 아니라 작아지는 것이라는 말을 한다. 작아져야 이런 권위를 배울 수 있고 희생을 통해서 드러나고 생성되는 하느님 나라의 권위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주기적으로 나를 비참하게 만드신다. 나는 머리가 돌아버릴 것처럼 화가 나지만 지나고 나면 그것이 은총의 시간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곤 한다. 그래서 나는 인내의 발효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기껏 환난을 자랑하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나는 깨지고, 깨질수록 나는 조금씩 작아진다. 우리의 자아는 한 번에 무너지거나 깨지지 않는다. 아주 조금씩, 조금씩 부스러기가 떨어져나가 정말 조금씩만 작아질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노년이 된 내 삶이 정말 소중하다. 내가 늙지 않았다면 나는 더 단단하게 깨지지 않는 덩어리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제 내가 원하는 것은 그렇게 깨진 내 마음에 성령이 스며드는 것이다. 내게 어떤 큰 힘이 주어져도 더 이상 그것을 나를 위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데 사용하지 않고 오직 섬김과 희생의 도구로 삼을 수 있는 성숙을 향해 오늘도 나는 나아간다. 그리스도 안에서 소멸되는 것이 내 마지막 남은 숙제이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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