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끼 호랑이와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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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 호랑이와 할머니
  • 장진희
  • 승인 2022.01.23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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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희의 [가난이 살려낸 것들]

"여자 혼자 사는 집에 남정네를 끌어들여어?"
"아이고, 할머니. 그게 아니라......"
"밖에 트럭이 서 있는디, 동리 사람 다아 쑤군대것당게."
"친구가...... 그런다 해도 할머니, 그러시면 안되지요."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늦게까지 술 한 잔 하느라 햇살이 창호지 문을 뚫고 들어와 앉았는데도 눈을 뜨지 못하고 있던 내 귀에 띄엄띄엄 들리는 소리는 대충 그런 내용입니다.

키득키득 웃음이 나옵니다. 내가 끌고 다니는 트럭을 대문 앞 바깥마당에 세워 놓았는데 할머니는 트럭 주인이 여자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모양입니다. 졸지에 친구가 아침부터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할머니는 안채 주인입니다. 시골에서 살고 싶어 하던 친구가 몇 년 동안 자리를 잡지 못하고 다니더니 드디어 정말 좋은 집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오래된 고가의 사랑채인데 본채와 사랑채, 문간채가 안마당과 사랑마당을 사이에 두고 석 삼(三)자 모양으로 차례로 자리하고 있어 딴 집이나 다름없습니다.

바깥마당에서 대문으로 들어오면 담장길을 거쳐 오른쪽으로 사랑채 문이 있고 정면에는 본채로 들어가는 두 번째 문이 있습니다. 지금은 그 문은 막아 두고 안마당 옆 담을 터서 본채 대문을 따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남쪽에서도 독특한 구조의 고가입니다. 옛날에는 한 가락 했던 집안이었을 것입니다. 자식들이 돈이 많았다면 진즉에 싸그리 쓸고 양옥으로 새로 지었을 판인데 이렇게 귀한 고가가 남아 있다니, 가난이 살려준 집입니다.

친구는 오래 사람이 살지 않던 사랑채를 수리해서 전기세만 얼마씩 내기로 하고 혼자 사는 할머니와 '두 지붕 두 가족'으로 각각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한껏 게으름을 부리고 어제 저녁 넣어놓은 군불로 아직 방구들 따땃한 이불 속에서 눈만 굴리며 가만히 누워 있습니다. 편안하고 낯익은 기운이 도는, 그러면서도 멋드러진 작은 방입니다. 낮은 천장과 벽을 한지로 바르고 격자 무늬 문에도 창호지를 발랐습니다. 문고리 옆에는 마른 단풍잎도 서너 장 붙여져 있습니다. 잘 닦인 오래된 기둥나무에서는 이 집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온기가 배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오래 비어 있던 집을 이렇게 깔끔하고 멋지게 단장하기까지 친구는 돈도 공력도 꽤 들였을 것입니다. 마음이 포근해집니다.

몸만 쏘옥 빠져나와 마루에 앉습니다. 동남동 방향의 사랑채 마루입니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돌담과 문간채 지붕 너머로 개울 건너편 마을숲이 보입니다. 조선소나무 키 큰 가지에 떠오르는 해가 걸려 있습니다. 햇살이 참으로 따듯합니다. 마주 보고 있는 산은 커다란 범종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산 이름이 아미산이랬습니다. 아늑하고 아름다운 마을입니다.

하품을 늘어지게 하고 사지를 뻗어 기지개를 켭니다. 친구가 안채 쪽으로 살짝 터져 있는 돌담 밑으로 돌아 나옵니다. 멧돼지처럼 씩씩대는 폼입니다.

"저 할머니 정말 못 말려어!"
"히히히. 내가 남장을 해줄까? 헤엠! 목소리를 깔아줄까?"
"아니, 내가 이 나이 먹어서 남자를 끌어들이니 마니 하는 소리를 들어야 쓰것냐고오! 남자가 왔으면 오히려 할머니가 반가워해야 할 것 아니야? 씨이!"
"친구! 어떻게든 노처녀 신세 좀 면할 방법이 없나 했등만, 다 틀렸네? 저런 꼰대가 지키고 있으니. 흐흐흐! "
"저 할머니 당신이 스물한 살에 과부 되어서 평생 수절하고 사셨대. 아니, 그건 그거고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댄데! 아, 그리고 집을 빌려 줬으면 빌려 줬지 왜 남의 집에 손님이 남자니 여자니 간섭을 하시냐고오! 내가 그랬지. 요새는 며느리도 사생활 간섭하면 싫어한다고!"
"엥? 스물한 살에 과부가 되었다고? 자식은 몇인데?"
"으응, 남매 딱 둘... 남편이 빨치산 하다 저 임실 회문산에서 총 맞아 죽었대."
"그래. 여기 순창이나 임실이나 같은 산맥이지."
"옛날로 보면 대갓집 아니야? 남편이 좌익 하다 그렇게 갔으니 오죽했겠어? 이래저래 어지간히 시달리면서도 이 집 놓지 않고 자식들 키우려고 무진 애를 쓰셨든가 봐. 종갓집 맏며느리 자리 안 뺏기려고 아주 당신 단속을 철저히 하셨대. 완전 열녀문 감이었더라는데. 그리고 지금도 당신 손에 흙 묻히며 푸성귀 같은 건 기르셔도 힘 쓰는 일, 삽 드는 일 같은 건 절대로 손수 안 하셔. 여자 할 일 남자 할 일 따로 있다면서 꼭 돈 주고 사람 사서 일을 시킨다니까. 젊어서도 그랬대."
"<토지]> 나오는 서희 할머니 같으네."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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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 밑으로 사랑마당은 할머니가 손수 가꾸는 온갖 푸성귀들이 자라는 텃밭이 되어 있습니다. 양쪽 담 쪽으로는 이런저런 꽃나무들이 크지도 작지도 않게 자라고 있는데 돌담과 어우러져 참 곱고 아늑한 집을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사랑마당 건너 문간채 앞에 진홍색 명자 꽃이 탐스럽고 예쁘게도 피어 있습니다. 문간채에는 사람이 살지 않지만 그래도 지붕은 새로 단장을 해놓아서 험한 모습은 아닙니다.

문간채 쪽으로 다가갑니다. 명자나무 가까이 가서 새끼 쳐서 나오는 게 있는지 살펴봅니다. 에미 나무 밑으로 서너 가지 대꼬챙이만한 어린 나무가 보입니다. 삽을 가져다가 어린 나무 하나를 캐냅니다. 집에 가져가서 심어야겠습니다.

"할머니 보면 큰일나아! 자기 것 손대면 싫어하셔!"

친구가 걱정을 합니다.

"괜찮아! 원래 씨앗은 나누는 거랬어. 새끼 나무 하나 떠간다고 나무랄 사람 아무도 없어. 어차피 에미 나무에 치어서 자라지도 못할 거고, 떠다 환한 데 심어주면 저 나무는 신났지 뭐."
"하긴, 여기 심어져 있는 푸성귀 나보고 마음대로 따먹으라고 하셔. 요새는 이 무공해 야채 솎아서 실컷 먹고 산다니까."
"여기 문간채도 깨끗하네? 지붕이랑도 새로 했나 봐?"
"으응, 안채 지붕 새로 하면서 사랑채랑 문간채랑 다 같이 했는가 봐. 70년대 박정희 때 지붕개량 하면서 스레트로 한 뒤 몇십 년 만에 새로 한 것이겠지?"
"요새는 저렇게 기와 모양 나는 것으로 많이들 하데. 검정색 칼라강판인가?"
"참! 재밌는 얘기가 있는데, 새마을운동 때 지붕개량 한다고 저 문간채를 열어 보니 세상에, 새끼 호랑이 네 마리가 있드래."
"으잉? 칠십 몇 년에? 그럼 그때까지 이 동네에 호랑이가 살았다는 얘기네?"
"그렇지. 이 할머니가 수절과부로 그렇게 사는데 어디 마실 갔다 달 없는 밤에 집에 돌아올 때면 호랑이가 불을 비춰 주드래. 호랑이 눈에서 나오는 인광은 왜 손전등처럼 멀리까지 비출 수 있다며?"
"후와! 호랑이가 할머니 수호천사네에?"
"응! 그 호랑이가 비어 있는 문간채에 새끼를 낳아놓은 거지. 그런데 그때 지붕개량 한다고 온 사람들이 새끼 호랑이들을 발견하고는 그냥 꼬리를 잡고 빙빙 돌리면서 잡아 죽이게 생겼드래. 그래 할머니가 호통을 쳐서 멈추게 하고 치마폭에 호랑이 새끼 네 마리를 잘 받아다 그 자리에 도로 갖다 놓고는 일하는 사람들을 다 돌려보냈대."
"그래서어?"
"그래 밤에 여기 사랑채에 와서 가만히 보니까 아닌 게 아니라 그날 밤 호랑이가 찾아왔대. 처음에 두 마리를 물고 가더니 한참 만에 새벽에 와서 두 마리를 마저 물고 가드래."
"후와아! 다행이다!"
"근데 재밌는 건 할머니가 언제 점을 보러 갔더니 점쟁이가 그러드라네? '이상하다, 그 집 주위에 호랑이가 늘 다니고 있네? 일주일만이고 열흘만이고 한 번씩 찾아와서 한 바퀴 휙 둘러보고 가고, 둘러보고 가고, 그러네?' 그렇게 말하드래."
"호랑이가 아직도 할머니를 지켜준다고?"
"할머니가 그 얘기를 하면서 그러시는 거야. '아, 암껏도 모르는 점쟁이가 그 말을 하는디 나는 알것드라고, 그 호랑이 새끼들인 거여. 근디 내가 이런 말 하믄 사람들이 미쳤다고 흉보것제? 그럴 리는 없것제?' 저 할머니 말씀은 그렇게 하시면서도......"
"우와! 최근까지 순창에 호랑이가 있었다아? 말 되는지 안 되는지 모르것네. 그래 뭐랬어?"
"으응, 그래 내가 할머니한테 이렇게 말씀드렸지. 할머니! 그 새끼가 새끼를 낳아서 할머니 은혜 갚느라고 그럴 거예요. 세상 일이 어디 사람이 아는 일만 있나요? 아마 분명히 지금도 할머니 지켜드리고 있을 거예요."
"와아! 친구. 훌륭하네, 훌륭해. 정말로 할머니한테 그렇게 말씀드렸어?"
"그랬더니 저 할머니 얼굴이 환해지며 '그러까아?' 하고 웃으시는데 정말로 좋아하시더라고."
"잘했네, 잘했어. 그나저나 할머니 혼자 속 끓이고 계실지 모르니까 내가 얼굴이라도 비쳐드리고 와야것네."

안채 정재에서 마루로 올라서는 할머니를 멀리서부터 부르며 다가섭니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아래채에 놀러온 친구예요."

할머니 얼굴이 반기다 놀라다 헷갈리다 묘해집니다.

호랑이가 문간채에 새끼를 낳았을 때도 내가 새끼를 캐낸 명자나무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이 명자나무를 보면 호랑이와 할머니가 두고두고 생각날 것 같습니다. 꽃도 예쁘니 좋은 자리에 심어서 잘 가꾸어야겠습니다.

처음에 가지치기 해서 심었던 '호랑이 새끼 나무'가 엊그제 내린 봄비 맞고 파랗게 이파리를 새로 피워내기 시작합니다. 친구 집 문간채 앞에 있던 에미 나무가 눈에 선합니다. 이 새끼 나무도 언젠가 그렇게 자라 탐스럽고 예쁘게 꽃을 피워줄 것입니다.

 

장진희
돈 안 벌고 안 쓰고 안 움직이고
땅에서 줏어먹고 살고 싶은 사람.
세상에 떠밀려 길 위에 나섰다.
장터로 마을회관으로.
곡성 죽곡 보성강변 마을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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