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어때, 송경동처럼 꿈이나 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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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어때, 송경동처럼 꿈이나 꾸지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2.07.11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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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송경동, 창비, 2022

그때는 참 오종종하게 살면서 여러 사람을 만났다. 아내는 미싱사로 봉제공장에 다녔고, 나는 가톨릭노동사목전국협의회 활동가로 일하면서 반지하 셋방에서 다복하게 살았다. 인천 동암역 앞에서 살다가, 부천 여월동에서 살다가 얼마 뒤엔 운 좋게 13평짜리 부평 갈산동 영구임대아파트에서 호사를 누렸다. 그 시절 이래저래 더불어 몰려다니던 사람들이 노동사목과 인천노동자문학회 사람들이다. 예전에 주안노동사목 골목집에서 일하던 창선이형과 창호형, 대금을 잘 불었던 창호 형은 지금 스님이 되어 잠적한 채 수행 중이다.

아내의 미싱 선생이던 김해자는 시인이 되어 시골에 들어갔다. 홍명진은 대단한 소설가가 되었고, 가구 만들던 영철이형은 문학을 접고 성당 일에 열심이다. 남인이형은 저 멀리 진도에서 투병하며 시를 토하고, 면벽수행에 가속페달을 밟고 있는 듯하다. 이들에게 시와 노동은 생존을 가능케 하던 밥이었고 음료였다. 나중에 박영근 시인도 만나고, 구로노동자문학회 하던 송경동은 <삶이 보이는 창>에서 시를 찾아 읽다가, 나중에야 <꿀잠>(삶이 보이는 창, 2006)이나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창비, 2009)이란 시집까지 읽을 수 있었다. 얼마 전에 송경동 시인에게서 주소를 묻는 전화가 왔고, 뒤이어 <꿈꾸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창비, 2022)가 문간으로 배달되었다.

 

사진출처=민중의 소리
사진출처=민중의 소리

현장에 가야 그를 만난다

송경동을 몸으로 만난 것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장 할 때였다. 1~2명 기자를 두고 하는 일이라 편집장이지만 나도 취재현장에서 쏘다니며 살았던 시절이다. 그를 직접 몸으로 만난 것은 2008년 가을 기륭전자 농성장에서였다. 그해 9월 27일 오후5시 ‘촛불바람에 응답하는 제14차 시국미사’가 김정대 신부(예수회)와 하유설 신부(메리놀회) 공동집전으로 서울 금천구 가산동 기륭전자 앞에서 봉헌되었다. 기륭전자는 노동위원회의 부당해고 판정에도 복직이 이루어지지 않은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이 1,130여일 동안 농성투쟁을 했고, 이때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장이던 김소연은 복직을 요구하며 90여일 넘게 단식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피골이 상접한 김소연에 앞서 함께 투쟁하던 권명희 조합원의 영결식이 있었던 날이었다.

이날 치러진 노동자장 영결식에서 송경동은 조사를 통해 “우리들의 삶은 다르지 않다”고 그야말로 악을 썼다. 그리고 “우리는 떠난 적도 헤어진 적도 없다”고 하였다. 이날 송경동이 해머를 집어들고 완강히 닫혀 있는 기륭전자의 푸른빛 철문을 내리칠 때, 가슴이 뻐근하게 생동하는 걸 느낀 경험이 있다. 가장 용감한 예언자의 영이 그에게 내렸다고 생각했다. 송경동은 기륭전자에서, 그리고 2009년 발생한 용산참사로 이어지는 현장에서 늘 볼 수 있는 얼굴이었다. 세상의 가장 밑바닥마다 그의 자리가 있었다. 많은 이들이 그 자리를 지나쳐 갔지만 송경동은 그 자리를 떠난 적 없다.

그 놈의 바닥은 사라질 줄 몰랐다. 이명박과 박근혜 때나 문재인 때나 다를 바 없었다. 대한민국 진보진영의 모든 개혁은 윗물만 갈아 넣을 뿐, 바닥은 여전히 흙탕물이었다. 그래서 “나도/여느 시인들처럼/꽃을, 사랑을 노래하고 싶다”던 송경동은 2021년 3월 6일자 <한겨레>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니, 한국 사회가 민주화됐다고요? 비정규직이 1,100만 명인 사회인데요? 이들은 미래 자체가 없고 2년에 한 번씩 잘리는 인생들이어서 피눈물 속에서 살아가고 있어요. 과거보다 더 야만적이고 더 폭압적인 사회가 된 거예요. 비인간적이고 반사회적인 이런 폭압 구조에 맞서 저항하려면 과거 화염병 들고 싸우던 것보다 더 강력하고 더 급진적으로 싸워도 부족한 세상인 거죠. 그런데 이미 기득권이 된 이 사람들은 우리 사회의 절대다수가 그런 비참한 상황에 있더라도 그건 신자유주의 세계 질서에서 어쩔 수 없는 일, 그러니 그건 니들 개돼지들이 감내하며 살아야 하고 그만큼도 감지덕지해야 하는 일이라고 보는 거잖아요. 그러면서 저항이나 투쟁을 하더라도 합리적이고 예의 바르게, 기성의 기득권 구조가 용납할 수 있는 정도로 공손하게 하라는 거죠. 본인들이 기득권의 입장에서 투쟁과 저항에 대한 관념을 그렇게 갖고 있다는 것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하는 이야기죠.”

 

사진출처=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사진출처=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나만 외로웠던 건 아니었다

송경동은 굳이 나를 보면 “선배님!”이라 불렀고, 나는 그 소리를 “동무!”로 들었다. 한 길에서 만나는 동행으로 나를 초대하는 소리로 들었다. 송경동은 1967년 전남 보성군 벌교읍 장터에서 3남1녀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도박으로 집은 편안한 날이 별로 없었고, 이를 두고 송경동은 “습지고 어두웠다”고 했다. 이 불안한 사춘기에 ‘봄비’라는 시를 써서 중학교 국어교사에게 칭찬을 받은 게 유일한 위로였다. 사고를 쳐서 꼬박 2년을 소년원에서 보내고, 1987년 출소하여 서울로 올라가 술집 삐끼 생활을 하면서, 파친코 주변을 서성거렸다. 여전히 “습지고 어두운” 시절이었다. 돈을 벌어보자고 여천 석유화학단지, 광양제철소, 서산 석유화학단지 등 건설 현장에서 플랜트 배관공, 용접공으로 일했다.

먹고살자고 ‘노동’하다가 ‘시’를 만난 것은 구로공단에서 일할 때였다. 구로노동자문학회에서 ‘시 쓰는 노동자들’을 만난 것은 천운이었다. 결국 1998년 진보생활문예지 <삶이 보이는 창>을 다른 몇몇 작가들과 만들어 7년 가까이 상근했다. 문예지의 이름처럼, 중요한 건 언제나 삶이고, 그걸 시인의 눈으로 다시 보자는 거다. 빵에서 장미를 건져 올리는 작업이겠다. <꿈꾸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에 실린 ‘삶이라는 도서관’이라는 시처럼 송경동은 치열한 현장에서 ‘사람’을 만나 외롭지 않았다.

다소곳한 문장 하나 되어
천천히 걸어나오는 저물녘 도서관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게 말하는 거구나
서가에 꽂힌 책들처럼 얌전히 닫힌 입
애써 밑줄도 쳐보지만대출 받은 책처럼 정해진 기한까지성실히 읽고 깨끗이 반납한 뒤
조용히 돌아서는 일이 삶과 다름없음을
나만 외로웠던 건 아니었다는 위안
혼자 걸어 들어갔었는데
나올 땐 왠지 혼자인 것 같지 않은
도서관
나는 철들 생각이 없다

하지만 송경동이 현장에서 만난 세상은 ‘감옥’이었다. “감옥이 따로 없어”라고 탄식하는 송경동은 그곳에서 진짜 ‘양심수’를 만났다. 송경동에게 “법정최저임금 정도나 받는 강제 노역에 시달린 후/저물 무렵 반지하나 옥탑방으로 자진해 입방하는/당신이 양심수”였고, “평생을 일해도/가질 수 없는 집 한 칸 묵은 세간 꾸려/다시 낯선 주소지로 이감가는/당신이 양심수”였고, “요양병원에라도 보내지면 다행/보호관찰도 없는 단칸방에서/누렇게 뜬 채 고독사하는/당신이 양심수”였고 “그래서 더 위험한 회유의 대상이어서/가끔은 기초수급자니 최임노동자니니 청년수당이니 기본소득이니/알량한 당근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당신이 진짜 양심수”였다.

송경동은 이 양심수들과 자신의 처지를 동일시한다. ‘오늘 난 편지를 써야겠어’에서 온몸으로 세상을 위해 헌신했던 동지들이 비루한 현실 앞에서 참담하게 무너져 마석 모란공원에 안치된 이야기를 전하면서 “나는 지금껏 비겁하게 살아남았고/오늘도 여전히 비루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썼다. 그리고 “언제라도 힘들고 지쳤을 땐/내게 전화를 하라고/전화카드 한 장을 건네 줄 동지가 남아 있을까” 묻는다. 그리고 남은 후회 한 자락은? “나의 농성은 세상의 불의를 씻어내는 것보다/내 마음 속 오랜 무지와 허물을 닦는/고된 일이었어야 했다”고 고백한다.

한 번도 고난의 현장을 떠나지 않았던, 그렇게 떠날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를 지닌 송경동이었다.

항상 최대한 집결에굳건한 단결이어야 했던 삶
책에서 배웠던 결정적인 순간은 오지 않고
끝없이 이어지는 투쟁에 마모되어 가던 날들
자결한 수많은 이들의 영결식장에서
결연한 표정으로 추모시를 읽는 게
일상이기도 했지
매 순간 어떤 일인가를 결의하고
매번 또다른 결심과 결단 앞에 서야 했지

(‘결’자해지)

자신을 ‘얼치기 무결점 순결주의자’로 규정하는 송경동은 문득 누구나 다 자신만의 고유한 “결”이 있음을 발견한다. 결단코 누구나 해야 할 일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은 자신의 “무늬”를 따라 살아야 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래서 ‘결의’나 ‘결사’나 ‘결단’이나 ‘결전’ 같은 꽉 채워진 말들보다 ‘결여’나 ‘결함’이나 ‘결점’이나 ‘결핍’ 같은 겸손한 말들이 소중하게 다가온다. “큰 의미 없이도 우리 모두를 살리는/‘물결’이나 ‘바람결’이나/조용한 ‘숨결’ 같은 조금은 다른 삶의 결로도” 살아보고 싶다고 소망한다. 이를 두고 “해질 녘 우연한 그리움”이라 했다.

이 말이 전사의 말이라서 애틋하다. 늘 위태로운 거리에 몸을 맡겨온 시인의 언어라서 가슴에 와서 닿는다. 역시 송경동은 시인이었다.

그 많은 순간에 오른 손을 치켜들고 목울대를 돋으며 ‘처절하게’ 추모시를 낭송하는 동안, 그는 먼저 죽은 자들의 육신으로 침몰하였고, 이미 죽은 자들의 영혼처럼 되살아난다. 죽고 살기를 거듭하기란 시인이 아니라면 불가할 것이다. 시인의 마음이 지니지 않고서는 가당치 않을 것이다. 시인은 꿈꾸는 자이어서 죽은 듯 살아 있고, 살아서 죽음을 경험한다. 그래서일까. 송경동은 이제 와서 새삼 철들 생각이 없다.

이제 와 무슨 권력이나 부나 명성 얻을 것도 없고
뒤늦게 철든 이들 따라 무슨 욕심 차리는 것도 추해
나는 계속 꿈꾸는 소리나 하다
저 거리에서 자빠지겠네

(꿈꾸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 이 글은 <공동선> 2022년 7월호에 실렸습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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