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경제학은 해체의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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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경제학은 해체의 대상이다
  • 최태선
  • 승인 2021.11.07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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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내가 쓰는 글의 주제 가운데 가난과 돈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나 그런 글들은 예외 없이 인기가 없다. 만일 내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가난과 돈에 관한 글을 쓰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인인한 가난과 돈에 관한 글을 쓰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시금석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글을 쓸 때마다 나는 내가 또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거나 사람들의 빈정거림이나 저주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만큼 저항이 심한 것이다. 이명박 장로는 ‘경제’를 화두로 들고 나와 대통령이 되었다. 그런데 그가 경제를 화두로 들고 나온 것은 이명박 개인의 사고가 아니라 오늘날 개신교 그리스도교 전체의 사고를 반영한다. 그것은 그리스도교 전체의 세계관이 세상의 세계관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주의의 태동이 개신교로부터 유래했다는 사실은 정설이 되었고, 당연히 개신교는 자본주의를 성서적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종교개혁으로 자본주의가 태동되었다면 종교개혁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야 마땅하지만 종교개혁을 독립기념일이나 해방의 날 정도로 생각하는 개신교 신자들은 그러지를 못한다. 결과적으로 경제를 화두로 삼았던 장로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개신교 전체가 경제를 하느님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사진출처=SBS뉴스
사진출처=SBS뉴스

윤석열은 국힘당의 대통령 후보로 확정된 후 이재명의 기본소득을 경제학에서 보지 못한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예전의 이건희가 생각난다. 그는 대기업이 초과이득을 중소기업과 나누어야 한다는 정부의 의견에 그런 정책은 경제학 책에서 본 적이 없다는 말을 했다.

그런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다. 그렇다면 그들이 모든 경제학 책들을 다 보았다는 말인가. 경제학자들의 관점이 얼마나 다양한가. 자신이 경제학이란 의미인가. 유수한 경제학자라도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결국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을 볼 수 있는 확증편향을 이 사람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그렇게 자신의 사고의 틀에 갇힌 사람이 다양한 사회의 의견을 수렴하고 그것을 조정할 수 있는가. 그런 사고를 가진 사람이 사회적 약자들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가. 당연히 없다. 그들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희생양은 어쩔 수 없다는 사고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런 그들이 미래를 말한다면 그 말의 의미는 희생양 정도는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시대가 달라졌다. 과거에는 그런 방식으로라도 빈곤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정당하게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런 방식은 허용되지 않는다. 우리 시대의 문제는 빈곤퇴치가 아니라 양극화이다. 양극화의 심화는 사회 공멸의 위기를 초래한다. 결국 그들이 말하는 더 나은 미래라는 것이 사회는 물론 지구 공멸의 위기를 초래하자는 것이라는 사실을 유권자들은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경제학자들은 현실에 무지하고, 동시에 현실을 은폐하는 학문에 기초해, 인류와 지구를 파멸로 모는 무책임한 작업에 종사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경제개념을 파괴하고, 비판적 재구성 작업을 진행하려 한다. 경제가 학문으로 등장한 현 시대에 이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 그 작업은 수학의 전제가 아닌 인간학과 역사의 전제에 근간한다. 현대 경제사상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수학 모델은 반성 없는 결과물일 뿐이다.”(엔리케 듀셀)

엔리케 듀셀은 라틴아메리카의 철학자이다. 우리는 여기서 엔리케 듀셀이 라틴아메리카의 철학자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갱들과 독재자들과 무질서가 난무하는 라틴아메리카를 후진국이나 무시해도 좋은 나라들로 가볍게 여기기가 쉽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는 인류를 위한 타산지석이 되어야 한다. 서구 제국주의가 식민지통치를 통해 라틴아메리카에 심은 것은 거대한 희생의 체제였다. 유대인 홀로코스트와는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원주민들이 희생되었고 그 희생의 결과가 오늘날 라틴아메리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희생과 고난의 역사를 통해 깨닫게 된 그들의 철학이 진정한 철학이고 그들의 성찰이 진정한 종교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가 하는 말을 곱씹어보면 오늘날 경제학은 해체의 대상이다. 코로나와 기후위기와 동식물 종種의 멸종이 바로 그 증거들이다. 더 이상 지구는 인간의 탐욕이 원하는 만큼의 생산과 발전을 지원할 수 없다. 지구는 눈물을 흘리며 신음하고 있다. 그런데도 경제를 신성시하는 것은 무지를 넘어 악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신자유주의자들의 인간과 지구를 향한 그런 맹목적 태도는 도덕성 부재의 소산이 아니다. 오히려 지배 경제 구조가 약탈하고 유린한 결과물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엔리케 듀셀은 엄정한 잣대로 그것을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엔리케 듀셀의 판단에 동의한다. 그러나 나는 경제를 단순히 탐욕의 학문이나 이데올로기 정도로 환원하는 것에 반대한다. 그 실체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 실체가 바로 맘몬이다. 나는 경제학과 이데올로기의 배경으로 존재하는 맘몬의 아우라를 바라본다. 그것이 바로 우리 시대를 장악하려는 맘몬의 거대한 아우라이다.

이건희도 윤석열도 자신들이 맘몬의 종이 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들의 정체성을 발견해야 하는 것은 경제학자도 철학자도 아니다.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 이들은 오직 하느님 백성들뿐이다. 내가 가난과 돈에 관한 글을 쓰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나는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이런 글을 쓰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시대의 예언자들이 되어야 한다. 단순한 예언자들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경제방식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이 일에 실패한다면 하느님의 창조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지구 이외의 다른 행성에서 하느님 나라의 역사가 이어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에서라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고민은 경제가 아니라 창조와 지구 종말이 되어야 한다. 잘 생각해보라. 복음이 무엇인가. 온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경륜이다. 하느님 백성은 하느님의 꿈을 마음에 새기고 하느님의 정의를 위해 사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이 하는 일은 단순히 영혼구원이나 개인구원이 아니다. 온 세상과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경륜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 건설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 그리스도인 개인의 이기적인 목적이 개입될 여지는 없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는 정도가 아니라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종말을 앞당기고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일군의 목사들이 윤석렬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는 것과 같은 일들처럼 아이러니하고 슬픈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그런데 그런 일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어제도 집과 땅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팔아 목사들의 발아래 가져다 놓아야 할 때라는 내용의 글을 썼다. 그것이 얼마나 황당하게 들릴지를 나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그렇게 황당해지지 않으면 더 이상 인류의 미래는 없다. 이솝 우화에 등장하는 꿀단지에 빠져 죽은 파리의 이야기는 오늘날 인류의 이야기이다. 꿀에 빠져 죽는 것을 행복하게 생각한다면 말릴 수 있는 방법은 더 이상 없다.

그러나 복음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우리 시대만의 황당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스도교 역사는 바로 그런 황당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특히 남은 자들의 역사는 황당함 그 자체라는 사실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황당한 그리스도인들만이 거대한 맘몬의 아우라를 극복하고 하느님의 창조 회복의 파수꾼들이 될 수 있다. 지금은 바로 그렇게 무모한 그리스도인들이 필요한 때이다.

“일어나서 가자.” 주님의 음성이 귀에 쟁쟁하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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