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내 몸 안에 잉태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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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내 몸 안에 잉태하도록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2.01.23 21: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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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변방에서 마주친 풍경]-1

새해를 그리스도와 함께 준비하는 대림절과 성탄절에 귀한 책을 만났습니다. 레가스베르트 그레샤케의 <낮은 곳에 계신 주님>(분도, 2021)입니다. 그레샤케는 “신앙으로 삶의 여정을 채워 나가는 신앙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느님이 이루어 주시는 영원하고 복된 완성”이라고 말합니다. 복된 완성이란 “나는 살아있지만 이미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십니다”(갈라 2,20)라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일신비주의자였던 안겔루스 질레지우스처럼 “나는 마리아가 되어 하느님을 낳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겠지요.

그리스도를 낳으려면, 변방으로

샤를 드 푸코의 영성을 따라 살았던 알베르 페리게르(1883~1959)는 이렇게 말합니다.

“더 이상 우리는 없습니다.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사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한번 사람으로 사실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통해 다시 한번 육화하시고, 다시 한번 구원을 이루시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푸코는 그리스도께 기도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육화를 우리 안에서 이루소서. 당신의 전 생애를 우리 안에서 펼쳐 내소서.’”

우리 몸으로 그리스도를 낳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느님께서 이 세상 끝자리로 오셨듯이, 우주의 중심에서 유다의 변방 갈릴래아의 나자렛으로 가셨듯이, 우리도 세상 끝자리, 낮고 가난한 변방으로 가야 합니다. 여전히 신음소리가 가시지 않고, 참혹한 고통 때문에 희망이 절박한 사람들에게 가야겠지요.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2013)에서 “우리는 모두 자신의 안위를 떠나 용기를 갖고 복음의 빛이 필요한 모든 ‘변방’으로 가라는 부르심을 따르도록 요청받고 있다”(20항)고 말합니다. 복음을 전하려고 길을 나서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말과 행동으로 다른 이들의 일상생활에 뛰어들어 그들과 거리를 좁히고, 필요하다면 기꺼이 자신을 낮추며, 인간의 삶을 끌어안고 다른 이들 안에서 고통받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몸을 어루만지”(24항)라고 하십니다.

실천적이고 실효성 있는 신앙

이렇게 복음서와 신앙의 선배들과 교종께서 가리키는 지점은 명확한데, 우리들의 삶은 흐릿한 좌표 안에서 갈팡질팡하기 쉽습니다. 충분히 여물지 않은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이때마다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어떤 사건을 통해 또렷하게 이정표를 보여주곤 합니다. 첫 번째 이야기, 군대를 다녀와서 복학한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겨울이었습니다. 인천 제물포역 근처에서 우연히 대학 동기를 만났습니다. 서강대 사학과 김윤경, 그녀는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인천 주안공단에 취업을 해 ‘위장취업자’로 현장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방에서 앉아 커피를 시켜놓고 서로 근황을 묻게 되었지요. 그녀는 노동운동을 하고 있었고, 나는 졸업 후 신학교에 갈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당시에 예수회를 마음에 두고 있었으니까요.

그녀는 “제발, 신학교는 가지 말라”고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종교는 관념론이고, 인민의 아편이라는 것이지요. 그녀는 나의 앞날을 정말 걱정하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해방신학’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그녀를 설득할 수는 없었습니다. 반갑게 만나 우울하게 헤어졌습니다. 며칠 후 친구한테 연락이 왔습니다. 윤경이가 며칠 전 자취방을 옮겼고, 첫날밤에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때 그 먹먹함이란, 무어라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녀에게 나의 신앙을 해명할 기회가 사라졌습니다.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원과 해방으로 이끌 ‘실천적 신앙’만이 그녀와 나를 다시 만나게 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 나는 신학교에 가지 않았습니다. 졸업 후 첫 직장은 천주교사회문제연구소였고, 이곳에서 ‘노동헌장의 한국적 적용에 관하여’라는 주제로 심포지엄 원고를 준비하면서 ‘노동신학’에 마음이 꽂혔습니다. 얼마 후 필리핀에 회의차 갔을 때, 그곳에서 노동사목을 하던 에밀리아나 수녀를 만났습니다. 수녀님에게 “노동신학에 관한 자료를 얻을 수 있을까요?” 물었지만, 대답대신 돌아온 질문은 “어느 노동자가 당신한테 신학을 요구하던가요?”였다. 나는 글을 쓰기 위해 학구적 질문을 하였지만, 수녀님은 신학이 노동자들에게 도움이 될지 묻는 실천적 질문이었습니다. 그날 내가 깨달은 것은 ‘노동자들이 자기 삶의 현장에서 하느님에 대해서 발음하기 시작할 때, 그들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게 노동신학’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신학을 하기에 앞서 노동자들에게로 가야 했습니다. 그들과 더불어 일하고 웃고 떠들면서, 그들과 더불어 슬픔과 고통에 잠기고서야 한 마디 할 수 있는 게 아니냐, 생각했습니다.

세 번째 이야기, 가톨릭노동청년회(JOC) 출신 선배들이 만든 부천공단의 작은 의자공장에 취직했습니다. 레자를 끌어당겨 타카로 박음질하는 단순작업, 그 지루한 시간을 양희경이 진행하던 라디오 음악방송으로 견뎠습니다. 밥벌이 노동 한가운데서 얻은 결정적인 깨달음 하나, 작업장에선 오후 서너 시가 되면 공단 다방에 커피를 시킵니다. 종업원 ‘아가씨’가 커피 다섯 잔을 시키면 여섯 잔을 가져옵니다. 그이가 5~6분 머물다 가면 작업장에 생기가 돋습니다. 공장에서 형제들을 다시 살게 하는 힘을 그이는 지녔습니다. 그 순간 그이는 구세주였고, 실효성 있는 사랑을 주고 간 것입니다. 내 사랑도 그이만큼 주변에 에너지를 나누어 줄 수 있다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노동자들에게 관념은 힘이 없습니다. 사랑은 효과적이어야 합니다.

현장에서 다시 만날 그리스도

그 후로 나는 노동사목전국협의회에서 간사로 일하고, 잡지를 만들고, 인터넷언론도 하고, 시골에 가서 농사도 짓고, 가난한 이들의 당장에 필요에 응답하고 세상의 평화를 위해 헌신하려는 가톨릭일꾼운동을 하고 있지만, 줄곧 생각하는 것은 “현장에서 나누는 실천적이고 효과적인 사랑”입니다. 이 지점에서 지금도 매번 실패하고 수시로 넘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여전히 현장을 찾아가 ‘그리스도를 나의 몸 안에 잉태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변방에서 그분을 다시 만나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 이 글은 <경향잡지> 2022년 1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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