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사에서 우리를 돌아보다, ‘다름’이 더불어 사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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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에서 우리를 돌아보다, ‘다름’이 더불어 사는 곳
  • 유대칠
  • 승인 2022.07.18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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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칠 칼럼
그림=유대칠
그림=김화

‘나’와 다르다면 밀어내곤 한다. ‘나’만이 답이라 생각하면 참 편하다. 그러나 그런 아집(我執)의 삶이 결코 정답은 아니다. 정답이길 바라는 괴로움일 뿐이다.

‘회삼위일(會三歸一)’, 셋이 모여 하나로 돌아간다는 <법화경>(法華經)의 지혜다. 이 지혜를 읽고 경주를 찾았다.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와 같은 부처의 가르침을 직접 듣고 깨우친 ‘성문승(聲聞乘)’, 십이연기(十二緣起)를 스승 없이 홀로 깨우친 ‘연각승(緣覺乘)’,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보살승(菩薩乘)’, 흔히 ‘성문승’과 ‘연각승’을 ‘소승(小乘)’이라 하고, 보살승을 ‘대승(大乘)’이라 한다.

이들 삼승(三乘)은 저마다의 개성을 가진다. 분명 서로 다르다. <법화경>은 서로 다른 삼승을 두고, 하나의 가르침을 향한 세 방편이라 한다. 깨우치려는 사람의 성향과 삶의 조건에 따라 방편은 얼마든지 다양해질 수 있다. 그러니 삼승이 서로 다른 건 너무나 당연하다. 그리고 셋의 다름이 서로에게 ‘적(敵)’ 혹은 ‘남’이란 말을 뜻하진 않는다. 오히려 하나의 가르침을 향한 ‘도반(道伴)’이다. 결국 삼승은 ‘일승(一乘)’인 거다.

‘나’와 다르다는 말은 ‘나’에게 없는 것을 구할 수 있단 말이다. ‘다름’을 통해 어쩌면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벗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막상 현실 속에선 ‘다름’이란 이유로 서로 멀리하기도 하고 다투기도 한다. 나만의 것이 ‘정답’이며 나와 다른 모든 걸 ‘오답’이라 한다. 나만이 정답이라는 그 외로운 ‘아집’과 독한 ‘오만(傲慢)’ 속에서 종교는 사랑을 말하면서 서로 저주하고 때론 죽이기도 한다. 누군가는 ‘경전’뿐이라 하고, 누군가는 ‘종교 예식’과 ‘위계’ 그리고 ‘전통’이란 틀 속에 구속되어, 서로를 밀어낸다. ‘더불어’ 있지 못했다. 누구의 생각이 더 답인가를 두고 싸우고 죽였다. 참 아픈 현실이다. 셋이 모여 하나로 돌아간다는 <법화경>(法華經)의 지혜가 참 귀하게 들린다.

이런 <법화경>의 지혜가 현재불인 석가불(釋迦佛)에 의해 설해지자 땅 밑에서 다보탑(多寶塔)이 솟아올랐다. 탑 가운데 과거불인 다보불(多寶佛)이 나타나 석가불이 전하는 그 귀한 지혜가 조금의 어긋남도 없음을 증명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 반을 내어주어 석가불과 나란히 앉았다. ‘이불병좌(二佛幷坐)’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불국사 대웅전 앞 다보탑과 석가탑은 이런 <법화경>의 이야기를 공간 속에서 구현해 낸 것이다. 불국(佛國), 즉 부처의 나라는 ‘다름’으로 서로 다투는 곳이 아니다. 그곳에서 나와 다른 이는 나의 적이 아닌 귀한 ‘도반’이다. 나와 다르지만 한 곳을 향하여 더불어 나아가는 귀한 벗이다. 원효의 일심(一心)에 관한 성찰 역시 이와 다르지 않을 거다.

대웅전 앞 다보탑과 석가탑을 지나 이젠 대웅전 안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을 마주한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지 <아미타경>(阿彌陀經)을 통해 들을 수 있다. 나에겐 특히 ‘공명조(共命鳥)’에 관한 이야기가 깊이 남았다. 몸은 하나인데 머리가 둘인 전설의 새, 서로 자기만 선(善)이며 다른 머리는 악(惡)이라 싸우다 그만 ‘둘’이 ‘하나’의 몸으로 있단 걸 잊어버렸다. 악을 죽인다는 이유로 독을 먹이지만, 결국 ‘하나’의 몸이기에 모두 죽었다. 공명조의 전설에서 우리의 지금을 마주하게 된다. ‘다름’을 두고 서로 저주하고 조롱하는 우리는 결국 공명조일지 모른다. 결국 그 독한 ‘증오’와 ‘혐오’로 서로에게 먹인 독으로 죽게 되는 건 우리 모두일지 모른다. 아니, 그럴 거다. 분명히.

불국사 대웅전에서 나는 ‘우리’를 돌아본다. 부처의 나라는 서로 다름으로 다투는 그런 나라가 아니다. 서로 다르지만, 오히려 서로 다르기에 서로에게 소중한 도반이 되어 더불어 우리 되어 나아가는 곳이다. 부처의 나라는 공명조의 두 머리가 서로 다투는 곳이 아니라, 두 머리의 두 소리로 더 아름다운 화음을 내어 더 노래하는 그런 곳이다.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 불국사 대웅전 앞 다보탑과 석가탑이 우리에게 전하는 지혜, 대웅전의 아미타불이 우리에게 전하는 지혜, 그 지혜는 아직도 우리에겐 멀고 먼 이야기는 아닐까?

여전히 ‘다름’으로 아파하는 이들이 많은 곳이다. 공명조의 화음 대신 다툼이 있는 곳이다. 석가불과 다보불의 가르침이 여전히 현실이 되지 않은 곳이다. 여전히 아집의 괴로움으로 아파하는 곳이다. 슬픈 곳이다. ‘나’뿐인 곳이다. 참 외로운 괴로움의 공간이다.

경부 불국사 대웅전 앞에서 공명조의 아름다운 화음을 그려본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한다.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고전 세미나와 연구,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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