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보다 중요한 하느님의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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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보다 중요한 하느님의 정의
  • 최태선
  • 승인 2022.04.24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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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아이가 출근하지 않는 날 저녁은 작은 파티가 열리는 날이다. 어제가 그런 날이었다. 홍어무침이 배달되자 파티가 시작되었다. 간단하게 카레로 저녁을 함께 하며 막걸리가 등장했다. 나도 형식적으로 잔을 받지만 어제는 받지 않았다. 대화가 시작되었고 과자가 화제가 되었다.

직장에서 선물로 받았던 과자는 장애인들이 만든 과자였다. 사회적 기업이었는데 팔기 위해 과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들이 과자를 만들 수 있게 하려고 과자를 만드는 곳이었다. 과자의 맛이 괜찮다는 평가가 내려졌다. 아이가 나를 위해 사오는 백화점에서 사온 과자와 비교해 어떠냐고 내게 물었다. 더 낫다고 할 수는 없지만 괜찮다고 말했다. 그러자 아이가 과자 만드는 곳의 전화번호를 자기 폰에 입력했다. 앞으로는 그곳에서 과자를 주문해야겠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일이 가장 기쁘다. 나는 아이에게 신앙을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보여준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내가 하는 행동을 허투루 보지 않는다. 그래서 아이도 <빅이슈>를 사온다. 내가 빅판으로부터 가장 비싼 것을 사오면 말하지 않아도 아이도 그걸 사온다. 그리고 어제처럼 장애인들이 만든 과자를 사겠다는 결정을 내린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이가 기특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모든 행동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아이는 제 신앙을 스스로 완성할 것이고 그것이 나보다 나을 것이라고 나는 기대한다.

 

사진출처=hani.co.kr
사진출처=hani.co.kr

내가 오두막 공동체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곳 이재영 선생님의 신앙이 존경스럽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공동체가 애초에 재소자 출신 사람들과 함께 살기 위함이었고, 세상에서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알코올중독자와 같은 사람들과 같이 사는 곳이기 때문이다. 장애를 가진 젊은이들이 함께 살기 위해 그곳에 거처를 마련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느님 나라의 삶의 방식임과 동시에 하느님 백성들의 사명이다. 나는 이것이 단순한 삶의 방식이 아니라 하느님의 정의를 구현하는 방식이며 그것이 하느님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우리 아이가 교회를 열심히 나가고, 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성서를 많이 읽고, 기도를 많이 하는 것보다 하느님의 정의에 아이가 익숙해지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을 넘어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아직 여러 면에서 미숙하고 자기 식의 이해가 많지만 인생의 어려움들을 지나면서 그런 면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점차 성숙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내가 나 자신은 물론 아이에게 기대하는 신앙의 척도는 하느님의 정의이다. 신앙인으로서 여하히 하느님의 정의에 투신할 수 있느냐가 내가 생각하는 신앙의 척도이자 참된 신앙의 바로미터라는 말이다.

오늘 아침에 한 장애인 작가가 쓴 책의 내용을 읽었다.

"나를 인간답게 해 주는 조건으로는 존중받는 관계, 내 몸에 대해 내가 원하는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상황의 유지, 삶에 대한 자기 결정권, 사회에 참여할 기회 등이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사회가 개인에게 그것들이 필요하다고 인정하고 그 권리가 지켜지는 방식으로 제반 조건들을 구성했기 때문에 비로소 당연해진 것이다.

반대로 사회가 권리를 왜 지켜 줘야 하냐고 묻는 순간, 개인들의 사람됨은 침해당한다. 장애인의 외출에 이유를 묻는 사회, 저상 버스나 장애인 화장실이 설치되지 않은 장소에서 장애인의 사람됨은 손상을 입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 이웃을 나와 동등한 인간으로 인정하는 것은, 내게 필수적인 조건들이 내 이웃에게도 필수적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권리란 단어에 '책임'이란 말이 꼭 따라붙는 이유는, 인간됨의 조건 즉 권리를 지켜 줄 수 있는 사람이 함께 사회 공동체를 이루는 동료들뿐이기 때문이다." (<소란스러운 동거 - 장애와 비장애의 벽을 허무는 '사이'의 이야기>, 박은영 지음, IVP 153~154쪽)

박은영 작가가 말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정의이다. 그것은 장애와 비장애의 벽을 허문다. 여기서 벽을 허문다는 말이 내게 의미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 바로 모든 사회의 장벽들을 허무신 것이기 때문이다. 나로 인해 우리 사회의 벽 하나가 허물어진다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가장 분명한 증거가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공동체를 꿈꾼다. 모든 사람들이 이제는 내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내가 늙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늙었기 때문에 더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더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내가 이루게 될 공동체는 더 많이 그리고 더 완벽하게 하느님의 정의를 구현하는 곳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정의란 만만한 실체가 아니다. 공동의 이해를 설정하는 것 자체도 때론 불가능하다. 자끄 데리다는 정의(正義)를 이렇게 정의(定議)했다.

“정의란 해체할 수 없는 실체로써, 모든 해체를 관장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정의에 대한 이러한 규정들은 언어를 사용하여 그 뜻을 규정하려는 애매한 시도들이며, 결코 길들일 수 없고 길들여지지 않는 정의의 실체를 보호하도록 궁극적으로 해체해야 할 것들이다.”

포스트모더니스트다운 정의이다. 하지만 나는 그가 말하는 것에서 정의의 절대적인 중요성과 가치를 본다. 그가 말하는 정의 역시 이전에 그가 말했던 “불가능성에의 열정”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복음이 진리라는 의미일 것이다.

성서 저자들에게 정의는 언제나 잊어서는 안 되는 관심사였다. 정의는 어쩌다 등장하는 부차적인 개념이 아니라, 히브리어 미스팟, 짜디카와 그리스어 다카이오수네를 통해 알수 있듯이 성서에 천 번 이상 언급될 정도로 아주 중요한 단어이다. 성서의 모든 저자는 하느님을 정의의 하느님으로 묘사하면서, 정의를 고유한 하느님의 존재와 행위로 보았다. 정의 개념을 명확히 이해하려면, 보통 사람들이 갖고 있는 정의에 대한 오해를 먼저 해결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것은 추정이 아니라, 성경적 믿음 그 이전에 존재하는 선험적인 존재이며, 하나님의 본질에 부가되는 성품이 아니라, 하느님의 형상에 속한 것이다. 그러기에 정의는 하느님의 본질이며 하느님의 존재와 동일시되는 것이다."(<정의 프로젝트>, 브라이언 맥클라렌 외 편집, 김복기 옮김, 대장간, p.33)

아브라함 헤셀의 정의 이해이다. 그는 정의와 의로움을 하느님의 본 성품으로 이해했다. 하나님의 본 성품이라는 그의 말은 특히 다가온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최종목표는 하느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정의를 추구하는 삶이 될 때 우리의 성품 가운데 하느님의 정의가 자리하게 되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느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이 예수님의 사명선언문이라는 사실 자체를 모른다. 만일 이 말씀에 담긴 의미를 절반이라도 이해한다면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예배당에 모여 예배드리는 것을 신앙의 전부로 알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부터 정의에 관한 묵상을 이어갈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의 정의는 하느님의 백성들을 통해 실행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거룩해지고 싶다면 하느님의 정의에 투신하라. 그것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신앙의 본질이며 하느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존재의 변화라는 사실을 기억하기를 바란다.

나도 주님처럼 작은 은혜의 해를 선포할 수 있기를 온 몸과 영혼으로 갈구한다. 개인적으로 내가 장애인과 비장애인들의 벽을 허물고 소란스럽게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공동체를 이룰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기를 부탁드린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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