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당신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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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당신밖에
  • 최태선
  • 승인 2021.11.28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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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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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는 일이 없다. 그저 집 안에서 주부가 해야 하는 일들을 한다. 한심하기 이를 데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사람들이 이런 나를 목사로 인정하기 싫어한다는 것도 잘 안다. 그래서 어떤 교회에서는 이런 내가 자신들의 주일설교에 설 수 없다고 한다.

나는 어제도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글을 썼다. 그러나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내가 무위도식하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의미를 뒤집으면 예수님께서 나의 왕이시라는 의미가 된다.

주님이신 예수님은 나의 왕이시다. 주님이 나의 왕이 되시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된다!!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진실이다. 아니 진리라고 해도 된다. 주님이 나의 왕이 되시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된다. 주님 앞에서 그리스도인은 존재 자체가 소멸된다. 바오로 사도는 그 사실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나의 왕이시라는 고백이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왕이 되시면 나는 없어진다. 나는 내가 아니라는 고백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아가 사라진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렇게 자아가 사라진 그리스도인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된다.

그러나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된 사람을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여긴다. 그런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면서도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입으로는 “나는 없어도 주님은 언제나 있다”고 찬양을 한다.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인지부조화이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우리 시대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칼릴 지브란의 책 <반항하는 정신>에는 이단자 칼릴의 이야기가 나온다. 칼릴은 이단자가 아니다. 칼릴은 철저하게 예수 정신으로 살고자 한 신실한 수도사였다. 그러나 그는 수도원에서 쫓겨난다. 그가 한 말이다.

“못난 백성들의 눈물은 잘난 당신들의 거드름피우는 웃음보다 더 아름답고, 가난한 이웃을 돕는 저들의 소박한 마음씨는 이 수도원 곳곳에 세워지고 걸려 있는 우상들보다 더 거룩하며, 걸인이나 창녀를 측은히 여기고 동정하는 저들의 따뜻한 한 마디 말은 우리가 매일같이 빈 말로 허공에다 뇌이는 긴 기도문보다 더 숭고한 것입니다.”

그가 한 말을 잘 생각해보라. 그가 하는 말이 우리 시대 교회를 향해 하는 말 같다. 연인원 십만 명이 모였다는 어느 교회의 특별새벽기도회가 생각난다. 수도원 곳곳에 걸려 있는 우상이라는 단어가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성공하고 세상의 인정을 받기를 원한다. 사실 교회의 그런 사고가 김장환 목사와 같은 목사를 만들어냈고, 그 사람은 전재용 같은 이들을 목사가 될 수 있게 돕는다. 나는 극동방송에서 신학생 전재용을 그의 아내와 함께 김장환 목사님이 직접 인터뷰하고 있는 사진을 보았다.

그러나 어디 김장환 목사님뿐인가. 그런 목사님들이 총회 정치판을 흔들고 그것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 각종 기독교 단체를 만들어 그곳의 장들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그들은 커진다. 세상의 인정을 받든 못 받든 그들을 거들먹거리게 만든다. 그들이 커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커진 만큼 그리스도의 왕의 자리는 축소된다. 아니 그리스도의 왕 되심 자체가 부정된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나는 비로소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나는 작아지고 작아져서 마침내 그리스도 안에서 소멸되어야 한다.

생각해보면 내가 아무 일도 하지 못한 것이 주님의 은총이다. 내가 무슨 일이라도 해냈다면 나는 오늘의 내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박사 공부를 못하게 하신 것도, 큰 교회를 이루어내지 못한 것도, 어떤 기억할만한 희생도 하지 못한 것도 다 주님의 인도하심이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기 전까지 내가 한 모든 일은 왕이신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행위가 될 수 있었을 뿐이다. 그러니 얼마나 큰 은혜인가. 그래서 나는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감사하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보고 눈물을 흘리고 가난한 이웃을 돕는 소박한 마음을 내게서 보는 것은 얼마나 큰 영광인가.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고 그분이 나의 왕이시라는 징표가 아닌가.

칼릴의 이야기가 내게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결국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를 왕으로 섬기는 사람들을 쫓아내는 곳이 되었다.

나는 지금 담임목사는커녕 어느 교회의 협동목사도 아니다. 참 희한한 것은 이런 나를 주님이 치매노인들을 위한 예배를 인도하시게 하신 것이다. 이 일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아이러니를 느낀다. 나는 신학교 때부터 내 설교를 들으려면 대학 물 정도는 먹어야 한다거나 강남에서 교회를 하셔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내 설교가 지적이거나 교양을 필요로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내가 치매노인들을 위해 설교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곳에 가면 내가 준비한 설교 원문은 필요 없어진다. 노인들의 반응을 따라가다 보면 매번 원고와는 상관없는 다른 설교를 하게 된다.

역설적으로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나는 그 일을 통해 커질 수가 없다. 비록 코로나 때문에 그분들의 손을 잡아주지 못하지만 설교 따위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내가 그분들을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고 긍휼히 여기는가가 그곳에 가는 내가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볼품없고 냄새 나고 정신마저 온전치 못한 그분들을 섬기게 하신 나의 왕이신 주님은 얼마나 위대하신가.

그리스도께서 나의 왕이 아니시라면 이 모든 것은 헛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의 왕이시라면 이 모든 것은 세상 그 어떤 일보다 존귀하다.

그래서 나는 샤를 드 푸코와 시몬 베유와 같은 사람들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

“하느님 아버지, 이 몸을 당신께 맡겨드리오니 당신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저를 어떻게 하시든 감사드릴 뿐, 저는 무엇이나 준비되어 있고 무엇이나 받아들이겠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제 안에서 이루어진다면 이 밖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푸코의 의탁의 기도다. 시몬 베유의 헌신의 기도는 이보다 한층 처절하다.

“이 몸과 영혼을 갈가리 찢어 당신을 위해 쓰게 하시고 제게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하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분들에 비하면 나는 아직도 너무나 위대하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이분들의 기도문을 주님께 드리며 진짜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만들어주시기를 왕이신 주님께 읍소한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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