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하는 손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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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하는 손이 아름답다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2.07.25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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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칼럼

"누구나 저마다의 현실이 있고 저마다 그 현실에서 최선을 다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만년필과 방진 마스크…. 이 둘은 모두 저의 현실입니다. 매 순간 부끄러운 사람이 되지 않으려는 저의 노력입니다. 저는 이렇게 또 다른 방식으로 저의 길에 미쳐 보겠습니다.”

대구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가르치기도 하는 친구가 페이스북에 남긴 글입니다. 그이는 자신을 ‘철학 노동자’라 불렀습니다. ‘토마스철학학교 겸 오캄연구소 소장’이라는 명함을 지녔지만, 철학은 밥벌이가 되지 못합니다. 돈을 벌지 못하면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으로 취급받습니다. 철학자도 먹어야 하고 생활비가 필요합니다. 스피노자가 그랬던 것처럼, 그이는 낮에는 철학을 하고 밤에는 건설 현장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일합니다. 야경주독(夜耕晝讀)인 셈입니다. 생각만 해도 고단한 일일 텐데, “이제 조금 덜 불안해하고 철학을 할 수도 있다. 어쨌든 나는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사진=유대칠
사진=유대칠

그이가 현장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주로 우즈베키스탄 노동자들입니다. 그이가 저술한 책 <신성한 모독자>(유대칠, 추수밭, 2018)에 등장하는 이븐시나(Abu Ali al-Hussain ibn Sina, 980-1037년)가 오늘날 우즈베키스탄 땅에 세워졌던 사만 토후국 사람입니다. 이븐시나는 탁월한 철학자이며 의학자였습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에 플라톤을 더한 철학으로 이슬람 신앙을 해석하였으며, 토마스 아퀴나스에게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고 전합니다. 그러니 이 친구가 우즈베키스탄 노동자들을 바라보는 눈빛은 남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낯선 이방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들도 종종 자신을 향한 차가운 눈빛을 압니다. 그리고 상당히 신경 쓰기도 합니다. 참 슬픈 일입니다. 자신들을 테러리스트처럼 보는 몇몇 시선도 알고 있습니다. 정말 슬픈 일입니다. 저는 그리스도교인이지만 전혀 거부감 없이 그들과 친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도 저는 저녁에 출근합니다. 지금은 철학 연구 중입니다.”

사실상 선물 같은 노동

정직하게 일해서 생계를 돕는 사람들은 거룩합니다. 어떤 이들은 현장에서 고된 노동을 하며 동료들과 연대합니다. 저 또한 비슷한 시기에 취업하게 되면서 출퇴근 인생을 다시 시작하는데, 어찌하다 보니 다시 책상물림이 된 것은 아닌지 걱정이 좀 됩니다. 친구는 여럿이 함께 일하는데 저는 장소만 바꾸어 다시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야간 관리 업무 때문에 돌아다니기도 하지만, 어차피 그 일도 혼자 해야 합니다. 고독이 체질인 사람에겐 제격이겠습니다. 다만 신자들을 상대로 강의하는 시간에는 그나마 상호작용을 할 수 있으니 다행이라 여깁니다.

문득 30대 중후반 전라도 무주로 귀농해서 농사짓던 시절이 떠오릅니다. 첫해 농사를 시작하면서 새벽마다 가슴이 콩닥거렸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밭작물이 한낮엔 더위를 먹어 늘어져 있어도 새벽이면 어김없이 잎사귀를 꼿꼿이 세웁니다. 그 팽팽한 생명력이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 뒤로 흙에 발을 묻고 일하거나 목수처럼 나무를 다루는 작업을 가장 귀하게 여깁니다. 

귀농해서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자신이 직접 생산한 작물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골라 타인에게 선물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입으로 먹고사는 것보다 손으로 먹고사는 게 더 아름답다고 여기기 때문에 좋습니다. 내가 일을 해서 생계를 책임질 수 있을 때 자존감은 높아집니다. 이게 생활의 첫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나머지는 뒤에 따라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본디 목수나 농부이셨을 것을 생각하면 참 마음이 든든해집니다.

 

감자를 먹는 사람들

이처럼 일하는 사람을 가장 거룩한 얼굴로 그렸던 이가 있습니다. 네덜란드 화가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년)입니다. 농민 화가 밀레를 존경했던 고흐는 자기 작품 가운데 ‘감자 먹는 사람들’(1885년)을 최고로 여겼다고 합니다. “나는 등잔불 아래에서 감자를 먹는 사람들이 그릇에 대고 있는 바로 그 손으로 땅을 판다는 점을 강조하려고 애썼다.”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농부들이 육체노동을 통해 얼마나 정직하게 먹을 것을 버는지 말하고 싶었다고 전합니다. 그는 주일에 깨끗하게 옷을 차려입고 교회에 가는 사람보다 먼지투성이 푸른색 스커트와 보디스를 입은 농부의 딸이 더 아름답다면서, “농부는 정장을 차려입고 교회에 갈 때보다 퍼스티안 천으로 된 옷을 입고 들판에 있는 것이 훨씬 실제적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그림에서 농부들은 어두운 벽에 걸린 수수한 십자가 아래서 감자를 먹고 있습니다. 온종일 일한 농부 가족이 희미한 등불 아래에서 피곤한 몸을 의자에 걸치고 흙이 잔뜩 묻은 손을 씻지도 못하고 둘러앉은 모습은 ‘성만찬’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의 가난한 제자들도 고단한 몸으로 다락방에 모여 성목요일에 최후의 만찬을 가졌을 것입니다. 

농부들의 성만찬 같은 어두운 식탁을 비추는 것은 천장에 매달린 희미한 등불입니다. <고흐의 하나님>(홍성사, 2010)이란 책에서 안재경은 “이 등불마저 꺼지면 이 농부들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을 것 같이 보인다.”고 적었습니다.

농부들의 거룩한 땅

실제로 고흐는 그리스도의 빛과 복음이 가장 절실한 사람들이 가난한 농부들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는 보리나주의 광산촌에서 석탄 검댕을 얼굴에 묻힌 광부들과 우편배달부와 매춘부들을 그릴 때도 하느님을 생각했답니다. 그들의 얼굴을 그리면서 ‘성인들의 초상’처럼 꽃으로 후광이 빛나게 하였습니다. 세상에 남길 것이라곤 ‘가난’과 보잘것없는 ‘이름’밖에 없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한 사람이 고흐였던 거지요. 정직한 노동으로 밥을 버는 사람들, 감자를 먹으면서도 ‘오늘 일용할 양식’에 감사드릴 줄 아는 사람들이 곧 ‘하느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베르성당’(1890년)이라는 그림처럼 늘 불이 꺼진 교회당을 떠올리는 고흐에게 거룩한 땅은 오히려 농부들이 땀으로 일구어 낸 황금 들판입니다. 그 들판 너머로 푸르게 펼쳐진 하늘입니다. 밤이면 온갖 생명을 돌보며 편안히 잠을 다독거리는 별빛입니다. 하루 몫의 노동으로 에너지를 소진하고 고단한 하루를 감사하며 잠드는 사람들, 그리고 새벽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부엌으로, 들판으로 나가는 이들을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하신 예수님처럼 노동을 통해 몸으로 하느님을 드러내는 사람들은 아름답습니다. 

 

* 이 글은 <경향잡지> 2022년 7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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