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사, 전기 끊기면 나도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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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사, 전기 끊기면 나도 죽는다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2.04.13 15: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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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변방에서 마주친 풍경]

특수 청소 서비스 업체가 있습니다. 죽은 이들이 남긴 것과 그 자리를 수습하는 일을 합니다. ‘죽음 언저리에서 행하는 특별한 서비스’를 행하는 김완이란 분이 「죽은 자의 집 청소」(2002년, 김영사)라는 책을 지었습니다. 그이는 책 첫머리에서 “주로 가난한 이가 혼자 죽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금은보화에 둘러싸인 채 뒤늦게 발견된 고독사는 본 적이 없다.”는 것이지요.

일본에서는 ‘고독사’(孤獨死)를 ‘고립사’(孤立死)라고 부른답니다. 그들이 고독하게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은 사회적 관계에서 고립되었기 때문이고, 그 이유는 ‘가난하기’ 때문입니다. 탈출구 없는 삶의 변방으로 내몰렸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 라자로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가운데 등장인물 이름을 밝힌 사례는 거지 ‘라자로’ 한 사람뿐입니다. 이 비유에는 두 사람의 죽음이 드러납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루카 16,19-22).

사람들은 거지 라자로의 죽음을 거들떠보지 않았겠지만, 그는 저승에 가 아브라함 곁에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반면 요란한 장례식을 거쳐 저승에 갔을 부자를 기다리는 것은 지옥 불의 고통뿐입니다. 평생 그림자처럼 살았던 라자로의 이름은 복음서에 기록되었지만, 평생 즐거운 빛 가운데 산 부자의 이름은 아무도 모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이 버린 이를 안아 주시고, 세상이 환대하던 자를 비우셨습니다.

요한 복음서(11장)에는 또 한 사람의 라자로가 나옵니다. 베타니아의 마르타와 마리아의 오빠 라자로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던 친구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미움을 받아 페레아로 물러가셨다가, 라자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예루살렘 인근 베타니아로 발길을 옮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11절)라고 하셨을 때, 토마스가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16절)라 말하고 나서야 제자들이 뒤따를 정도로 위험한 행보였습니다. 라자로의 죽음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35절)라고 합니다.

 

동정 없는 세상

거지 라자로에겐 가난한 이를 돌보시는 하느님께서 계시니 다행입니다. 베타니아의 라자로에겐 예수님 같은 친구가 있으니 든든합니다. 하느님처럼 자비하고, 예수님처럼 다정한 사람이 남아 있다면 세상에서 고립된 채 고독하게 죽어 가는 목숨은 없을 것입니다. 특수 청소부 김완은 “가난은 가난과 어울려 다니며 또 다른 가난을 불러와 친구가 되고, 부는 부와 어울리며 또 다른 풍요를 불러오는 것 같다.”라며 뼈아픈 현실을 전합니다. 빈궁해진 이는 가족과도 연락을 끊고, 가난한 이의 외로운 주검은 옆집에서 풍기는 이상한 냄새를 의아하게 여긴 이웃의 신고로 뒤늦게 발견됩니다.

가난한 이의 거처에 넉넉한 것은 우편물입니다. 체납 고지서와 독촉장, 가스와 수도와 전기를 끊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요금 미납 경고장, 경고한 대로 공급을 끊겠다는 최후통첩장이 우편함에 빽빽하게 꽂혀 있습니다. 그이를 고독사로 몰아간 ‘동정 없는 세상’에서 카드사와 대부업체의 핏기 없는 전화벨 소리에 한참 시달렸을 이들은 죽어서야 안식을 얻습니다.

서울 청담동의 빌라 건물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한 청년은 ‘전기 공급 제한 예정일’에 맞추어 목숨을 끊었습니다. 마치 전기가 끊어지면 그이의 삶도 끝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독촉이 이어지다 전기가 끊긴 날 청년은 사람 키보다 높은 냉장고 앞에 목을 매고 죽었습니다. 이 청년에게 친구가 남아 있었다면, 아마 죽음을 피할 수도 있었을 테지요. 하지만 그의 안부를 묻는 사람은 그가 생존해야 빚을 돌려받을 수 있는 채권자들뿐이었습니다.

2022년 2월 6일 서울 석관동 주택가 옥탑방에서 60대 남성이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이분은 동네 시장에서 근근이 일감을 찾아 생계를 이어 왔을 뿐 이렇다 할 정기 소득이 없었습니다. 언론에선 이런 분들을 ‘은둔형 1인 가구’라고 부르며, 그들의 고립과 가난이 고독사를 불러온다고 진단합니다.

낡은 다가구주택이 있는 골목길, 고시원과 쪽방이 밀집된 지역, 영구 임대 아파트 단지에서 주로 고독사가 발생합니다. 예전엔 아이들의 생기 넘치는 놀이터였고 이웃들이 정담을 나누는 공간이었던 골목이 이제는 값싼 임대료를 찾아 흘러 들어온 가난한 이들이 소리 없이 죽어 가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노인들만 고독사에 노출된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청장년층이 더 염려됩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다가 병들면, 일터를 잃고 갑작스럽게 삶이 무너져 내립니다. 이들은 질병 발생 뒤 직장을 잃고 짧게는 6개월, 길게는 4년, 평균적으론 2년 안에 숨졌다는 조사 결과도 있습니다. 이들은 아파도 남한테 아쉬운 소리 못하고 끝까지 버티면서 일하다 결국 삶에서 미끄러져 주저앉은 목숨입니다.

 

누구의 이름을 부를까

사회적 안전망은 부자들에게 차고 넘치지만, 가난한 이들에겐 언제나 야박합니다. 이것은 단순하게 돈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부는 부와 어울리며 또 다른 풍요를 불러오는 것 같다.”라는 말처럼, 부자들은 삶이 위기에 봉착했을 때 도움을 받을 만한 사람이 늘 주변에 차고 넘치는 법입니다. 개인적으로 전화 한 통화면 연결할 수 있는 변호사와 검사, 의사와 심리 상담가, 은행 임원과 회계사, 공무원, 목사와 스님, 신부님까지, 지역사회에서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이 많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가난한 이들에게는 그 사람들이 모두 유리 벽 바깥에 존재합니다. 보이지만 닿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교회마저 돈 많은 사람이 우대받고, 가난한 이들은 교회 언저리를 그저 맴돌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유력 인사들의 이름만 기억하시지 않습니다. 잘나가는 신자들의 이름만 기억하시지도 않습니다. “허리가 휠 것 같은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고독하게 죽어 간 사람들의 이름을 먼저 불러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죽음을 아파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먼저 떠올리실 것입니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예수님을 잊지 못해 무덤가를 떠나지 않은 부활절 아침의 마리아 막달레나의 이름을 예수님께서 맨 먼저 불러 주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가난하고 고립된 공간에 마음을 두는 이들은 복됩니다.

 

* 이 글은 경향잡지 2022년 3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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