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 데이] 신심과 정치적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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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데이] 신심과 정치적 행동
  • 로살리 뤼글
  • 승인 2016.08.02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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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대표적인 사회주의 정치 사상가이다. 아일랜드계 미국인으로 1928년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나 1989년 암으로 사망했다. <오래된 희망, 사회주의>는 그의 유작이다. 16년간 뉴욕의 퀸스 대학 정치학 교수로 재직했다. 그의 진면목은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저술가로서의 활동에서 찾을 수 있다.1960년대 미국 사회에서 격렬한 복지 논쟁을 일으키고 정부의 복지 정책을 끌어냈다. 이 책에는 사회주의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해답, 사회주의 역사에 대한 통찰, 그리고 더 나아가 미래 사회주의에 대한 대안까지 제시하고자 했다. 트로츠키주의 성향의 ‘독립 사회주의자 연맹’에 가입하면서 사회주의자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여러 민주적 사회주의 정치그룹에서 활동하며 미국의 대표 사회주의자로 떠올랐다. 미국의 역사학자 아서 슐레진저는 그를 “신뢰할 만한 사회주의자”라고 평하기도 했다. 닉슨 대통령 시기에는 은밀하게 작성된 목록 ‘닉스의 적’에 오른 20명 인사 중 한 명이었다. 스탈린 영향을 받은 동유럽의 관료주의적 사회주의를 강하게 비판했고, 1960년대 유럽과 미국에서 떠오른 ‘신좌파’ 세력과도 열띤 논쟁을 벌였다.대표작으로는 <또 다른 미국: 미국 내의 빈곤>The Other America <세금 정책과 경제>Tax Policy and the Economy <새로운 미국 : 침체와 성장의 미국>The Next America 등이 있다.

마이클 해링톤은 도로시 데이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사람일 것이다. 그의 두 책들, <다른 아메리카>와 <자서전: 장거리 주자>는 그가 주장했던 “가능한 좌파 정치” 사상이 2년 동안 가톨릭일꾼에 있었던 경험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그는 1953년 가톨릭교회를 떠났고 그 때 가톨릭일꾼에서의 삶도 정리했으며, 그 후 작가이며 행동가로 살아갔다. 그는 자신을 민주적 사회주의자로 정의했으며, 전통정치와 대안의 정치 양 분야에서 일했다. 그의 저서 <다른 아메리카>는 자주 인용되고 있으며, 가난에 맞서는 전쟁에 정부가 민주적인 접근을 하도록 고취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84년 암이 발병했고 1989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아래의 인터뷰는 1988년 병세가 약간 호전되었을 때 했던 것이다.

❧ 내가 일꾼에 있었던 때인 1950년대 초기는 도로시의 영향이 최하위에 있었다. 그 때 도로시 데이는 아무한테서도 인정을 받지 못했고, 우리들은 그저 작은 팀에 불과했다. 가톨릭 청교도들이었다. 완전히 소외된 급진주의자들이었다. 후에 미국의 주교들이 핵무기에 관한 사목서한을 발표하면서 도로시 데이를 인용할 것이라고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1952년의 도로시는 당시 뉴욕 대주교장인 스펠만 추기경보다 더 교계의 공식적인 입장에 가까웠다. 스펠만은 아무런 자리를 차지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단순히 냉혹한 전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나는 도로시가 자신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의식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1950년대의 미국 역사와 가톨릭 역사에서 프란시스 스펠만 추기경은 마치도 책의 각주와 같고 도로시는 한 장을 차지할 것이다.

도로시는 실제로 아무도 그런 행동을 취하지 않고 있었을 때 평화주의자의 증언을 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측면이다. 탈 중앙집권 –지방분권주의는 자의적 해석에만 유의한다면, 역시 중요한 측면이다. 지방분권주의는 사회주의와 좌파–국가 통제주의에 엄청난 위험이 내포되어 있으며, 좌파가 관료주의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무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너무나 비인격적이며 지나친 권위주의, 사회공학을 너무 많이 선호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공생주의, 지방분권주의, 인격주의 등 도로시가 주장했던 이념들은 지나치게 문자에 매달리지 않는다면, 매우 깊은 진실을 담고 있다.

사회주의에 대한 도로시의 비판은 보조성의 원리라는 개념에서 나온다. 이 보조성의 원리는 가능한 대로 일들이 탈중앙화 되고 인간적인 관계의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보다 가족의 차원, 이웃, 공동체의 차원에서 일을 수행해야 한다. 지금은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이런 주장을 이해하고 있다.

도로시는 본래 전혀 정치적이 아니었다. 도로시는 그런 자기의 입장을 무정부주의라고 했지만, 그가 바랐던 것은 모든 사람이 애덕을 실천하는 일이었다. 그들의 삶을 그리스도교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도로시는 공동체를 지향했다. 애덕을 원했고 자비를 실천하기를 원했다. 이런 것이 도로시가 관심을 두었던 분야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한다면, 복지정책 따위가 필요 없는 것이다. 도로시가 틀렸던 것은, 모든 사람이 그런 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당신 자신부터 철저하게 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동안 사람들은 굶주리고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그들에게 식량 배급표를 주어야 한다! 그리고 다행히도 굶주린 사람들은 식량배급표를 가지게 된다! 굶는 것보다는 낫다.

가톨릭일꾼에서도 나는 약간 이질적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 비록 민주당에게 투표하러 가지는 않았지만, 정치적 행동이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내가 사회당에 가입했을 때 도로시는 무척 화가 났다. 도로시는 투표하지 않았고 도대체 내가 왜 거룩한 어머니 국가를 끌어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도 말했지만 –그때도 진실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진실이라고 믿는데– 물론 나도 모든 형태의 중앙집권적이고 관료적인 사회주의를 거부했다. 그리고 나는 국가를 포용했던 것이 아니라 정치적 행동을 믿었다.

나는 도로시와 큰 논쟁을 하곤 했다. 나는 만일 도로시가 세상의 식량을 키우는 유기농법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수십억 사람들을 위한 어떤 계획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현재의 식량 생산력이 없다면, 세계를 먹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것들에 대하여 끝없는 토론을 했다.

나는 한국전쟁 시기에 가톨릭일꾼에 있었다. 우리는 전쟁을 반대했으며, 어떤 형식으로든지 저항을 표현하고자 했으나 큰 운동은 없었다. 뉴욕시의 비공산주의 좌파들은 그 때 작은 강당을 겨우 채울 만큼 적었다.

나는 도로시와 꽤 잘 지냈다. 그것은 내가 매우 중산층다운 방식으로 양육되었기 때문에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면 여성이 방안에 들어 올 때 일어서야 한다는 교육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가톨릭일꾼에 있을 때 나에겐 아직도 매우 중산층다운 습관들이 남아 있었고, 도로시는 나의 그런 고풍의 태도를 좋아했던 것 같다. 그는 내가 그를 위해 문을 열어주고 의자를 끌어내주는 것을 기뻐했다. 쥐와 바퀴벌레가 있는 가톨릭일꾼 공동체의 식당에서 그런 태도는 약간 우스꽝스러웠는데도 말이다.

도로시는 매우 여성다운 면모가 있었다. 첫 번째로 체포된 것이 여성운동가였기 때문인 것을 생각하면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뉴욕시에 와서 매우 자유분방한 생활을 했고, 젊은 나이에 포스터와 함께 살고 아기를 낳는 모습이었지만… 매우 여성적인, 구식의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일꾼 공동체는 행복하지 않은 곳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긴장도 있었는데, 나는 그 긴장들이 나에 관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일꾼 공동체에 가자 나는 꽤 중요한 역할을 매우 빨리 하기 시작했다. 나는 도로시와 잘 어울렸고 말을 잘 했으므로 신문에 많은 글들을 쓰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연설도 많이 했다.

도로시는 훌륭했다. 그는 초대들을 많이 받았는데, 그것도 도로시 데이에게 보내진 초대였지만, 늘 일꾼운동에 보낸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답변했다: “초대에 감사합니다. 마이클 해링톤이 갈 것입니다.” 마이클 해링톤이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런 답변을 보낸다. 나는 상대방이 만족할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들은 유명한 가톨릭 여성을 모시려고 하는데 대신 23살짜리 젊은 남자가 가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일꾼 공동체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 중의 하나는 내가 밤 당번을 섰을 때이다. 아마 6개월 쯤 했던 것 같다. 1시간마다 집을 한 바퀴 돌아보고(그것은 겨우 5분이면 끝난다), 다음에는 좋은 음악을 듣고 시를 쓰고 책을 읽었다. 밤새 그렇게 했다.

가톨릭일꾼에 왔을 당시, 나는 교회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건 파스칼이나 키르케고르 같은 입장에서이지, 무슨 예수회 회원 같은 입장이 아니다. 내가 교회의 진실을 증명할 수 있다거나, “모든 것이 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톨릭주의에 있다”고 하는 이성주의자로서도 아니다. 오히려 이단적이고 실존주의적인 다양성을 지니고 돌아온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긴장과 모호함을 갖고 2년 동안 일꾼 공동체에서 살았다.

우리는 일꾼 공동체에서 리지외의 소화 데레사, 아빌라의 대 데레사에 대하여 말하곤 했다. 십자가의 성 요한도 매력적인 대화의 주제였다. 우리는 스펠만 추기경이 매우 좋은 가톨릭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너무나 태만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교황이 바티칸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있던 시기에 일꾼 공동체의 전형적인 선언문은 이런 것이었다: “당신은 여기에 무엇 때문에 있습니까?” 그리고 적절한 대답은, “성인이 되기 위하여”였다. 도로시는 항상 그리스도를 위한 바보가 되는 것에 대하여 말했다. 도로시가 지니고 있는 무겁고 심각한 실존주의.

당신도 알다시피, 난 결코 정통적인 가톨릭일꾼 사람이 아니었다. 일꾼에는 세심한 엄격주의의 측면이 있었다. 그것은 때때로 물질적 안락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그때 “좋은 음식이 썩은 음식보다 낫다”고 내 자신에게 말하던 것을 기억한다. 우리는 일꾼 공동체에서 부패한 음식을 먹었다. 우리는 고깃간에서 가장 싼 고기를 사거나 주인이 버리려고 하는 고기를 달라고 청하기도 했다. 우리는 보통 굳어진 빵을 먹었다. 그러면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이건 좋은 일이 아니다.” 만일 당신이 이런 기본적인 측면에 동의하지 않으면, 일꾼 사람들은 당신이 철저하지 못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결정적인 모욕이었다.

나는 매일미사에 가려고 애쓴 적이 있다. 일꾼의 많은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성무일도를 했고, 우리들은 수도원 식의 마침기도를 함께 했다. 그래서 전례기도가 무척 많았다. 그러나 있는 동안 내내, 나는 나 자신과 대화하고 있었고, 마침내 결론에 도달했다, “내가 일꾼을 아직도 존경해도, 이 기관을 아직도 사랑한다고 해도, 이건 믿을 수 없어.”

나는 이런 결정이 매우 왜곡되고, 나에게는 심리적으로 매우 두려운 시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는 대신, 그냥 괜찮았다. 나는 교회를 떠났을 때 일꾼도 떠났다. 가톨릭이 아니면서 일꾼에 있기가 꽤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그만 두었다. 도로시가 나를 불렀다. 함께 점심을 먹자고 했는데, 이런 일은 꽤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내가 교회를 떠났다는 얘길 들었고 그 이유를 알고 싶어했다.

“여자 때문입니까?”
그래서 나는 말했다, “아닙니다, 도로시. 신학의 문제입니다.”
도로시는 대답을 듣자 이렇게 말했다. “아, 난 그 대답을 들어서 매우 행복합니다.”

도로시는 참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가톨릭이었다. 철저한 청교도적 측면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가 매우 열정적인 여성이었다고 생각한다. 비록 자신의 정치관으로 스펠만 추기경을 미끄러지게 만들었지만, 진짜 죄는 육신의 죄라는 생각을 스펠만과 공유하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교회를 떠난 것은 오직 지적인 이유에서인데, 떠나면서 지적인 문제는 극복할 수 있는 것이지만, 반면 육신의 죄는 참으로 더 커졌다고 생각한다. 


출처: <DOROTHY DAY : Portraits by Those Who Knew Her>, by Rosalie G. Riegle, Orbis, 2003. <참사람되어> 편역, 2007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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