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처럼 하면 걱정할 것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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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하면 걱정할 것 없습니다
  • 서영남
  • 승인 2021.11.27 19: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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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남의 민들레국수집 일기
사진=서영남
사진=서영남

코로나 19로 노숙하는 손님들은 가녀린 목숨 겨우 이어갑니다. 전에는 컵라면으로 요기할 정도의 뜨거운 물을 구할 수 있었는데 어렵습니다. 몸살이 나도 쉴 곳이 없습니다. 제대로 밥을 먹어본 지도 아득합니다. 조그만 보금자리를 하나 만들고 싶은 꿈을 꿉니다.

2003년 4월 1일 민들레국수집을 시작할 때를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웃었습니다. 정말 세상 물정 모른다고 하면서 웃었습니다. 아무도 찾아올 것 같지 않은 화수동 야트막한 고갯마루의 작은 집에 민들레국수집을 열었습니다. 여섯 명이 앉을 수 있는 식탁 하나 놓았습니다. 너무 좁아서 등받이가 없는 간이의자 여섯 개를 간신히 놓을 수 있었습니다. 국수 여섯 상자를 준비했습니다. 그렇게 보잘것없게 민들레국수집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처럼 한다면 모든 것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오로지 열정뿐이었습니다. 돈이라고는 아주 조금 있었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소년처럼 가지고 있던 삼백만 원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산 확보할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선한 사람들의 개인적인 희생으로 하루하루를 살기로 했습니다. 왜냐면 피터 모린과 도로시 데이가 1933년 가톨릭일꾼운동을 시작하면서 그렇게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규칙도, 규제도, 회원도, 위원회도, 기본재산도 없이 4반세기 동안 존재했던, 그리고 조직의 기술과 세속적인 경고가 담긴 충들을 애써 거부했던 가톨릭 노동자는 거의 같은 시기에 시작된 진지하게 기획된 대다수의 여타 운동들보다 오래 지속되었다.“(피터 모린, <푸른혁명>)

조그만 민들레국수집에 배고픈 손님들이 끝도 없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 손님들은 참으로 착한 사람들이 입니다. 자기보다 더 배고픈 사람에게 양보합니다. 자기보다 더 배고픈 사람을 걱정합니다. 겨우 하루 몇천 원 버는 사람이 반찬값에 보태라며 전부를 내어 놓고도 적어서 미안해 합니다. 지난 19년의 세월 동안 손님을 대접하는 게 부족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넘쳐났습니다.

살다보면 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어떤 일이 터져도 사실 가난하기로 작정하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어려워진다 해도 처음 민들레국수집 시작할 때보다 어려워질 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겨자씨앗처럼 보잘것없는 것으로도 공중의 새들이 깃들일 정도로 큰 나무가 되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 눈에 놀랍게 보입니다.

이반 일리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환대가 존재하려면 사람들이 그 둘레에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있어야 하고, 그래서 사람들이 피곤해지면 거기서 잠도 잘 수 있어야 합니다. 유명 인사라든지 학력이 높은 고상한 사람이라든지 그러한 관념이 개입되는 곳에서는 환대는 깊이 훼손당합니다. 내 생각으로는, 우리의 희망이 달려있는 한 가지 단어를 골라야 한다면 그것은 환대라는 말이 될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문지방과 테이블과 참을성, 그리고 귀 기울여 듣는 습관을 회복하면서 환대의 관습을 부활하여, 거기로부터 덕성과 우정의 묘판을 만들어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동체의 재생을 향하여 빛을 발산하게 될 희망 말입니다.“

민들레국수집은 다시 꿈을 꿉니다. 환대의 정신이 살아있는 작은 공동체를 시작해보고 싶습니다. 목포의 우진장 여관처럼, 노숙을 했던 우리 민들레 식구들 중에서 몇 명이 중심이 되어서 환대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래 전의 수도원처럼 나그네를 환대하는 전통을 되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손님들이 거리에서 노숙을 하다가 몸살이라도 나면 편히 쉴 수 있는 곳이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셨다지요. 지금 문밖에서 비 맞고 추위에 떠는 자가 바로 당신이라고, 그분은 이제 사람들 가운데 있을 것이며,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고, 슬픔을 거두어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어둠은 새벽 빛살에 이슬처럼 사라지고 가련한 인생들에게 풋풋한 생기가 돋아날 터입니다.“(피터 모린). 며칠 전입니다. 고마운 분께서 꿈을 이루는 데 종자돈이 되었으면 한다면서 턱없이 부족해서 미안하다고 하면서 거금을 보내주셨습니다. 하느님의 꿈은 이렇게 이루어지나 봅니다.    

 

서영남 베드로
민들레국수집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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