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이 필요한 사람 앞에서 부끄러운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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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이 필요한 사람 앞에서 부끄러운 집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2.05.03 10: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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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변방에서 마주친 풍경]

가늠할 수 없는 자유가 그녀를 휩싸고 있었습니다. 사는데 필요한 최소한 공간을 얻는 대신에 읽고 쓰고 생각하고 먹고 마시고 잘 수 있는 공간만 자신에게 허락했다는 뜻에서 그녀가 지근거리에서 만나고 있는 홈리스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의 거실과 서재와 주방, 아늑하고 분위기 있는 환경이 내 자유로운 영혼을 옭아맬 수 없다는 결의처럼 보였습니다. 모든 가부장과 모든 허위에 엿을 먹이고 싶어했고, 그래서 얻은 자유는 용기가 되어 서울역 인근의 가장 가난한 마을에 깃들고 있었던 셈입니다.

최현숙 아기 안나, 그녀는 예전에 천주교 장기수후원회 일을 했고, 진보정당에서 활동하다가, 그마저 접고 홈리스 곁으로 갔습니다. 그 사람들의 이력을 탐문하고, 그 사람들의 삶을 ‘그들만의’ 역사책에 남기고 있습니다. 그이의 마음에 닿는 것은 경계 바깥으로 떠밀려난 인생들입니다. 노인들과 홈리스, 생산성을 기대할 수 없는, 그래서 없어지면 상큼하고 있어도 그림자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의 곁에서 구술생애사를 적고 있는 선배입니다. 그녀의 자유가 부담스럽지만, 그녀의 발음에서 ‘내가 닿지 못하는’ 해방감을 느낍니다.

사진출처=한겨레21
사진출처=한겨레21

생애를 견디다 외롭게 죽다

명동의 밥집처럼 홈리스들에게 밥을 주는 교회는 있지만, 그들 곁에서 일상을 호흡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홈리스행동과 함께 그녀가 참여한 구술생애사가 <힐튼호텔 옆 쪽방촌 이야기>(후마니타스, 2021)라는 책으로 나왔습니다. “서울역 맞은 편, 남대문 경찰서 옆으로 난 언덕길을 오르면 낮고 낡은 건물들이 보인다. 세월은 몇 십 년은 되돌린 듯 보이는 풍경, ‘양동’(陽洞)이다. 볕이 잘 드는 동네라서 붙여진 이름이라지만, 지금은 빌딩숲에 가려 볕이 머무는 건 찰나다.”라고 하는 쪽방촌 이야기입니다. 서울중심가에 있는 변방이라고 해야 하나. 이곳에 사는 사람 이야기 하나 먼저 전합니다.

이 사람은 1945년 안동에서 태어나 가난과 배고픔을 피해 여덟 살에 서울로 왔고, 몇 차례 철거와 강제이주를 거치면서 지난 67년 동안 양동의 쪽방촌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이가 사는 쪽방엔 주방이 없고, 치아가 없는 그이는 방에다 전기밥솥 하나 놓고, 얻어온 밥이나 도시락을 부어 죽을 만들어 먹거나 라면을 끓여 먹습니다. 이따금 가톨릭사랑평화의 집에서 도시락을 받아서 같은 층 열한 가구랑 지하에 사는 네 가구에 나눠주기도 합니다. 매월 20일이면 꼬박꼬박 관청에서 수급비 77만5000원과, 어르신 공로수당으로 10만 원이 더 나옵니다. 그리고 박스를 수거해 용돈을 법니다. 새벽 5시에 서울역 지하도 노숙인들이 깔고 잤던 박스를 거두어 고물상에 넘깁니다. 지출은 방값이 25만원, 담뱃값이 4100원짜리 하루 두 갑씩 해서 한 달이면 24만 원이 좀 넘습니다. 누울 방이 있으면 족하고, 담배는 그이가 누리는 유일한 호사입니다.

그렇게 살기는 살아도, 쪽방촌 사람들은 생애를 견디다 외롭게 죽습니다. 사망자의 대부분이 50대이고, 대부분이 ‘무연고 사망자’여서 서울시 공영장례를 거쳐 이승을 떠납니다. 2021년 10월 15일, 파주 ‘무연고 추모의 집’에서 열린 ‘무연고 사망자 합동추모위령제’에서 장례위원이었던 장영철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도 어렵게 사니 가족이 있어도 오지 않고 그냥 무연고자로 돌아가시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가족들이 와서 시신을 인수하면 장례 치를 비용이 발생하니 더더욱 안 오는 것 같습니다. 그게 참 안타깝습니다. 가난이 연고를 끊는다는 걸 주민들 장례를 보면서 알게 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돌아가신 분들에게 정성으로 술 한 잔 올려 드리고 마지막 가시는 길을 안내해 드리는 것뿐입니다.”

최현숙 선배는 이 사람들의 내력을 이렇게 전합니다.

“쪽방 사람들은 대부분 출생부터 빈곤했다. 가족 말고는 어떤 발판도 없는 사회에서 어쩌다 보니 ‘없는 집’에 태어났다. 가정폭력과 못 배움,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일찌감치 가족에서 떨어져 나왔다. 엄마를 찾아 쓰레빠만 신고 일주일을 걸어 서울에 왔다. 아동보호소를 전전하다 넝마주이가 됐고, 머슴살이도 하고, 신발공장도 다니고 도금공장도 다녔다. 원양어선도 탔고, 중동의 건설현장에서 노가다도 뛰었다. 싸고 힘든 밥벌이를 찾아 정처 없이 떠돌며 일하느라 몸과 마음이 차차 망가졌다. 노가다를 하며 도로와 빌딩, 댐과 발전소를 지었고, 농장과 새우잡이 배, 염전에서 일하며 우리네 먹거리를 만들었다. 그러다가 몸이 망가져 리어카나 끌며 재활용품을 모으다가 비싼 승용차를 긁는 바람에 그 수리비로 그간 모아 둔 돈을 다 써버리기도 했다. 내내 가족을 꾸리지 못하거나 꾸렸던 가족도 해체되거나 단절됐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집이 민망해지는 저녁

동정 없는 세상은 이들을 가혹하게 밀어붙이곤 했습니다. 세상은 윤리와 상식, 인간성까지 들먹이며 홈리스나 쪽방촌 사람들을 비난하고, 혐오합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산 사람은 살아야 합니다. 양동 쪽방촌과 서울역 노숙인 광장에서는 경계가 없습니다. 지금 방이 있는 사람이 내일은 방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쪽방촌 사람들과 홈리스의 거리는 어찌 보면 깻잎 한 장 차이입니다. 요즘 같은 코로나 시국에는 무료도시락을 얻으러 어디든 가서 줄을 섭니다. 이미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을 바라보며 최현숙은 “온갖 풍파를 아무런 보호막 없이 견뎌 내며 휘청거리다 헛딛을 때마다 붙잡을 줄도 밟고 일어설 발판도 없이 추락했고, 그즈음에서 누구는 먼저 가거나 죽음을 선택했지만, 산 사람은 아직 버티면서 자괴와 분노를 쌓아 간다.”고 합니다.

그나마 이 사람들이 용케 잡은 줄은 수급자가 되는 것입니다. 허나, 수급자가 되려면 자신의 빈곤과 가족 해체를 증빙해야 합니다. 이런 모멸감을 거쳐야 국가로부터 극빈층, 근로능력 없음 판정을 받아 기초생활수급자가 될 수 있습니다. 63세에 난생처음 방 한 칸을 얻은 어느 쪽방촌 주민은 “나 혼자 그냥 딱 요만큼이면 된다.”고 말합니다. 그이는 형제들에게 폐 끼칠까 싶어 연락을 끊고 삽니다. 그이에게 “남은 생에 대한 상상력과 욕망도 1.5평 방 한 칸과 쪽방촌 언저리에 머물러 있다.”고 최현숙은 말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추락한 삶이었든 살다가 실족했든, 경제적으로 추락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가 양동 쪽방촌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부동산에 관심을 갖는 게 이상할 것은 없지만, 그들이 ‘집’을 들먹일 때, 양동 사람들은 ‘방’을 갖고 싶어 합니다. 쪽‘방’마저 들어올 수 없는 홈리스들은 서울역 지하도에 종이박스로 방을 짓고 잠을 청합니다. 판지로 바닥을 깔고 벽을 세우고, 신발로 벗어서 가지런히 놓아두고, 꼭 자기 몸만한 종이지붕을 얹고 눕습니다. 딱 한 몸 누일 방이 필요한 사람들을 생각하며 나의 ‘집’이 민망해지는 저녁입니다. 지금 방이 없는 사람들에게, 서울역 광장이 이미 낯설지 않은 사람들에게, 다행히 봄이 오고 있으니 그나마 마음이 놓입니다. 도로시 데이는 “누구나 그리스도에게 내어 줄 여분의 방을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가난한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 하셨던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낯선 이들에게 방 한 칸 나눌 마음을 가지라는 요청일 텐데, 내 집이 내 신앙을 부끄럽게 합니다.

 

* 이 글은 경향잡지 2022년 4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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