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신학과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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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신학과 경제
  • 홍인식
  • 승인 2022.01.30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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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의 양극화와 해방신학 그리고 기본소득 -3

인간의 가치관과 기독교적 가치관의 악마적인 도치현상과 인간의 제도를 신성화하며 그의 이름으로 부의 무제한적 축재의 약속에 대한 대가로 인간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시장체제의 도전에 직면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그리스도교의 믿음이 그 ‘제국’에 대항하는 투쟁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신성화된 체제에 직면하여 우리는, 이미 Marx가 지적했던 것처럼 ‘종교에 대한 비판은 모든 비판에 대한 전제조건이다.’라는 것을 인정해야한다.

우리는 신성하다고 여겨지지 않는 것에 대하여만 비판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자본주의 체제의 ‘성스러운 종교적 서광’을 거두어 낼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종교성이라는 것은 타락한 우상숭배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히 말할 수 있다고 한다면 비로소 그 체제에 대한 우리의 비판은 우리의 사회 속에서 배가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교적 믿음과 신학이 자본주의의 이론과 활용에 대한 비판을 위하여 독특한 공헌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특히 윤리적-영성적인 차원에서 그러하다. 기독교는 윤리-영성적 차원에서 인간을 희생물로 간주하는 제의적 종교로서 신자유주의의 도전에 효과적인 대응을 하며 대안적 삶에 대하여 제시해 줄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유발되는 윤리-영성적 행위와 대안적 삶에 대해서 논하지 않을 수 없다.

1. 해방의 윤리적 영성

해방신학은 물론 그리스도교 윤리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은 무엇보다도 한 사회에서 가장 연약하고 가난하며 아무런 사회적 보호 장치도 갖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행해지는 모든 종류의 억압과 얽매임으로부터의 해방이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로부터 출발되어진다. 예수는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였으며 이에 따라서 그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의 삶을 살아왔다.

여기서 예수의 가난한 사람들과의 동일시를 단순한 비유로 간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예수의 삶을 지탱하고 있었던 근본적인 논리와 동력이다. 해방의 윤리적 영성에서 양심은 단순한 특정 상황에 대한 도덕적 원리의 적용만을 의미하는 것을 넘어서서 가난하고 억압당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표정에 대한 응시와 아픔을 함께 하는 답변을 포함하고 있다. 

2. 정의와 평화의 윤리적 영성

불의와 부정은 어느덧 우리 인류의 삶에서 일상적인 현상이 된 것 같다. 불의는 조직화 되어 있고 더욱이 메델린에서 개최되었던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CELAM) 문서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미 제도화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인간 존재는 이러한 폭력과 불의에 영원히 매여 사는 것을 거부하고 저항하고 있다. 인간은 정의를 갈망하고 또 그것을 현실에서 실현하고자 노력한다. 이러한 인간의 정의를 향한 열망은 성서와 그리스도가 추구하는 영성과 일치한다. 정의의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마태 6,33)

Rene Padilla는 사회의 모순을 단순히 경제적 혹은 정치적인 문제로 단순화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이 문제는 오히려 사회정의와 깊은 관계가 있음을 지적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오늘의 현실과 사회윤리의 측면에서 볼 때 오늘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모든 경제 관계에 있어서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의 실천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모든 정부가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가난한 자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사회 정의를 실천하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현실이 우리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현 경제시스템의 악마적인 성격을 고발하는 책임을 면제시켜 주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현실이 우리로 하여금 개인적인 그리고 공동체적인 차원에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우리의 가진 것들을 활용해야 한다는 청지기적인 책임을 회피하도록 만들어 줄 수는 없다.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기독교 공동체는 복음을 통하여 다른 사회구조를 변혁시킬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사회구조라는 것”(John H. Yoder)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모든 인간의 역사는 폭력으로 얼룩져 있다. 폭력의 역사를 언급하지 않고서 인간의 역사를 말한다는 것이 불가능할 만큼 폭력은 우리의 삶 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의 선교사역이 현대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폭력의 문제와 분리되어 질 수 없음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많은 성서적 혹은 신학적 지식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신약적 전망으로부터 우리가 예수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한 삶을 살아가야 함과 그리고 그러한 삶이 필연적으로 평화의 실천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는 것을 쉽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평화는 조화, 평안함, 번영 그리고 생의 풍요로움이 함께 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 뿐만 아니라 평화는 정의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정의와 평화는 서로 분리되어 질 수 없는 관계성 속에 놓여 있다. 이사야의 말을 빌리자면, 정의의 열매는 평화이며, 정의의 결실은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 아니겠는가.(이사야 32:17)

3. 은혜의 윤리적 영성

우리 사회는 점차 은혜가 사라지고 있는 사회이다. 모든 것은 대가를 치뤄야 한다. 거저 주어지는 것은 없다. 모든 것에 가격이 매겨진다. 가장 짧은 시일 안에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이익을 창출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관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부채는 1원까지도 남김없이 갚아야 한다. 여유와 쉼은 그 자리를 잃어가고 오직 경제발전을 위하여 모든 것들은 희생되어지고 유보되어져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경은 우리에게 대안적 윤리적 영성을 소개하고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예언자 전통과 이 전통을 이어가는 나사렛 예수의 윤리적 영성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대안적 윤리적 영성!, 그것은 은혜의 윤리적 영성이다. 예언자 이사야는 상업적 관계가 아닌 사회의 유토피아적 꿈을 외친다.

 

너희 모든 목마른 사람들아, 어서 물로 나오너라. 돈이 없는 사람도 오너라. 너희는 와서 사서 먹되, 돈도 내지 말고 값도 지불하지 말고 포도주와 젖을 사거라. 어찌하여 너희는 양식을 얻지도 못하면서 돈을 지불하며, 배부르게 하여 주지도 못하는데, 그것 때문에 수고하느냐? "들어라,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으며, 기름진 것으로 너희 마음이 즐거울 것이다.(이사야 55:1~2)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들의 삶이 모습을 돌아볼 것을 말하면서 값없이 받은 것을 값없이 베풀 것을 요구한다. 대가를 치러야 하는 오늘의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그리스도교는 은혜의 윤리적 영성, 대가를 치루는 것을 넘어서는 대안적 윤리적 영성을 말해야 한다. 대가를 치루지 않는 사회, 그것은 하느님과 나사렛 예수가 꿈꾸는 사회이다.

4. 동정과 자비의 윤리적 영성(고난의 동참과 나눔의 영성)

세계화는 인류의 행복한 삶이 보장되는 세상을 제안하였지만 우리는 곧 그것이 환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세계화는 인류의 빈부격차를 더욱 벌어지게 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세계화 과정 내부에 태생적으로 자비의 영성의 부재로 인한 것이다.

자비의 부재는 세계화 과정 자체가 ‘나와 다른 인간’, 동물, 그리고 자연세계의 필연적인 희생에 의해서 생성되고 유지 지탱되어 진다는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를 행하여 해방신학은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세계화된 사회구조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소외되어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동정과 연민의 영성을 추구하고 있다. 해방신학은 동정적인 행동, 다시 말하면 피해자의 고통에 대한 동참과 나눔의 행동으로 표현되는 신학적 그리고 인간론적 원리인 자비의 영성을 실천하고 있다.

이러한 해방신학의 자비와 동정의 영성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의 전통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사야는 희생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던 당시의 유대교를 비판하면서 (이사야 1,10-15) 믿음의 핵심적인 주제로서 정의의 추구, 억압받는 자의 인권 보호, 고아와 과부에 대한 돌봄을 제안하고 있다.(이사야 1,17) 더 나아가서 호세아는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느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호세아 6,6)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예수에게서도 이러한 동정과 자비의 영성은 손쉽게 발견되어진다. (마태 9:13, 12:7) 예수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하여 동정과 자비의 영성을 강조한다.(누가 10:29~37) 그리고 말한다. “가서 너도 이같이 하라”

5. 이웃의 윤리적 영성

보프는 그의 최근의 저서 <다른 세상의 가능성을 위한 덕목 II>에서 신자유주의적 세계를 대치하는 좀 더 나은 세상을 가능케 하기 위한 덕목으로 친절함(베풂), 더불어 삶(상생), 존중 그리고 관용을 지목하고 있다. 그는 존중의 덕목을 실현하기 위한 중요한 개념으로서 “이웃”을 강조한다. 이웃의 존재에 대한 인정 없이 “더 나은 세상”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더 나은 세상”은 이웃에 대한 인정, 각 인간 존재의 내재된 소중한 가치에 대한 인정과 이웃에 대한 무조건적인 존중으로부터 출발되어진다고 강조한다. 신자유주의는 이웃을 배제한다. 이웃에 대한 존중은 경제발전을 저해하는 요소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는 무관심하고 무감각한 문화를 지향한다. 나 자신만의 행복과 세계에 전념하며 모든 것은 “나의 세계”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신자유주의 세계에서는 수동적이고 무표정한(무감각한) 인간성이 형성되어진다. 신자유주의적인 인간은 이제 더 이상 현 세계의 개혁(변화)을 도모하려 하지 않으며 “나의 세계”를 변화시키려 할뿐이다. 그에게 가장 중심적인 삶의 주제는 “나의 세계” 일 뿐이다. “나의 세계” 의 강조는 현 사회에서 반문화운동의 사라짐을 의미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homo politicus의 종말과 더불어 homo psicologicus와 homo oeconomicus의 출현을 의미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는 어떤 윤리적 영성의 목회를 지향해야 하는 것일까?

그리스도교가 “더 나은 세상”의 건설을 위하여 가져야 할 모습은 Boff가 지적하는 “이웃의 윤리적 영성”이다. 이웃의 영성은 우리로 하여금 나와 다른 존재에 대한 인정, ‘섞어짐’(mestizage)의 실천, 받아들임, 인종간의 교제와 소통, 문화 간의 대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잊혀 있던 억눌린 이웃, 소외 받고 있는 이웃, 침묵을 강요당한 이웃, 모욕당하고 억압당하고 있는 이웃들에게 우리의 관심을 집중하도록 만들 것이다. 해방신학은 “가난한 자에 대한 우선적 선택” 을 신학의 가장 중요한 주제로 삼음으로서 “이웃”을 발견하는 영성을 지향하고 있다.

6. 연대와 공동체의 윤리적 영성(포함의 영성)

욕망의 시대에서 보다 더 구체적인 현상으로서 나타나고 있는 빈부격차의 벌어짐은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빈부격차 현상은 점차 우리 사회에서 경제적인 차이에 근거한 사회적 계급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욕망의 시대는 “신 부족사회”를 형성하게 만들고 있다. 경제적 차이로 인하여 형성된 새로운 부족(사회계급)들은 각기 고유한 문화를 형성한다. 교육, 문화, 예술, 취미생활 심지어는 식생활에서도 급격한 차이가 발생하게 되고 부족 간의 관계는 단절되어진다. 새로운 부족시대의 등장이다. 

유대교의 이방인에 대한 소외와 차별의 사회적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과 서에서 와서,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의 시민들은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서,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8,11-12)라고 외치면서 부족을 넘어서는 서로 다름이 어울려 살아가는 연대와 공동체의 사회를 가르쳤다.

해방신학은 이러한 계급사회를 변혁시키기 위한 가난한 자들의 연대를 구체화한다. 기초공동체의 형성을 통하여 가난한 자들의 역사적 위력을 강화시켜 왔다. 연대만이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사회를 형성하도록 해 줄 것이다. 해방신학은 결코 혼자만의 그리고 지극히 개인적인 영성을 포기한다. 해방신학은 연대 속에서 함께 이루고 함께 가는 하느님나라를 꿈꾸고 있다. 예수의 가르침과 실천도 그의 영성이 연대와 공동체를 지향하는 “포함의 영성”(inclusive spirituality)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듯이 해방신학의 영성도 그러하다.

7. 생명의 윤리적 영성

생명은 하느님의 은사 중 가장 값진 은사중의 은사이다. 우리가 보존해야 할 가장 최우선의 가치는 생명이다. 생명은 모든 윤리적 권리의 기초와 근원이 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윤리의 버팀목이기도 하다. 생명의 보호와 방어는 모든 윤리적 행위의 출발점이며 귀결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는 인간의 생명은 최대이익 창출을 위하여 언제든지 희생당할 수 있는 요소이다. 특히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의 생명, 소비사회에서 소비 능력을 상실한 사람들의 생명은 고귀하게 취급받지 못한다. 그들은 신자유주의 경제발전과 최대이익의 창출을 위하여 언제든지 자본과 시장의 제단위에 바쳐질 수 있는 필연적인 희생제물이다. 이러한 생명 경시와 도구화는 신자유주의 세계에서 양극화 현상을 강화시키고 있다.

그리스도교에서 생명의 보호와 방어는 하느님 존재 자체에서도 그 정당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죽음의 우상들을 대항하여 생명의 하느님으로 자신을 계시한다. (마태 12:27) 생명존중의 문화는 그리스도교가 신자유주의와 시장을 우상으로 숭배하는 이 세계를 향하여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외침이다. 소수의 이익을 위하여 생명을 함부로 그리고 손쉽게 파괴하는 이 세계를 향한 가장 강력한 항거의 근거를 제공해 준다. 예수의 복음 선포에서 생명을 구원하는 것은 그 어떤 것에 우선적 가치를 갖고 있다. 인간 생명의 구원은 안식일 실현에 앞서 있다. 예수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인간 생명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예수는 자신을 진리와 생명의 길이라고 말하면서 이 세계에 풍요로운 생명을 주기 위하여 왔다라고 말한다. 그의 부활 역시 죽음에 항거한 생명의 승리와 죽음의 피해자들의 회복으로 이해될 수 있다. 예수의 윤리적 영성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생명을 보호하라. 삶을 살라 그리고 살 수 있도록 협력하라.”를 외치게 하고 있다.

8. 억압적 권력의 윤리의 비판과 대안으로서의 약함의 윤리적 영성
(독재적 권력을 향한 비판과 대안으로서)

권력에 대한 유혹만큼 강력하면서도 섬세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유혹은 없을 것이다. 아담의 후손들을 향하여 손짓하는 유혹들 가운데서 권력에 대한 유혹만큼 인간관계를 파괴시키는 유혹도 드물 것이다. 그리스도교적 삶의 분야에 있어서도, 권력(그 권력이 자신의 직분에서 올 수도 있고 또한 어떠한 영적인 카리스마에서 오는 권력일 수도 있다)은 개인의 이익을 위하여 사용되어 질수도 있으며 많은 경우 성서구절과 신학적 뒷받침을 동반하는 ‘경건’이라는 옷을 입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목적을 위하여 사용되어지는 권력, 비록 그것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용되어지고 있을 지라도 그것은 악마적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에덴동산에서 하느님과 동일하게 되려고 하였던 아담과 하와의 시도를 계속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권력 남용에 대하여 예수는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30 그는 부패한 권력을 비판할 뿐만 아니라 무시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예수는 독점적이고 폭력적인 권력의 대안으로서 섬김과 약함의 신학을 소개한다. 예수는 승리적인 메시아니즘에 동의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다윗의 전통에 의한 메시야 칭호를 달가워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메시야 됨’을 고난 받는 종의 모습과 동일시하고 있다. 그는 자신을 출애굽, 예언자, 지혜서 그리고 시편의 영성적 전통 등과 같은 종교적 전통의 선상에 두고 있다.

9. 충돌과 예언적 비판의 영성(경제적 종교 비판, conflictive spirituality)

충돌과 갈등은 예수의 윤리적 영성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34 예수가 살던 당시의 사회는 다원화된 사회였으며 또한 여러 분야에서 갈등의 요소를 다분히 소지하고 있었다. 예수는 당시 사회의 갈등에 대하여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대응하기도 하였고 심지어는 갈등을 유발함으로서 문제의식을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35

예수의 갈등유발 혹은 충돌은 여러 측면에서 발생하고 있다. 그는 민중의 자유를 위한 정치권력을 향한 도전과 충돌, 정의를 위한 경제 권력과의 충돌, 인간과 믿음 공동체의 자유를 위한 종교권력 및 공식신학과의 대결, 여성의 존엄성과 주체성을 위하여 가부장적 사회와 충돌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자신을 포기하는 하느님에 대하여 도전적 질문을 던짐으로서 하느님과의 인격적이고 깊은 관계에 대하여 성찰하도록 한다.

이렇듯 예수는 수많은 질문과 충돌, 그리고 갈등을 유발시키면서 당시의 사회에 도전하였다. 예수의 해방적 영성을 진심으로 따르고자 하는 교회는 욕망의 사회를 향하여 질문을 던지고, 대결하며 충돌하고 갈등을 유발시키는 시도를 포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시급하게 회복 되어야 할 목회적 기획과 시도는 이 같은 충돌, 예언자적 비판과 갈등유발의 영성을 반드시 포함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10. 비-양립성(Incompatibility)의 윤리적 영성
(하느님의 나라와 맘몬 사이에서)

예수의 가르침에서 하느님과 돈(맘몬)의 비-양립성(Incompatibility)은 매우 과격하게(radical)하게 주장되어 왔고 이에 대한 어떠한 예외도 용인되지 않았다. 이러한 생각은 단지 원리로만 주창되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의 제자들에 의해서 실천되어졌다. 제자들은 가난한 자의 삶을 살아야 했고 필요 이상의 어떠한 물건의 소유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들은 거주할 장소도 마땅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늘 떠돌이로 살아야만 했다. 

그러나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보여 주었던 비-양립성은 후대 교회에 의하여 왜곡되어졌고 “만족의 문화”에 안주하는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그 실효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현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나라와 맘몬 사이에 존재하는 비-양립성에 대한 성서적 그리고 역사적 교훈을 소홀히 하고 말았다. 그러한 의미에서 물질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과 신앙의 선배들의 실천적 삶에 대한 역사적 교훈의 빈혈증을 앓고 있다. 우리들은 물질에 관련한 교회의 풍요로운 가르침과 경험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물질과 부가 가져 올 수 있는 위험에 대한 예수의 경고를 무시하고 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복음서의 가르침을 왜곡하여 물질적인 번영이야 말로 하느님의 복의 명백한 증거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에 반해 가난이라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성실의 대가라고까지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번영의 신학’이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려고 오신 ‘예수의 복음’의 가르침을 얼마나 왜곡하고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돈-신의 개념을 완벽하게 제거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절대적으로 물질주의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회가 물질적인 목적의 실현을 향한 개인의 욕망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someone)’가 되기 위해서는‘무엇인가(something)’를 갖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무엇인가를 소유하기 위한 과정에서 이웃의 존재는 쉽게 무시되거나 소홀해 진다. 이러한 가치관이 오늘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가치관들이 오늘의 경제 시스템을 유지하고 강화 시키는 것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물질소유에 대한 성서적 가르침을 회복시키려는 노력은 시급하다. 우리는 오늘 인간 존재의 경제적인 면과 관련되어 있는 인간의 시도의 배후에 자리 잡고 있는 근본적인 동기가 무엇인가를 성찰해 보아야 한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들의 삶의 스타일이 무엇인가를 성찰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가장 가난한 사람들과의 연대를 포함한 하느님의 나라의 가치관들과 오늘의 우리의 삶이 얼마나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는 가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맘몬 사이에 존재하는 비-양립성에서부터 출발되어 질 것이다.

11. 친절과 품음의 윤리적 영성

친절은 인간존재의 인간화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요소이다. Leonardo Boff는 “Otro mundo posible”(가능한 다른 세상)라는 저서의 서문에서 “무엇이 세계화 현상으로 하여금 인간의 얼굴을 갖게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그는 4가지 덕목을 열거하면서 이 덕목에 기반을 둔 윤리적 영성을 발전시키지 않고서는 그 어떤 인간의 관계는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적이 되지 못하며 또한 그 어떤 세계화도 인류에게 유익하지 않으며 인류의 미래를 위한 약속이 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이스라엘은 나그네와 외국인 환대를 자연스러운 의무로 여기고 있었으며 그러한 가치관은 이스라엘 사회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창세 18,1-6, 19,1-11, 판관 19,1-30) 나그네 환대의 거부는 하느님의 강력한 처벌 대상이 되었다. 나그네와 외국인 환대는 신약의 복음 전통에서도 핵심적인 가치로 나타난다. 여러 차례에 걸쳐서 예수는 환대는 하느님나라의 중요한 덕이라고 가르친다. 그의 종말론적 비유에서 나그네 환대는 인간의 구원의 가장 핵심적인 판단 기준으로 등장한다. (마태 25:31~46) 나그네와 작은 자들에 대한 거부는 예수 자신에 대한 거부로 간주된다.

보프는 친절함의 덕목을 실현하기 위하여서 그 기초로서 “다른 사람들”(Others)의 “되찾음”을 언급한다. 경쟁을 복음으로 여기고 그것으로부터 출발하여 모든 체제를 형성하고 있는 오늘의 욕망의 시대에서“다른 사람들”은 설 자리를 갖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은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고 사라지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을 잃어버린 욕망의 시대의 극복을 위한 대안적 모델은 “다른 사람들”을 회복하는 친절함고 받아들임의 영성으로부터 시작되어 질 것이다.

잃어버린 “다른 사람들”의 회복을 위한 친절과 받아들임의 영성을 위한 보프의 제안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기에 여기에 인용해 본다. “세계화의 현장에서 친절함과 받아들임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많은 장애에 접하게 될 것이다. 다양한 한계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장애와 한계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기서 몇 가지 실현되어 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몇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1. 무조건적인 실천 의지 배양하기 2. 풍요로움으로 다름을 받아들이기 3. 다른 사람의 소리에 신중하게 귀 기울이기 4. 솔직하게 대화하기 5. 정직하게 거래하기 6. 공동체를 위하여 이기적인 관심을 포기하기 7. 의식적으로 책임 있는 행동하기 8. 용감하게 자신의 생각과 의견의 상대성을 인정하기 9. 지혜롭게 상황의 변화를 도모하기” 

12. 하느님나라를 향한 유토피아적 윤리적 영성

윤리, 영성, 희망 그리고 유토피아는 그리스도교와 분리되어 질 수 없는 중요한 개념들이다. 특별히 윤리적 영성은 ‘좀 더 나은 세상’의 실현을 위하여 구체적으로 행동하도록 우리를 부추기는 요소들이다. 희망은 윤리적 영성 그리고 유토피아를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러한 요소들의 조합을 우리는 예수의 생애에서 발견한다. 윤리적 영성의 사람, 예수 그는 희망을 가진, 꿈꾸는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부활을 통하여 희망 자체가 되었다.

예수는 그의 생애를 통하여 늘 ‘하느님의 나라’의 유토피아에 대하여 희망을 걸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유토피아적인 희망과 꿈 을 버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유토피아적인 희망과 꿈을 포기하도록 종용하고 있다. 오늘의 상황은 우리가 원하던 그렇지 않던 현 체제만이 현실에서 가능한 유일한 것이 아닌가라고 주장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정치사회 행동을 통해서 변혁시키려는 노력보다는 현 체제에 순응하고 적응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옳은 행동이라고 주장한다. 각 개인의 경제활동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함으로 신자유주의 체제를 더욱 발전시키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우리로 하여금 희망을 상실하게 만든다.

만일 자본주의 체제가 인류가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인류는 숙명적으로 맘몬 신의 지배 하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인류는 착취와 불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 앞에서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예언자적인 상상력’(Walter Brueggemann)을 동원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예언자적인 상상력’은 우리로 하여금 생명의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바탕으로 미래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설정하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고 있다.

예언자적 상상력과 유토피아적 꿈에 대한 포기는 우리로 하여금 맘몬에 의해서 조작되어진 현 정치 사회경제체제에 대하여 대항하는 의지와 능력을 상실하게 만들 것이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예수가 꿈꾸었던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꿈을 꾸어야 한다. 우리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렇게 해야 한다. 신자유주의가 종언을 고하면서 혼란기에 접어들고 있는 요즘과 같은 시기야 말로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꿈을 살려내는 좋은 기회가 아니겠는가.

 

[출처] <사건과 신학> 

홍인식
NCCK 신학위원, 한국기독교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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