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복종운동 "나는 나의 유죄를 탄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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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복종운동 "나는 나의 유죄를 탄원한다"
  • 로살리 뤼글
  • 승인 2016.07.27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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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살리 뤼글의 <도로시 데이>-10

"모두가 민방위 훈련 때문에 지하로 갔다. 그러나 도로시는 말했다, “난 가지 않을 겁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가톨릭 일꾼운동의 숫자와 영향력은 줄어들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고 일꾼운동에 남은 사람들은 1950년대에 지적이며 영적인 결단이 심화되었다고 말한다. 인디애나 주 사우스벤드의 테리 맥커넌은 1949년을 가톨릭일꾼 공동체에서 보냈고 그 때를 “영광의 나날들”이라고 말한다.

철저한 본질주의의 지적 뿌리에 대해 생각하고 쓰는 일은 가난한 이들을 먹이고 재우는 일을 하고 있지 않을 때 일꾼에 남은 소수의 정예 팀을 사로잡았다. 그 때는 행동주의가 자리 잡히지 않았던 때이지만, 도로시 데이, 아몬 헤네시 그리고 그들의 친구들은 핵폭탄에 대한 시민들의 두려움을 완화시키기 위하여 연방민방위국이 조작한 민방위 훈련, 경보작전에 대해 정부에 도전하고 저항했기 때문에 수차례 체포되었다.

칼 메이어는 도로시를 만났을 때 젊고 이상주의자였다. 지금은 내슈빌의 그린랜드 가톨릭 일꾼 공동체에 살고 있는데 여전히 이상주의자이고 전쟁과 불의에 항의하면서 자주 감옥에 간다. 그는 이렇게 회상한다:

❧ 난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도로시를 만났다. 그 때 나는 이미 평화주의자였고 자발적 가난의 이상에 관심을 가졌다. 시카고 대학교에서 장학금을 얻었으나 1년 다니고 그만 두었다. 어디로 갈 것인가? 사람들은 큰 도시로 가고 있었고, 나도 뉴욕시로 향했다. 그리고 일을 얻었다.

나는 가톨릭일꾼 신문에서 도로시와 아몬 그리고 가톨릭 일꾼 운동을 하는 소규모 사람들의 민방위훈련 반대 기사를 읽었다. 그들은 강제 민방위 훈련을 거부하는 항의를 3년째 하고 있었다. 상황에 대해 좀 더 파악한 후, 나는 마지막 순간에 합류했다. 밖으로 뛰어나가 택시를 잡아타고 기사에게 “아저씨, 밟으세요!”라고 소리쳤다. 크리스티가에 있는 가톨릭 일꾼집의 2층으로 뛰어올라갔다. 도로시와 아몬 헤네시와 다른 사람 몇몇이 앉아 있었다. 쥬디스 말리나와 쥴리안 벡은 리빙 극단의 무정부주의자들이었다. 약 12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매우 편안하고 친밀한 분위기 속에서 모두가 담소를 즐기면서 정해진 시간에 밖으로 나가 길의 건너편 공원에 있는 벤치에 앉아 햇빛 즐기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억해보니까 도로시는 그 때 뜨개질까지 하고 있었다. 도로시와 아몬은 부드러운 대화를 할 줄 아는 탁월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나 자신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민방위훈련을 거부하는 항의에 여러분들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도로시가 나에게 말했다, “좋아요. 그러나 당신이 알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유죄라고 탄원하는 것이고, 둘은 보석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항의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법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다만 시민 불복종을 실천하고자 했다). “그런데, 당신은 반드시 이렇게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도 우리와 합류한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 때, 나는 신중한 온건주의자로부터 본질주의자로 넘어갔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 도로시는 나의 나이나 그 밖의 다른 것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곳에는 당신이 책임 있는 사람이라는 어떤 받아들임이 있었다. 당신은 스스로 선택을 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밖으로 나가 그들과 함께 벤치에 앉았고 우리는 모두 체포되었다. 그날 밤 나는 아몬과 리빙극단의 쥴리안 벡크와 함께 감방의 바닥에 누워 잤다. 아몬은 밤새도록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다음 날 우리는 법정으로 갔고 모두 유죄를 청했다. 우리는 30일간의 구류판정을 받았다. 나는 그룹 중에서 유일한 미성년자였으므로 라이커스 섬 감방으로 혼자 가야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다른 감방으로 보내졌다. 나는 도로시와 아몬이 30일 내내 나에 대해 걱정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들과 헤어져서 혼자 지내야 했다. 그렇지만 나는 잘 견뎌냈다. 무섭지 않았고,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우리는 30일을 다 살았다. 감옥에서 나오자, 나는 즉시 가톨릭 일꾼으로 달려갔고 그 이후로 나는 도로시와 아몬과 함께 지냈다.

1957년 도로시와 함께 체포되었던 사람들 중에 무정부주의 경향인 리빙극단의 쥴리안 벡크와 그의 부인이며 여배우인 쥬디스 말리나가 있었다. 쥬디스는 감옥에서 도로시와 보냈던 시간을 다음과 같이 감동적으로 말한다:

❧ 우리는 한 감방에 있었다. 도로시는 나를 보호하기 위하여 같은 감방에 있게 해달라고 청했다. 그런데 나는 노골적으로 성적인 표현을 하며 다가오는 거칠고 젊은 여성들의 시달림을 받게 되었다. 그 때 나는 지금보다 훨씬 작고 젊었으며 긴 머리에 흰 레이스가 달린 옷을 입고 있었다.

한 젊은 여인이 나를 그의 감방에 넣어 달라고 크게 떠들었다. 나한테 관심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도로시는 나에게 위험이 닥쳤다고 생각하며 보통 때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도 반박할 수 없는 선언을 했던 것이다: “그 여자는 내 감방에서 한 발자국도 못 움직여요.”이런 모습은 정말 뜻밖이었다. 도로시는 보통 조용하고 감옥 속에서도 겸손한 자세로 지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단호했다. 바위처럼 단단했다!

이제 신학적으로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겠다. 도로시는 이 공격적인 여인 때문에 나를 그의 감방에 넣어달라고 청했다. 그 일이 있은 후 여인은 석방되었다. 며칠이 지난 후 그 여인의 사진이 신문에 실렸는데, 배에 총을 쏴서 죽었던 것이다. 그는 다시 헤로인을 복용했고, 그 사실을 직면할 수 없어 자살했다.

도로시는 이 소식을 듣고 즉각 그 여인을 위하여 기도했다. 그리고 그 때 자기가 끼어들지 말았어야 했다는 말을 했다. 만일 내가 그 여인의 방에 들어갔더라면, 그 여인을 돌볼 수 있었을 것이라고 도로시는 생각했다(물론 이것은 도로시 자신의 관점이다. 나는 잘 모르겠다). 도로시는 이 사건에서 끼어들지 않는 교훈을 배웠다고 느꼈다. 그는 이 사건이 그의 잘못이었다고 말했다.

정치적 행동주의에는 외관상으로 보기에 갈등이 있다(물론 성인들의 경우에는 모든 갈등들이 사랑 속에 분해된다). 우리는 단계를 밟으며 결정을 하는 행동가들과 하느님이 일하시도록 허용하는 어떤 정적을 지니고 있는 행동가들 사이에 있는 갈등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한 걸음 옆으로 물러서서 고통을 보며 이렇게 말하는 침잠의 모습이다, “할 수 있을 때에 나는 고통을 막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다른 한편 고통은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기도 하다.”

도로시는 아나키스트였다. 그와 나의 유사점은 우리가 모두 행동주의자이며, 아나키스트로서 동지라는 점이었다. 나의 극단(리빙극단)은 우리가 우리의 삶을 무정부주의적인 방식으로, 보다 인간적인 방식으로 꾸려나갈 수 있다는 희망에 대해 표현하는 극단이다. 그리고 나는 도로시와 이런 정신을 공유했다. 감옥에 있는 동안 내내, 도로시는 무정부주의가 거룩함이라는 것을 나에게 가르치기 위해 애썼지만, 나는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무정부주의와 거룩함 사이에는 많은 갈등, 대립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행동주의와 거룩함 사이에 또한 행동주의와 무정부주의 간에도 갈등을 느끼게 되었다.

무정부주의는 행동 지향적이다. 도로시는 모든 사람이 문제라고 볼 수 있는 일을 일어나게 하기 위하여 길거리로 나가 민방위 항의를 했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사람들이 갈등에 대하여 인지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길거리에서 햇빛을 받으며 앉아있었던 것이다. “이건 내 길이고 나는 나의 동료인간이 나를 죽일 것이라고 두려워하기 때문에 지하 구멍 속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런 사고 구조에 동의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러한 행동은 적극적인 결정이며 사회전체에 도전하는 자세이다. 또한 갈등을 일으키는 결정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이 민방위훈련에 참여하기 위하여 지하로 들어갔지만 도로시는 말했다, “난 가지 않을 것이다.” 매우 강력한 의지의 행위였다. 그런 의지의 행동으로 그는 모든 사람이, 교회까지 포함하여, 그에게 하기를 바라는 대로 하지 않는 대립을 일으킨다. 그런 여성과 함께 고립되어 있다는 것, 그런 영혼에 가까이 있다는 것은 큰 특권이요 경이로움이었다. 아름다운 체험이었다.

그러나 갈등이기도 했다. 난 그런 공포스러운 장소에 있어 본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추함에 둘러싸여 있었다. 사람이 만드는 인위적인 추함 그리고 그 이상이었다. 900명의 여성들, 그 중에 800명은 매매춘 여성들이고, 700명은 약물중독상태였다. 온통 고통과 비참 그 자체였다. 인간의 정신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가 어디이며, 가장 극한적인 고통이 어떻게 표현되는지 이 두 가지가 동시에 드러난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도로시는 금방 감옥에서 전설이 되어갔다. 밖에서는 언론발표와 피켓시위가 이어졌다. 모든 사람이 상황을 알게 되었고 우리는 감옥 안에서 유명인사가 되었다. 간수들 대부분이 가톨릭 신자였고, 그들은 도로시에게 와서 성서와 묵주들을 가져와 강복을 받았고 입맞춤을 했다. 사제들도 왔다. 그리고 부유한 이들은 순례하듯이 왔다.

도로시는 이 모든 것에 대해 항상 화가 나고 짜증을 냈다. 사람들이 얼마나 겉치레에 매달리는지… “19명의 필리핀 사제들이 당신을 보고 싶어 한대요,” 라는 말은 들었을 때 도로시는 화가 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들을 대면하면 그는 완전히 천상의 표정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응답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도로시는 감옥안의 이 공포스럽고 공격적이며 고통받는 여성들에게도, 할 수 있는 껏 많은 부정적인 것들을 내뱉어야 한다고 느끼는 이 여성들에게도 응답했다.

감옥에는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두려움이 있었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감호대상”이라는 기록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매해 어떤 일정한 기간 동안 감옥에 가야한다는 의미였다. 그들은 반복되는 고통의 악순환 속에 있었다. 고통이 쳇바퀴처럼 이어졌다. 그들의 할머니 조모 또 그 윗대의 어미니들처럼, 모두가 집안에 안정된 남자들이 없었다. 그래서 수많은 여성들은 매매춘이나 약물 중독에 빠졌고, 똑같은 악순환의 고통과 비참을 겪고 있었다. 그리고 감정이란 참으로 운명에 의해 기소된다. 화가 나고 희생된다. 분노와 투쟁. 어떻든, 도로시는 이런 상황에 어떤 빛을 가져왔다.

그러나 모든 여성들처럼, 우리 역시 벌거벗기고 조사를 받았다. 너무나 수치스러웠고, 불쾌한 농담들이 던져졌으나, 나의 경우 피부가 좀 단단하고 거칠었다… 도로시는 매우 오랫동안 독신생활을 해왔다. 독신 여성을 그렇게 쿡쿡 쑤시면서 몸의 안을 거침없이 부주의하게 다룬다는 것, 수색하는 사람의 존엄성에 대해서 아무런 배려도 하지 않는것 … 도로시는 며칠 동안 하혈했고, 고통스러워했다. 일이 벌어졌을 때, 나는 사무실의 바깥에 서 있었고 도로시가 고통으로 우는 소리를 들었다.

우리를 수색했던 두 명의 젊은 여성들은 의료인이거나 혹은 준 의료인도 아니었다. 그들은 수색하면서 내내 음담패설을 내뱉었다. 나는 도로시가 이런 음담패설을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존엄성이 부족한 모습을 보는 것은 정말 비참하게 느껴졌다. 그 감옥에 오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런 대우를 받았는데, 아마도 그들 모두가 형편없고 대접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근거에서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감방안의 사람들은 온 몸이 쑤셨다. 사람들은 약국에 갈 수도 없었고 침대노릇을 하는 쇳대 위에서 자야했다. 소리는 끔찍했다. 

이 좁은 영역은 엄청난 속박의 상황이었다. 여성 감옥은 3·4백명을 수용할 수 있도록 지어졌으나 900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도로시와 내가 있었던 감방은 넓이가 4.5 피트 정도였는데, 작은 침대와 그 밑으로 넣을 수 있는 또 다른 작은 쇠침대 이외에 다른 것을 놓을 수 없었다. 그 작은 쇠침대는 늘 내가 아니라, 도로시 차지였다. 당신은 성인의 고집을 이길 수가 없다. 당신이 더 편안한 침대를 써야 한다. 도로시는 그 침대를 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렇게 말할 수 없다, “자, 당신은 더 나이가 들었고 더 노약해요.”성인한테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도로시는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런 모습이 도로시 같은 사람과 상대하는데 겪는 어려움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다르다고 하는 것의 대부분은 그냥 조금 더 나은 모습일 따름이다.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도, 그저 조금 더 나은 정도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데 성인인 경우에 유일하게 지적해야 할 어려움은, 말하자면, 그가 살아가는 모습으로 질책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좋은 표양을 닮고 싶다. 그러나 나의 친구인 스티브 벤 이스라엘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 모두는 흙탕물 속에서 헤엄치고 있을 뿐이다.”

우리 모두가 우리자신의 “흙탕물”을 느끼고 있고, 우리 모두가 세상과 세상의 탐욕 두려움 분노를 느끼고 있다면… 그러다가 좀 더 높은 차원에서 이런 것들에 접근하는 사람을 만나게 될 때에, 우리들은 그들의 표양을 받아들여야 하고 매우 열심히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도 도로시를 만났을 때 그런 느낌이었고 그래서 내 자신이 성인이 되려고 애썼다. 물론 도로시는 이런 측면에 대하여 매우 신중했다. 그는 경건한 체 하지 않았다. 또한 전혀 나무랄 데가 없는 사람도 아니었다.

예를 들면, 간수를 만났을 때… 간수는 가장 불쾌하고 졸렬한 방식으로 우리와의 만남을 주선했다. 식당 한 가운데 다른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서서 대화를 듣고 있는 상황에서 말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간수는 즉각 그가 다른 죄인들과 같은 수준으로 우리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다른 그들은 다 듣고 있다. 이런 상황을 한 번 상상해 보라!

그 때 도로시는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그는 즉시 나에게 말했다, “따지지 말아요.” 그는 대화를 그런 수위에서 계속하고 싶지 않았으나, 나는 나 자신을 제어할 수 없었다. 나는 그 간수와 다투었다(사실 난 모든 사람들과 다툰다. 그리고 나는 내가 매우 기본적인 원칙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모든 사람이 이해하도록 애를 쓴다. 난 언제나 이런 식으로 한다)(웃음). 우리의 기반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그것을 일치시키려고 한다. 내가 간수하고 말을 계속하면 할수록 도로시는 중얼거렸다, “그에게 답변하지 말아요. 다투지 말아요.”

후에 도로시는 이 문제를 두고 나에게 말했다. 그리고 나도 어떤 면에서 그가 옳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곳에서 나는 나 나름대로 다루는 특징을 갖고 있다. 언제 상황에 들어가야 하고 또 언제 바깥에 남아 있어야 하는지, 언제 간섭하지 않는 것이 더 현명한지, 또 어느때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나는 도로시가 이 방면에서 특히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무엇이 인간의 고통해소에 도움이 되며, 우리의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왜 고통이 증가되는지 아는 감수성을 지녔다고 생각했다.

나는 도로시가 어떤 개념과 실천을 그 누구보다도 훌륭하게 일치시켰다고 생각한다. 그의 개념들은 평화주의 분야, 무정부주의자, 가난의 영역에까지 확대되었다. 도로시가 지닌 인간적 관대함은 가장 불쌍한 사람과 가장 훌륭한 사람을 동시에 포용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마침내 도로시가 나에게 가르치려고 했던 것을 배우게 되었다. 그것은 무정부주의가 거룩함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을 거룩한 존재로 대우할 때 이루어지는 지금 그리고 여기의 거룩함이다. 좋은 사람들과 나쁜 사람들로 나누지 않고 말이다. 

출처: <DOROTHY DAY : Portraits by Those Who Knew Her>, by Rosalie G. Riegle, Orbis, 2003. <참사람되어> 편역, 2007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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