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까짓 집 있어 뭐해요? 싹 쓸고 새로 지을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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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까짓 집 있어 뭐해요? 싹 쓸고 새로 지을 건데"
  • 장진희
  • 승인 2022.09.06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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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이 살려낸 것들 6 - 무주에서: 부동산 거래의 원형

하루는 근배 아저씨가 찾아오셨습니다. 동네 사람 한 분이 논을 팔려고 하는데 거간을 하러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자리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밭만 조금 있고 논이 없던 때입니다. 그런데 도시에서 온 사람이라고, 돈이 여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보통 마을 분들의 거래 값보다 더 비싸게 달라고 하십니다. 마음이 썩 좋지 않습니다. 야속하기까지 합니다.

"아저씨! 이렇게 땅을 지키고 살아 주시고, 덕분에 우리가 와서 이렇게 잘 살고 있으니 고마운 마음으로 치자면야, 더한 돈이라도 드리고 싶어요. 마을 분들 아니면 여기가 어디라고 우리가 와서 자리 잡고 살겠어요?"

아저씨는 잠자코 듣고만 계십니다.

"그래도 마음이 섭섭하네요. 아직도 우리는 동네 사람이 아닌가 봐요."
"......."
"그리고 아저씨! 평수가 커서 우리한테는 그만한 돈도 없지만, 우리가 그 돈 주고 논을 사봐요. 다음번에 누가 논 살 때 동네 사람들끼리도 더 받고 팔려고 할 거 아녜요? 논값 올라서 좋을 건 뭐 있어요?"
"...... 그건 그러네."
"아저씨도 자식들 도시에 나가 있지요? 지금 도시는 갈수록 살기 어려워지고 있어요. 때가 그래서 사람들이 도시로, 도시로만 나갔지만 이제는 도로 돌아올 거예요. 자식들 도시에서 살다 어려워지면 여기 고향에라도 돌아와서 농사 짓고 사는 게 낫잖아요? 도시에서 망하고 갈 데 없어 노숙자 되는 사람들 많다고 테레비에서 봤잖아요? 그 사람들이 돌아가서 살 고향이 있으면 왜 그렇게 살겠어요? 자식들 도로 살러 왔을 때 땅마지기라도 장만해서 자리잡고 살라고 하는데 땅값이 자꾸 비싸지면 어떻게 해요?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다고 땅값 많이 받으면 좋을 줄 알지만, 결국 땅값 오르면 농사 안 짓는 도시 사람 좋은 일만 시키지 여기 사는 사람들 좋을 일 하나도 없어요."

나도 모르게 일장연설을 하고 있습니다. 나이 많으신 어르신한테 주제넘게 아는 소리를 한다 싶어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기왕에 말이 나온 김에, 말이 되나 안 되나 마음속에 있던 말을 마저 해버리고 맙니다. 말 하면서도 근배 아저씨 눈치를 봅니다. 그런데 근배 아저씨 표정이 나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얼굴이 환해지시면서 웃고 계십니다. 마음이 놓입니다.

"그래, 잘 알았네. 내 가서 그렇게 말함세."

결국 그 논은 한참 있다 다른 마을 분이 사게 되었습니다. 땅값은 올려 받지 않고 예전 거래 가격 그대로입니다. 다행입니다.

그 일이 있고서부터 근배 아저씨가 나를 부르는 호칭이 달라졌습니다. 언제부턴가 대뜸 "장 여사!" 하고 부릅니다. 다른 마을 분들이 놀란 얼굴로 쳐다보아도 오히려 자랑스럽다는 듯이 일부러 크게 소리 내어 그렇게 부릅니다.

나는 압니다. 아저씨의 그 마음을. 논 거간 하러 오셨을 때 내가 한 말이 마음에 좋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나를 존중해주는 의미로, 당신이 할 수 있는 최대의 호칭이 그것이었던 것입니다. 나도 그런 아저씨가 좋아졌습니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그로부터 한 이삼년 지난 어느 해입니다. 이제 근배 아저씨도 나이가 많아지고 아주머니도 자꾸 몸이 아파서 당신들 젊어서부터 아글타글 모아 넓힌 전답이 힘에 부칩니다. 농사 짓는 사람들은 땅 묵히는 짓은 못 합니다. 내가 농사 못 지으면 누군가 지어서 땅을 놀리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근배 아저씨네 집은 마을 한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들 결혼해서 애들 낳아 기르고 전답 마련하고 살았던 오래된 외딴 집은 비어 있습니다. 그 빈 집은 우리 집하고 가장 가깝습니다. 빈 집이라고 해도 농사 지을 때 필요한 이런저런 것들이 아직 자리하고 있고 아주머니가 밭에 올 때 마당에 풀을 알뜰히 매주고 잘 건사해서 험하지 않습니다. 지붕이고 아궁이고 다 멀쩡합니다.

근배 아저씨가 우리 집에 오셔서 그 빈 집과 근처 전답을 내놓을 거라고 임자를 알아봐 달라고 하십니다. 시골로 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자주 들락날락 하는 터라 우리 집에 오는 사람들 중에 임자가 있을 거라 생각하신 겁니다. 그러나 그 뿐만은 아닙니다.

얼마 전에 도시에서 살다 이곳으로 오고 싶어 하는 사람이 그 집을 보고 욕심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근배 아저씨하고 얘기를 하다가 그만 아저씨가 속이 뒤집어져서 그 사람을 쫓아버렸다고 합니다. 지은 지 몇 십 년이 넘은 시골집은 대개 집값을 쳐주지 않고 대지 값만 치는데, 그 집은 욕심만 부리지 않으면 아직 사람이 살아도 백년은 족히 살겠습니다. 물론 아저씨가 그 집값을 내라고 했을 리는 없습니다. 다만 아직 사람이 살 만한 집이니 아깝다고는 하셨겠지요. 그런데 이 도시 여자 말씀이

"그까짓 집 있어 뭐해요? 싹 쓸고 새로 지을 건데요."

했다는 겁니다. 남의 집, 남의 땅이 되더라도 한동네 살면서 늘 오고가며 요리 보고 조리 보고 옛날 생각도 하고 할 집과 땅입니다. 그렇게 싸가지 없이 말하는 새 주인에게 집과 땅을 넘기면 당신 인생, 고상하게 말해서 추억이 싸그리 뭉개질 판이었던 것입니다.

근배 아저씨는 우리 집에 와서 그 도시 여자와 얘기되었던 돈의 팔 할 정도인 값에 내놓겠다고 하시며 활짝 웃습니다. 아저씨의 웃음, 그 마음을 알 것 같아 나도 활짝 웃었습니다. 그리고 돌아가는 아저씨의 뒷모습을 보며 크게 인사를 했습니다.

마침, 꿈도 야무지게 한옥 짓는 목수가 꿈인 아가씨 민이가 우리 집에 들락날락 하고 다닐 때입니다. 민이가 이 얘기를 듣고 옳다 됐다, 좋아라 합니다. 집과 200평 넘는 논 한 마지기와 400평 가량 밭 두 마지기이니 한 식구는 충분히 먹고살 만합니다. 도시의 전셋값 절반도 안 되는 돈입니다.

민이가 한동안 뛰어다니며 빚내고 어찌어찌 마련하고 해서 모은 돈이 부족합니다. 마침 우리도 논이 필요한 터라 그러면 논은 우리가 사기로 합니다. 그러고도 이 야무진 아가씨, 근배 아저씨를 어찌 구워삶았는지 일 할 정도를 더 깎아 계약을 했습니다.

나중에 근배 아저씨한테 들어보니, 민이가 결혼하기로 한 남자친구와 같이 다니는데, 그 남자친구가 길에서 만나면 인사를 그렇게 잘하더랍니다. 그래 그렇게 인사도 잘하고 싹싹한 사람들이 사정사정을 하니 그만 넘어가고 말았다는 겁니다. 덕분에 우리가 사는 논값은 좀더 비싸게 쳐진 셈입니다. 그래도 하는 수 없습니다. 괜찮은 이웃을 두는 값이지요. 누구 말대로, 이웃은 제1의 환경이니까요.

잔금을 치르는 날입니다. 민이네 돈과 우리 돈을 합해서 집과 전답을 넘기는 날입니다. 근배 아저씨 집에 다 모여서, 도시 복덕방에서 본 대로 쓴 계약서를 내놓고 영수증도 쓰고 도장도 찍고 합니다. 그러고 있는데,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근배 아저씨 집으로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아! 동네에 존 일 있담서?"
"젊은 사람들이 또 우리 동네 사람 된다고오?"
"아! 예!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고 있는데, 근배 아저씨가 큰소리로 호통을 치십니다.

"장 여사!"
"예!"
"아, 뭐하고 있어? 빨리 가서 돼지고기 몇 근하고 술하고 받어와야제에!"
"예?...... 아, 예! 얼릉 가서 받아올게요."

어느새 마당에는 근배 아저씨네 아주머니가 차려놓은 술상이 놓여 있고 고기 구울 불판과 장작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제서야 근배 아저씨의 뜻을 알아차리고, 그 중에서 유일하게 기동력 있는 '장 여사'가 고물 트럭에 딸딸이(경운기) 소리가 나도록 붕붕 내달아 면소재지에 갑니다. 막걸리, 댓병 소주, 음료수, 돼지고기 등등을 사가지고 와보니 근배 아저씨네 마당에는 온 동네 사람이 다 모여 있습니다.

"아, 얼마에 팔았다고?"
"아, 글씨, 지난번에 어떤 여자가 와서 돈을 더 준닥 해도 안 팔드니, 팔 할 정도 받고 팔았디야."
"아, 자네는 시방 언제 적 소리를 허고 있어? 아까 본께 칠 할 정도 되등만..."
"잉? 아이고, 저 양반 존 일 했네. 인자 젊은 사람들이 뭔 돈이 얼매나 있것는가? 잘했네. 잘했어."
"돈 좀 더 받자고 싸가지 없는 것들 이웃으로 들였다간 두고두고 입이 쓸 것인디... 잘했구만, 집하고 땅은 인연이 따로 있는 것이여. 집이 임자를 부른닥 안 하등가!"
"자네들도 인자 논 생겼담서? 조오컷다!"

땅을 팔고 나면 뒷말이 있게 마련입니다. 얼마에 팔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궁금한 점이 공개되지 않으면 이래저래 추측이 난무하다 부풀려지다 결국 없는 말도 도는 바람에 괜히 사람들 사이가 괴이해지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당사자들 앞에서는 못해도 뒤에 가서 욕심이 많다느니, 한몫 잡았다느니, 해도 너무했다느니, 바가지 썼다느니 말들이 많지요. 판 사람은 판 사람대로 싸게 판 것 같아 아쉽고, 산 사람은 산 사람대로 비싸게 산 것 같아 원망이 남는 것이 땅 거래입니다.

그런데 근배 아저씨는 그런 모든 의혹과 뒷말을 애초에 공개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마을 사람 모두가 합의를 해주는 거래...... 그만큼 아저씨는 하늘 아래 떳떳, 땅 위에 자랑스러웠던 것입니다. 또한 이 부동산 거래는 모든 사람이 모여 좋아하고 축하해주는 축제가 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오랜만에 젊은 사람들과 어울려 활짝 편 마음으로 늦도록 술을 마시고 노래도 부르고 놀았습니다.

근배 아저씨! 고맙습니다. 당신이 세상 한 귀퉁이를 환하게 해놓으셨습니다.

 

장진희
돈 안 벌고 안 쓰고 안 움직이고
땅에서 줏어먹고 살고 싶은 사람.
세상에 떠밀려 길 위에 나섰다.
장터로 마을회관으로.
무주에서 진도, 지금은 곡성 죽곡 보성강변 마을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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