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통 앞에선 연민조차 뻔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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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 앞에선 연민조차 뻔뻔하다
  • 이원영
  • 승인 2022.05.03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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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 수전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이후 2004 을 읽고

2022년 2월 24일 우크라이나로 미사일이 발사되었다.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은 "우크라이나의 비무장, 돈바스 지역 내 러시아인 보호,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 조약 기구·유럽 연합 가입 저지 및 중립 유지"를 목표로 하는 군사 작전을 선언한 결과다. 그리고 지금까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전쟁 중이다. 전쟁의 소식을 담은 사진은 충격적이다. 하지만 충격의 여파는 급격하게 가라앉았다. 고통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진부해진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타인의 고통을 쓴 수전 손택은 이렇게 질문한다.

“시청자들은 잔인하게 묘사된 폭력에 익숙해지는 걸까요, 아니면 뭔가 다른 반응을 보이게 되는 걸까요? 매일같이 쏟아지는 이런 이미지 때문에 시청자들의 현실 인식이 손상될까요? 그렇다면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분쟁 지역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염려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사진은 과거의 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우리는 사진을 통해 기억하고 과거를 재연한다. 기억과 의미의 크기에 따라 사진의 메시지와 결과는 달라진다. 그렇다고 사진이 늘 무엇을 전달하는 목소리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의도치 않게 찍힌 사진도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사진이 모든 것은 담을 수 없기에 의도를 가진 프레임으로 편집을 하기도 한다. 시간 속 인물과 그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를 박제하고 복제도 한다. 사진 한 장은 복잡한 역학관계를 갖고 있다. 그래서일까? 때때로 사진은 사실 여부를 증명하라고 요구받는다.

사진에 담긴 폭력은 소비되기도 한다. 지루한 일상을 날리기 위해 스펙터클한 영화를 찾거나 대형사고가 난 모습을 자세히 보기 위해 속력을 줄이는 차량들로 인해 도로가 정체되는 것처럼 말이다. 손택은 이렇게 말을 이어간다.

“사진에 담긴 광경을 일으킨 사람이 누구인가? 누구의 책임인가? 이들을 용서할 수 있는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까? 이 일에 문제를 제기해야만 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만한 상황이 지금까지 있었던 적이 있나? 이런 도덕적 분노를 이해한다고 할지라도, 마치 연민이 그렇듯이 이런 질문들이 이후부터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까지 말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진을 본다는 행위는 타인과 나와 거리를 깨닫게 한다. 그의 고통을 관찰할 뿐 함께 하지 못한다는 사실만 분명해진다. 고통에 대한 온전한 이해는 나의 고통뿐이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의 한계 속에서 전쟁과 폭력을 멈출 방법은 없을까? 손택을 다시한번 소환하자.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중략) 따라서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이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다.”

 

이원영 
노동이 기도요 기도가 노동인 삶을 추구하는
포천 사는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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