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은 애통해 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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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은 애통해 하는 사람
  • 최태선
  • 승인 2022.03.06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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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리스도인을 슬픔을 아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오래도록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결국 나는 슬픔을 배우고 있다. 내 슬픔만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슬픔을 아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인 됨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이 든 건 대통령 후보들의 치열한 싸움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자신을 희생해서 국민들을 섬길 것처럼 이야기한다. 정말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고 믿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정말 그 사람들이 국민을 섬길까. 섬긴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어야 한다. 결국 그들로부터 확인하는 것은 말의 오염이다.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민주주의야말로 신앙의 자유의 초석이라고 믿고 있다. 민주주의가 사라지면 그리스도교가 망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사라질 그리스도교라면 그리스도교가 아니라는 생각을 먼저 해야 하지 않을까. 로마가 그리스도교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락한 이유가 무엇인가. 아무리 박해해도 사라지지 않는 지독한 종교라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가 아니면 사라지고 말 그리스도교라면 그냥 사라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어쨌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신앙과 국가를 분리해서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리스도교는 국가와 상관이 없다.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그리스도교를 말살할 수 없다. 공산주의로 러시아 정교회가 사라졌는가.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에서 우크라이나 정교회가 사라졌는가. 아니다. 공산주의는 박해의 역할을 할 뿐이다. 박해는 그리스도교가 진리와 생명의 종교임을 확인하게 할 따름이다. 박해가 심할수록 그리스도교는 연단을 이루고 정화된다. 정금 같아진다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 아닌가.

민주주의는 인류가 가질 수 있는 최선의 정치제도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모든 사람을 위한 정치제도는 될 수 없다. 잘 보라. 정치판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최소한 경쟁에서 이긴 사람들이다. 경쟁에서 이기고 힘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서는 공감의 능력이 사라진다. 공감의 능력이 사라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슬픔을 느낄 수 없다. 애통해하지도 않는다. 애통해 하는 것은 약자의 슬픔을 처리하는 방식이다.

결국 민주주의 선거제도라는 것은 강자들의 합리적인 통치방식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한계를 지닌다. 약자들을 대변하겠다고 나선 이들 역시 자신들이 강자라는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 결국 경쟁의 체제는 약자들을 보호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닌다. 그래서 나는 민주주의가 인류 최선의 정치제도라는 사실에 동의할 수 없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세상의 한계를 잘 인식했다. 그래서 세속에 물들지 않는 자신들 고유의 아비투스를 형성했다. 그들은 세상과 다르게 살았다. 그들은 경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약자들의 버팀목이 되었다. 스스로 약한 자가 되어 다른 약한 자들을 섬긴 것이다. 여기에 그리스도교의 존재 의미가 있었다. 초기 그리스도교가 박해의 상황 속에서 사라지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경쟁에서 이겼기 때문이 아니라 약한 자가 되어 약한 자를 섬겼기 때문이다.

그들은 애통(슬퍼)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애통하는 것은 단순한 약자들의 불만이나 감정억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느님의 움직임을 촉발하는 촉매제였다. 그들이 슬퍼할 때 하나님의 위로가 임했다. 하느님의 위로는 단순한 감정적인 충족감이 아니었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슬픔을 아신다는 것은 그 슬픔의 원인으로부터의 해방과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위로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위로가 아니라 샬롬이다. 샬롬은 하느님으로 인해 부족한 것이 없는(모든 결핍이 사라진) 상태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슬퍼할 때 하나님의 위로가 임한다는 사실에 담긴 의미를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알지 못한다.

나는 목사가 되어 실패했다. 그냥 실패한 것이 아니라 처절하게 실패했다. 그리고 그 실패 가운데 오랜 기간 방치되었다. 자칫 신앙을 버릴 수도 있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하느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욥의 부인의 심정을 안다. 그녀가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정말로 하느님을 믿고 사랑했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을 욕하지 않고 그냥 죽고 싶었다. 그녀만큼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슬픔을 배우려면 그렇게 오래도록 실패 가운데 방치되어 있어야 한다. 그 실패가 처절할수록 더 절절하게 슬픔을 배울 수 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그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에게 닥쳤던 모진 환난을 자랑했다. 자신들이 슬퍼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도 다른 사람들은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했다. 슬퍼하는 게 당연하지 않으냐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슬퍼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지 않고 자신들의 환난을 자랑했다.

민주주의는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다. 경쟁에서 진 사람에게 다시는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래서 환난을 통해 슬퍼하는 사람이 된 사람들에게는 영원히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환난을 와신상담하며 극복해낸 사람이 아무리 자신의 과거의 슬픔을 이야기하며 자신이 슬퍼하는 사람이라고 주장해도 그것은 주장일 뿐 그는 더 이상 슬퍼하는 사람으로 살 수 없다. 슬퍼하는 사람은 오직 하느님 나라 안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정치가가 될 수 없다. 그들이 아무리 어려서 모진 고생을 했어도 일단 그것을 극복하고 경쟁에서 이겼을 때 그것은 단지 자신의 성공을 치장하는 액세서리에 지나지 않는다. 모진 고생을 한 사람이 그럴진대 승승장구한 사람은 말할 필요가 없다.

나는 적어도 신앙인이라면 이런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신앙의 눈을 가지게 되기를 바란다. 이제 나는 정치에 과도하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정치가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다양한 방식으로 추구할 뿐이다. 국민은 자신의 권력의 수단일 뿐이다.

“<호교론> 초반에서 유스티아누스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방식을 로마 제국의 비그리스도인 거주자들의 그것에 맞서는 일종의 반문화적인 아비투스로 제시한다. 유스티누스는 로마인들의 삶을 다른 네 개의 주된 분야에서 나타나는 중독성 관습이라는 특징을 지닌 '비자유(unfreedom)의 아비투스'로 여긴다. 간음에 의해 훼손된 성적 윤리, 마술의 덫에 걸린 사교, 경쟁적인 물욕에 의해 왜곡된 부와 소유, 다른 관습에 대한 증오와 다른 종족에 대한 살해로 가득 찬 폭력과 혐오, 유스티아누스는 당시의 그리스도인들 역시 이런 중요한 분야들에서 분투하고 있다고 전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것들 모두가 유혹적이며 강력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들은 아주 열심히 그런 버릇을 버리려고 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 그것들이, 유스티아누스가 보기에는 마귀의 능력과 조작에 대한 표현들이기 때문이었다.”

오늘날과 상황이 다르지 않다. 이 내용을 잘 보라. 오늘날도 유스티아누스가 말하는 비자유의 아비투스가 세상을 지배한다. 그것은 어느 정치가를 선택해도 마찬가지다.

나를 현실감각이 없는 골방에서 기도만 하려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비난을 해도 좋다. 중요한 것은 어떤 정치가를 선택해야 좀 더 나은 세상이 될 것인가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같이 반문화적 아비투스를 여하히 제시할 수 있는가이다.

정치가들은 선거에서 이기는 순간 황제가 된다. 제왕적 대통령의 문제를 아무리 문제 삼아도, 정치제도를 아무리 바꾸어도 그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공산주의도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다.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은 정치가나 정치제도가 아니라 반문화적 아비투스를 제시하는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들은 슬퍼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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