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어서 남 주자”는 그리스도교식 능력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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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어서 남 주자”는 그리스도교식 능력주의
  • 최태선
  • 승인 2022.03.14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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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벌어서 남 주자" 113억 기부하고 떠난 99세 의사.
오늘 본 기사 제목이다.

얼마 전 한 사람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예전 교사였던 시절 담임을 했던 반 학생이다. 유감스럽게도 그 학생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역시 나는 나쁜 교사였다. 그는 두 가지를 말했다. 내게 많이 맞았다는 것과 우리 반 급훈이 “공부해서 남 주자”였다는 것이다. 애석하게도 이 두 가지가 다 기억나지 않았다. 정말 나쁜 교사임이 다시 분명해졌다.

그랬다. 1990년대 초반 내 신앙의 수준이 그랬다. 공부를 잘해 성공하고, 열심히 돈을 벌어 남을 돕자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그래서 돈 많은 집 애들과 공부 잘 하는 애들을 데리고 열심히 보육원을 드나들었다. 나는 내 인생의 십 년 정도를 교육에 투자하기로 인생계획을 세웠고 그것을 실천한 것이다. 교육은 백년지대계라는 말을 믿었고 그렇게 씨앗을 뿌리기로 했던 것이다.

아직 백년이 안 지나서인지 공부해서 남을 주거나 위에 인용했던 99세의 장응복님처럼 기부를 한 학생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공부해서 남 주자"가 우리 반 급훈이었다고 말해준 학생도 그때 같이 보육원엘 다니던 학생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일이 전혀 의미 없었던 것은 아니다. 주님은 나를 치밀하게 인도하셨고, 이 일 역시 주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하나였다고 지금 나는 느끼고 있다.

 

“벌어서 남 주자”는 그리스도교식 능력주의이다.
이것이 잘못된 길이라는 것을 깨닫기는 대단히 어렵다. 이유는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그리스도교 아닌 그리스도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능력주의의 시작은 콘스탄티누스였다.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향하게 하는 유인책으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구제에 로마의 재정을 투입하는 법령들을 반포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로마의 재정으로 라테란 성당과 같은 성찬을 위한 바실리카를 건축하게 했고 장례식을 위한 바실리카도 건축했다. 그렇게 그는 로마 변두리에 여섯 개의 바실리카를 건축했다.”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콘스탄티누스가 한 이 일에 대해 호감을 표한다. 그러나 영적으로 그가 한 일은 하느님을 없는 분으로 만든 것이다. 하느님 없이 인간이 가진 능력과 소유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대로를 만든 것이다.

그것은 크리스텐돔(Christendom)의 시작이었고,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시도하는 모든 노력들을 하느님과 관계없는 일로 만든 첩경이기도 했다. 이후로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왜 교회가 커져야 하는가. 왜 힘에 의한 선교가 시작되었는가. 왜 업적으로 교회와 사람을 평가하게 되었는가. 왜 교회 안에 계급이 생겼는가. 왜 교회 안에서 형제애가 사라졌는가. 왜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 나라를 이단으로 여기게 되었는가. 얼핏 스쳐지나가는 이 모든 질문들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자리하게 된 능력주의의 폐해들이다.

어리둥절할 것이다. 위의 질문들이 왜 문제가 되는지를 알 수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분들이 그리스도교 안에 자리하고 있는 능력주의를 당연한 것으로 인지할 수밖에 없는 사고를 지니도록 학습되었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는 황제의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고 그리스도인 행세를 하였다.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을 죽여야 하거나 힘과 영향력으로 하느님의 일을 하려는 의도를 포기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이 가진 힘으로 주교들을 궁정으로 불러들여 그리스도교에 대해 배웠고 그것으로 그리스도인 행세를 한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겼던 그리스도인이 되는 과정, 다시 말해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아비투스를 체화하는 과정을 건너뛰고 그리스도인 노릇을 시작한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콘스탄티누스를 그리스도인으로 여기지 말아야 했다. 적어도 그럴 수 있는 영적 지각이 작동해야 했다. 물론 그런 그리스도인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황제의 그리스도인 노릇을 막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지는 못했다.

결과적으로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교 안에 능력주의를 개시하였고 그것은 곧 그리스도교의 사망이었다.

성서를 잘 보라. 매우 발견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그것을 발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하느님 나라의 원칙은 비능력주의이다. 처음 듣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성서를 가로지르는 약함의 신학의 정체이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 사도 바울이 “약할 때 강함”을 외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가 사용했던 손수건만 만져도 병이 나았던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자신의 능력을 내려놓고 약해졌을 때 그런 그를 통해 그리스도의 능력이 발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거듭 그것을 경험한 후에 그러한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 사실을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번번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게 머무르도록 하려고 더없이 기쁜 마음으로 나의 약점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리스도(하느님의)의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온전히 드러난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약해졌을 때 오히려 강해진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선포한 것이다.

“초기교회가 사람들이 모일 집이나 가난한 이들을 위한 장례식이나 과부들을 위한 물품을 요구했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삶과 소유를 내어줌으로써 그들의 필요에 응했다.”

콘스탄티누스가 하는 방식에 비해 얼마나 초라한가. 황제가 아닌 대부분이 가난했던 그리스도인의 자원은 얼마나 빈약한가. 하지만 그런 그들의 노력이 로마의 박해를 이기고 그들을 적대시하던 믿지 않는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그들이 약할 때 그리스도의 권능이 그들에게 머물렀고 그들의 일을 통해 그것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일이 하느님의 일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품어야 할 예수의 마음의 요체는 비움이다. 우리가 모든 것을 비울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의 철옹성 안으로 들어간다. 세상이 아무리 요동쳐도 세상은 하느님의 철옹성을 흔들지 못한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의미이다.

하느님 나라의 요체는 능력주의가 아니라 비능력주의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일을  할수 있는 비결은 채움이 아니라 비움에 있다. 그러므로 벌어서 남을 주겠다는 사고는 하느님 나라의 방식이 아니다.

나도 안다. 믿기 힘들고, 배우기 어렵고, 실천하기는 더더욱 어려운 방식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능력을 내려놓고 모든 소유를 버리고 완전히 약해졌을 때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권능을 경험하게 된다. 그럴 때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약할 때 강하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이 된다.

명심하라. 벌어서 남 주면 자신의 일이 되고 자신의 영광이 된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이 가진 작은 것을 내어놓을 때 오병이어의 기적은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재현된다. 이제 콘스탄티누스가 한 일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한 일을 다시 비교해보라. 그리고 다시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자.

오랜 가난을 통해 나는 이것을 배웠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옛날과 같이 벌어서 남 주자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제 나는 나보다 더 절실한 사람을 만나면 내 것을 내어준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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