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종의 교회개혁을 바라보며...하느님 나라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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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종의 교회개혁을 바라보며...하느님 나라를 생각한다
  • 최태선
  • 승인 2021.09.11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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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프란치스코 교종이 교회 권력구조의 근본적 개혁을 준비 중이라는 기사를 보았다. 이스라엘에서도 보지 못했던 일이다. 전대미문이라는 사실에서 선뜻 그 결과를 예견하기가 쉽지 않은 일임에 분명하다.

정저지와(井底之蛙)라는 말이 생각난다. 먼저 이 글을 읽는 분들이 흥분하지 마시기를 바란다. 특히 가톨릭 신자들께서 그러셨으면 좋겠다. 나는 프란치스코 교종이 우물 안 개구리와 같다는 것을 지적하려는 것이 아니다. 정저지와라는 말에 담긴 인간의 한계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우물 안에 있으면 우물이 모든 것이 되어버린다. 우물 밖에 아무리 큰 세상이 있어도 우물 안에 있는 개구리는 그것을 알 도리가 없는 것이 개구리의 한계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특히 인간은 자신의 사고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습관을 벗어나기 어려운 존재이다. 그래서 더 정저지와가 된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불가에서 말하는 집착이라는 지적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집착에서 벗어나려면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것은 교종도 마찬가지다. 교종은 가톨릭이라는 우물 안에 있다. 더구나 그 우물은 하나의 세상으로서 나름 완벽한 체제를 갖추고 있다. 그 세상을 벗어나기가 쉬울까. 그러므로 교종이 가톨릭의 권력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면 가톨릭이라는 우물 밖으로 나와야 하는데 밖으로 나오는 순간 교종은 가톨릭이라는 세상으로부터 분리된다. 아무런 권력을 가지지 않은 자가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정저지와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모순과 같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것을 우리에게 미루어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 나는 오늘날 가톨릭뿐만 아니라 모든 교회조직이 이스라엘의 왕정과 같다고 생각한다. 이스라엘의 왕정은 하나님이 절대 반대하신 일이다. 결과는 예견되어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갇혀 있는 세상만을 볼 수 있는 인간에겐 그런 하나님의 명령과 조언이 무용지물이다.

모세로부터 생각해보자. 모세는 강력한 인물이었다. 그는 최상의 학문과 무예와 권력을 가진 강력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을 버려야했다. 그도 역시 현실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집트의 역관을 때려죽였다. 그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그런 자신의 능력과 힘을 모두 버려야 했다. 그것을 다 버리는 데 무려 사십 년이 걸렸다. 마침내 그는 더 이상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 어떤 일을 도모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정확히 말하면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노인이 되었다. 하나님은 그가 완전히 무력해질 때를 기다리신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그런 상태가 되자 그를 부르셨다.

모세의 입장에서도 난감한 상황이었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그가 태어나자마자 귀가 아프도록 들어야 했던 그의 사명이었다. 분명 이스라엘의 구원은 모세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위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이스라엘의 구원이라는 자신의 사명을 포기해야 했다. 집착에서 벗어난 것이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자신이 너무 늙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평생을 서쪽을 바라보며 살았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기다리는 나날들이었다. 그러나 그가 완전히 노인이 되어 더 이상 자신의 목표를 자신의 목표로 삼을 수 없게 되었을 때 하느님이 그를 부르신 것이다. 그가 하느님의 부르심 앞에 주저하고 의심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을 보내시라는 말을 드릴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하느님의 계획이 담겨 있다.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모세가 더 강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무력해져야 했다. 그것도 완전히 그렇게 되어야 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전적으로 하느님께 의지하는 것이었고, 그분이 원하셨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의 능력은 더 이상 모세의 것이 아니었다. 그의 능력과 힘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그에게 있는 모든 것은 그래서 하느님의 능력이 되었다. 이것이 후대의 바울이 말한 약함의 신학이다.

그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이라는 평생의 목표를 마침내 완성했다. 이스라엘에게도 하느님 백성이 되기 위한 훈련이 필요했다. 공교롭게도 그것이 똑같이 사십 년이다. 열흘이면 건널 수 있는 광야를 그들은 사십 년이나 돌면서 하느님 백성으로서 하느님만을 신뢰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단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이집트에서 나온 모든 사람들이 광야에서 죽어야 했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인간은 자신의 우물을 벗어나기 어려운 존재들이다.

마침내 그토록 원하던 가나안 입성이 코앞에 다다랐을 때 모세는 영광의 입성을 보지 못하고 죽어야 했다. 느보산에 올라 이스라엘이 들어가게 될 가나안 땅을 바라보는 것으로 그의 사명을 완수하게 된다.

왜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는가.

이 사실이 중요하다. 이스라엘이 왕정이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 나라인 이스라엘은 권력(조직)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절대적인 힘을 가진 모세는 이스라엘에서 사라져야 했다. 그의 자리를 대신한 것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갈렙이 아니었다. 모세의 시종이었던 여호수아였다. 물론 그는 모세의 측근에서 모세를 가장 많이 보고 배운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것은 모세와 마찬가지로 힘과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자가 아니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판관기야말로 이스라엘의 통치제도로서 가장 적합한 제도라고 생각한다. 하느님 나라에는 영웅이나 스타가 없다. 엘리트란 단어는 사용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은 판관으로 가장 잘 알려진 기드온을 용사라고 한다. 그러나 그의 기사를 읽어보라. 그는 용사가 아니라 가장 겁이 많은 소심한 자였다. 그런 그를 이스라엘 구원을 위한 지도자로 택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그가 해야 하는 일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지시에 따르는 것이었다. 이 일이 쉬울 것 같은가. 아니다. 하느님의 지시를 따르는 것은 무모해 보인다. 정확히 표현하면 죽으려고 환장하지 않으면 따를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것을 따르려면 그래서 믿음이 필요하다. 기드온에게 있었던 것이 바로 그 믿음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삼백 명의 병사로 십만이 넘는 적군을 어떻게 무찔렀는가. 그것은 기드온의 용병술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이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기드온을 이스라엘의 왕처럼 만들었다. 물론 기드온은 자신은 물론 자신의 자식들도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 않을 것이라 공언했다. 그러나 그는 금 귀걸이에 무너져 결국 왕처럼 되었고 하느님 백성으로서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그에게 쌓인 금은 그에게 힘이 되었고 그는 왕처럼 되었다. 인간이 힘을 가지는 순간 어떻게 되는가를 그는 보여주었다.

판관들의 면면을 보라. 그들 중 허물이 없는 사람이 있는가를. 그러나 하느님은 고의로 그런 사람들을 당신의 나라 지도자로 일시적으로 세우시고 사용하신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이스라엘은 결코 다른 나라들과 같이 사람이 지배하고 다스리는 나라가 되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을 통치하시는 이는 오직 야훼 한 분뿐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세상이라는 우물에 갇혀 세상 나라들처럼 왕을 요구했고 결국 이스라엘은 멸망에 이른 것이다.

폭력이 없는 평화의 나라인 하느님 나라는 결코 조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조직이 되는 순간 하느님 나라는 가뭇없이 사라진다. 이 사실이 중요하다. 그러나 불행하게 교회 역시 2세기 경 그리스도인이 많아지고 주교의 권한이 강력해지면서 조직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리고 그 완성이 바로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가톨릭체제이다.

왕정인 이스라엘은 멸망하는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다. 왕정과 같은 체제인, 다시 말해 조직인 모든 교회는 멸망하는 수밖에 없다. 하나님 나라인 교회는 결코 조직이 되어서는 안 된다. 힘과 권력이 존재해서도 안 된다. 내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교회라는 우물에서 벗어나있기 때문이다.

조직인 교회의 개혁은 불가능하다. 먼저 조직이 와해되는 수밖에 없다. 교종이 그 일을 할 수 있는가. 없다. 단호하게 없다. 그렇게 가톨릭은 이어질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그래서 남은 자들의 나라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도 나는 그런 생각을 하실 수 있는 교종이 존경스럽다. 그런 가톨릭이 부럽다. 우물에서 벗어나야 남은 자가 될 수 있고 하느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내 생각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마찬가지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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