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년 만에 숲에서 아침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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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년 만에 숲에서 아침을 맞았다
  • 장진희
  • 승인 2022.04.18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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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희의 시와 산문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요샛말로 백만년 만에 숲에서 아침을 맞았다. 새벽 어스름에 진돗개 화양이(먼저 살던 동네 화양리에서 태어나서 이름이 화양이다)와 집을 나서 강기슭길을 걷다 나도 모르게 발이 숲으로 향했다.

날이 흐려서 아침 햇살이 키큰 나무 사이로 숲에 비껴 이제 막 터지는 연초록 이파리들이 반짝이는 광경을 볼 수는 없지만 아침 이슬에 젖어 촉촉하고 부드러운 숲이다.

화양이는 쥔네가 숲으로 향하면 젤로 신난다. 평지를 뛸 때면 완전 말이 되고, 숲에 들면 노루가 된다. 사냥 본능이 살아 있어 꿩을 튀기고 두더지나 쥐를 귀신같이 잡고 한놈만 더 있으면 고라니도 잡는다. 화양이를 비롯해 그 에미 시앙이 등 역대 우리집 진돗개 덕분에 산에서 멧돼지나 뱀을 만난 적이 거의 없다.

숲에 들어보니 발이 먼저 숲으로 향한 이유를 알겠다. 취가 올라오고 애기손 같은 고사리가 껑중 대를 올려놓았다.
'이 맛이야!'
올해 첫 취와 고사리다.

작년에는 어디서 취와 고사리를 끊었더라? 작년 한해 이쪽 숲으로 안 왔는데, 그 사이 청미레덩굴 등 까시덩굴과 관목들이 꽉 쪄 있어서 그야말로 정글숲을 헤치고 가는 기분이다.

고사리밭도 세가 많이 죽었다. 희미하게 옛 사람들이 다니던 길 흔적만 남아 있는데 그 길마저 온통 관목들이 점령하고 있다. 사람 발길이 끊기는 숲... 외로운 느낌이다. 그래도 온갖 봄새들이 아침을 맞느라 여기저기서 꾀꼬르르, 삐양삐양, 째재재 바쁘다.

듬성듬성 반가운 고사리를 꺾다가 먼저 끊어간 자국이 보인다. 누군가 왔었구나. 동네에는 할매들만 남고 그나마 젊은 축에 드는 아짐들도 거의 없는데. 이 숲속 고사리밭을 오랫동안 다녔던 사람일 것이다.

고사리가 올라올 때면 새벽부터 경쟁적으루다가 먼저 가서 끊기 바쁜데 먼저 다녀간 사람의 흔적이 이토록 반갑기는 또 처음이다. 이 숲속 깊은 곳 고사리들이 보람없이 피었다 지는 건 슬픈 일이잖아. 지들도 인기가 좋아야 으쓱할 테니 말이야. 사람이 다녀야 숲길의 흔적도 남아 있을 테니 말이야.

가까운 데 나무 둥치 뒤에서 새 소리가 들린다. 애기가 낮게 앓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하고 아기 새가 에미를 찾는 소리 같기도 하고... 가까이에서 도망도 안 가고 맑게 외마디로 소리를 낸다.

어디 다친 건가? 소리 나는 쪽으로 발을 돌리다가 그만 멈춘다. 사람이 가까이 가면 무서울까? 안 그래도 아픈 새라면 놀라서 더 아플까? 사람이 도울 수 있다손 치더라도 숲이 치유해주는 것만 할까? 나는 숲보다 잘할 자신이 없다.

새의 안녕을 생각하며 돌아섰다. 끊어온 고사리와 원추리순은 삶아서 물에 담가놓고 아침 반찬은 취나물 한 줌에 어제 꺾어둔 두릅이다.

봄에는 바쁘다. 쟤들을 한번씩이라도 먹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감잎이 피기 시작했다. 논농사 하는 이웃들은 볍씨를 담그고 모판 준비를 시작할 것이다.

 

장진희
돈 안 벌고 안 쓰고 안 움직이고
땅에서 줏어먹고 살고 싶은 사람.
세상에 떠밀려 길 위에 나섰다.
장터로 마을회관으로.
곡성 죽곡 보성강변 마을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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