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을 던지려면 잘 보고 던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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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을 던지려면 잘 보고 던져라
  • 이원영
  • 승인 2021.12.20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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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영 칼럼

투석형

IS라는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단체가 득세하던 때 투석형의 장면이 언론이나 유튜브를 통해 공개되었는데 너무도 끔찍해서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투석형이란 사형제도가 있다. 모인 회중이 죄인을 정죄한 후 돌을 던져 죽이는 형벌이다. 돌팔매에 쓰이는 돌은 물수제비 뜨는 아담하고 예쁜 모양이 아니다. 죽일 목적으로 던지는 돌이라 성인 남성의 주먹에서 어린 아이 머리 크기만하다. 투석형은 공개처형으로 시행된다. 회중에게 두려움을 줘서 사형수와 같은 죄를 짓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공개적으로 이루어진다.

근동의 문화를 담고 있는 성경에도 투석형과 관련된 내용이 있다. 레위기 20장과 신명기 (13, 17, 21, 22장)에 투석형에 해당되는 죄의 목록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요약해 보면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저주하거나 이방신 숭배, 둘째 간음, 수간, 강간, 동성애와 같은 성적 문제, 셋째 부모의 뜻을 거역하고 저주했을 때 투석형에 처했다.

 

투석형을 시행하는 이유

성서 속에는 투석형을 명문화만 하지 않고 실재로 시행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여호수아 7장).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정복 초기에 예리코 전투에서 승리한 후 전리품을 얻게 된다. 이 전리품은 야훼의 집 곳간에 두기로 하였다. 하느님은 물질을 탐하는 신인가? 물론 아니다. 초기 전투에서 승리 후 노획한 전리품은 국가의 조직을 운영하는 초기 자본으로 봐야 한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다. 아칸이란 자가 시나르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벌, 은 이백 세켈, 금 오십 세켈을 취한다. 세켈은 약 12g의 무게단위다. 환산하면 은 2400g, 금 600g이다. 시나르산 외투는 종교의식에서 입는 보석 장식의 겉옷이라고 한다. 그렇지 않더라도 상당한 값어치가 있는 옷이다. 아칸의 부정행위로 이스라엘은 다음 전투에서 패한다. 결국 이 사실이 밝혀지고 아칸과 그의 가족은 투석형에 처해진다.

개인적으로 전리품을 착복한 것이 얼마나 큰 영향이 있었길래 전쟁에서 패하고 그 결과 온 가족이 투석형에 처해졌을까? 나는 성서가 기록하지 않은 여백의 이야기를 상식선에서 추측하고 싶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처럼 아칸의 부정행위는 알게 모르게 입소문을 탔을 것이다. 이런 행동은 주변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다음 전투에 참가할 때 전쟁에서 싸워 승리하는 것보다 전리품 챙기는데 혈안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공공의 재산을 착복하는 일은 공동체의 신뢰를 깨뜨리는 일이 된다.

투석형에 해당되는 죄에 대한 설명과 아칸의 이야기를 통해 투석형이 시행하는 이유를 이해하게 된다. 종교는 공동체가 추구하는 정체성과 법칙이며 정신적 일치를 고취시킨다. 성은 공동체의 번영과 확장을 주고 부모 공경은 사회적 질서와 복지를 보장해준다. 이 세 가지의 영역이 지향하는 바가 한 가지 있다. 상호신뢰다. 서로가 서로를 신뢰할 때 공동체는 내부의 결속을 다지고 외부의 적을 물리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공멸이다.

아칸의 이야기를 통해서 볼 수 있듯 신뢰가 깨진 공동체는 전쟁에서 패할 수밖에 없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투석형은 공공의 이익을 지키고 상호신뢰를 다짐하며 공동체를 결속시키기 위해 시행한 것이다.

투석형을 중지시킨 예수

그리스도인이 아니더라도 알만한 명문이 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요한복음에 기록된 이 말은 간음 중에 잡혀온 여인을 두고 투석형을 시행해야 하는지 예수와 논쟁하는 이야기 속에 등장한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율법에 따라 간음한 여인은 돌로 쳐야 한다. 간음한 여성에 대한 혐오와 종교적 열광에 빠져 소란스러운 군중 앞에 예수는 땅에 글을 썼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과 함께 땅에 쓴 글을 보고 모인 이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고 예수와 여인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자리를 떠났다. 투석형은 공동체의 신뢰를 세우는 제도다. 예수도 그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는 투석형을 중지시켰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 소동에는 숨겨진 의도가 있다. 당시 유대는 로마의 통치 아래 있었다. 로마의 속주인 유대는 로마의 법을 따라야 했다. 이런 배경에서 유대 율법에 따라 투석형이 이루어진다면 이를 주도한 사람은 살인교사이고 투석형에 참여한 이들은 살인공모에 해당된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이란 종교지도자들은 이 소동으로 예수를 시험했다. 투석형을 선택하면 로마 실정법에 따라 살인자가 되고 투석형을 거부하면 율법을 부정하는 죄인이 되는 함정이었다.

예수를 고소할 조건을 얻기 위해서 조작된 사건이다. 간음은 그 특성상 은밀하게 이루어지기에 현장을 목격하기 쉽지 않다. 그런데 종교지도자들은 간음현장을 어떻게 목격했을까?

먼저, 잡혀온 여성은 윤락여성이다. 이 사건의 말미에 예수는 여성을 향해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한다(요한 8,11). 여러가지로 해석할 수 있지만 이 사건만 두고 볼 때 성을 파는 직업적 윤락여성이라고 생각된다. 윤락여성이 성을 팔기 위한 장소는 정해져 있다. 다시 말해 간음이 늘 벌어지는 현장이 공공연하게 알려져있다. 그러므로 잡혀온 여성은 간음죄로 잡기 쉬운 사람이었다.

두 번째로, 간음은 혼자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여성만 잡혀왔다. 윤락여성이 성을 판다고 해서 사람이 많은 대로나 광장에서 일하지 않는다. 성을 사기 원하는 사람은 알지만 은밀하게 이루어진다. 이런 조건에서 여인만 잡혀왔다는 것은 간음의 정황을 조작한 이들과 간음의 조건을 만들어 준 남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종합해 보면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를 모함하기 위해 이 소동을 계획했고 그 목적을 위해 한 여인을 도구화한 것이다. 이 소동에서 간음은 스스로 행한 것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조작된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하느님의 아들이 어떻게 여인을 정죄하고 돌을 던져 사람을 죽이는 투석형을 시행할 수 있을까?

정쟁을 위해 희생된 여성

얼마 전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이재명의 공동상임선거대책위원장으로 조동연 씨가 거론되었다 자진사퇴했다. 조동연 씨는 혼인상태에서 혼외관계로 임신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도덕적 논란에 휩싸였다. 이에 대해 한 아이의 엄마로 부도덕하게 비치는 자신의 과거를 아프게 고백했고 이재명 캠프를 떠났다.

나는 이 사건이 정쟁의 목적으로 조작되었다고 확신한다. 조동연 씨는 군생활을 했기에 개인사가 노출되기 쉬운 여성이다. 군대와 같은 남성중심의 조직에서 여성이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언론을 통해 계속해서 보도되었다. 대부분 업무적 동료가 아닌 성적 대상으로 여겨 성폭력에 시달리는 일은 다반사라는 부정적 이야기들이다. 성폭력을 당하면 쉬운 여자, 문란한 여자와 같은 수식어가 붙어 어려움을 겪는다. 이런 문화 속에서 조동연 씨의 개인사는 분명 왜곡되고 확장된 주홍글씨가 따라다녔을 것이다. 이런 장벽 앞에서 유리천장을 뚫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한 여성이 조동연 씨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런 사람을 대상으로 벌어지는 언론의 조리돌림은 멈춰야 한다.

나는 이 사건과 현사실을 보고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 후보인 이재명을 낙선시키기 위한 정쟁과 대선에서 승리가 주목적이며 조동연 씨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재명을 꺾기 위해 한 사람을 무참하게 밟고 해체해도 되는 것인가? 자기 이익을 위해 한 사람과 한 가정의 아이에게 언론이란 돌을 던지고 부도덕이란 낙인을 찍고 나팔을 부는 대중에게 절망을 느낀다. 권력을 얻으려는 목적만으로 인간의 얼굴을 잃은 정치를 혐오하게 한다.

돌을 던지려면 잘 던져라

앞서 투석형의 목적은 공동체의 결속과 상호신뢰라고 했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결속을 흔들고 신뢰를 깨뜨리는 것은 법의 공정성이다. 법의 공정성이란 사법부의 법리적 해석, 행정부의 법치에 기반한 집행, 입법부의 공공의 이익을 위한 대변과 법 제정다.

그런데 검찰과 판사는 법리적 해석이란 괴변으로 기득권의 범법행위를 가리고 상식을 무너뜨린다. 국회의원은 기득권과 제 밥그릇을 채우기 위해 법의 울타리를 치고, 행정부는 보신주의로 법을 집행하지 않고 있다. 사실을 알려야 할 언론은 제 이익에 따라 진실을 왜곡시키고 선동한다. 이렇게 볼 때 돌 맞을 자는 누구인가?

덧니:

어제는 참 쓸데없는 짓을 했다. 초면에 정치적 입장이 다른 이와 언성을 높이며 논쟁을 벌였다. 이야기 속에 논점은 없고 고집과 감정만 교차했다. 대응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지만 조동연 씨에 대한 욕설에 뚜껑이 열리고 말았다. 나는 그의 욕설과 비방이 도덕적 우월주의와 정치적 혐오에 의한 돌팔매질로 여겨져서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이재명이냐 윤석열이냐, 민주당이냐 국민의힘이냐, 선택을 논하자는 것이 아니라 정치에는 정도가 없는지 묻고 싶다. 잘잘못을 묻고 따지는 일이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목적과 방향이 합당한지 되짚어야 한다. 돌을 던지려면 제대로 던져야 한다. 불분명한 돌팔매질은 헛된 분쟁과 반목만 낳는다. 시민이 깨어있어야 하는데 주체적 사고 없이 언론에 휘둘리고 제 편인 듯 위장한 정치권력에 놀아나니 답답하다.

 

이원영 
노동이 기도요 기도가 노동인 삶을 추구하는
포천 사는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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