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몸으로 시를 쓰는
상태바
김수영, 몸으로 시를 쓰는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1.09.04 20: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詩여 침을 뱉어라], 김수영, 민음사, 1975

 

사진=한상봉
사진=한상봉

“나는 너무나 많은 첨단의 노래만을 불러 왔다.
나는 정지의 미(美)에 너무나 등한하였다.
나무여 영혼이여
가벼운 참새같이 나는 잠시 너의
흉하지 않은 가지 위에 피곤한 몸을 앉힌다.”

민음사에서 김수영의 산문집 <詩여 침을 뱉어라>가 1975년에 출간되었으니, 참 오래 전 책이다. 아주 샛노랗게 바랜 책갈피를 넘기며, 김수영의 숨김없는 속내를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었다. 그이의 생각에 늘 동조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김수영을 읽을 때마다 토머스 머튼의 글쓰기를 생각하는 것은 묘한 엇박자라 해야 할까보다.

김수영의 산문은 시가 낳을만한 숙연함이 사라지고, 자잘하고 조잡하고 난잡하고 안타깝고 우스꽝스럽고 아리다. 솔직하고 담백하다. 그의 산문을 보면 김수영이 누구인지 알 수 있겠다. 토마스 머튼의 글을 읽어도 마찬가지다. 굳이 <칠층산>이 아니더라도 <요나의 표징> 등 그가 남긴 영적 일기는 머튼의 빛뿐 아니라 어둠조차 또렷이 드러난다. 머튼을 읽으면 머튼을 알 수 있겠다.

머튼의 글쓰기

토머스 머튼은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들어가면서 자신이 관상적 삶으로 부름 받았다고 느꼈다. 그런 삶은 더 큰 고독과 침묵을 요구했지만, 수도원장과 영적 멘토는 오히려 그에게 글을 쓰라고 격려했다. 갈등하던 머튼이 찾아낸 결론은 “관상을 위해 사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오직 하느님을 위해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영적 수행의 길에서, 작가로서의 소명을 다시 발견한 셈이다.

머튼은 글쓰기가 자신의 침묵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아니라, 참된 침묵과 홀로 있음으로 들어가는 입구라는 걸 깨달았다. 머튼은 <요나의 표징>에서 “만일 성인이 되려 한다면 나 자신이 무엇이 되었는지를 종이에 옮겨야 하고 ... 완전과 단순성과 성실성으로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숨기지 말아야 한다.”고 고백했다.

이렇게 머튼은 글쓰기를 통해 자기 자신의 내밀한 감정과 생각들을 공적인 자산으로 만들었다. 그의 구겨진 일상과 새롭게 발견한 깨달음은 글쓰기를 하는 과정에서 이미 자신이 소유가 아니었고, 하느님을 찾아가는 구도자들이 겪을만한 혼란과 환희를 비추어 주었다. 그는 수도원에서 8년 동안 살았지만 스스로 비참하고, 죄스럽고, 떳떳하지 못하고, 아무런 전망도 없다고 느꼈다고 <요나의 표징>에 적었다. 홀로 있음이 가혹하고 어렵고 고통스러웠으며, 마침내 자신이 이제는 텅 비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느낌이다. 그 참담함의 깊이에서 머튼은 하느님과 다른 동료 인간들과 맺는 연대성을 발견했다.

나이를 먹으면 주접이 붙는다

김수영은 <詩여 침을 뱉어라>에서 자신이 불러온 첨단의 노래를 그치고 가벼운 참새같이 흉하지 않은 나뭇가지 위에 피곤한 몸을 앉히고 싶다고 고백한다. 그의 산문을 읽다보며, 사방 도처에서 시인이 갖는 순결성과 혁명적 글쓰기, 그리고 생계를 위한 글쓰기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는 1968년 부산에서 열린 문학세미나에서 ‘詩여 침을 뱉어라’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면서 “사실 나는 20여 년의 시작 생활을 경험하고 나서도 아직도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고 고백했다. 그래서 시를 계속 쓰려면 아직까지 생각했던 시에 대한 모든 사변(思辨)을 파산시켜야 한다고 했다. 시는 머리로 쓰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라 했다. 시는 몸으로,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라 했다. 김수영이 시인으로서 세상 이치에 달통한 도사처럼 살지 않고, 구체적 일상과 생계에 애착을 느꼈던 이유가 거기에 있는 듯하다.

이를테면 김수영은 ‘반시론’(反詩論)에서 “나이를 먹으면 주접이 붙는다”고 했다. 분별이 늘어나면서 술을 먹을 때도 몸을 아끼며 먹기 때문이다. 시인이 자기혐오를 느끼는 순간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나이가 들면) 젊은 사람들과 대할 때면 완연히 체면 같은 것을 의식해서 말을 함부로 하지 않게 되고 주정도 자연히 삼가게 된다. 이쯤 되면 거지가 되거나 농부가 되거나 해야 할 텐데, 그것도 못한다. 나이가 먹으면서 거지가 안 된다는 것은 생활이 안정되어 가고 있다는 말이 된다.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불안을 느끼지 않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남을 판단한다. 하다못해 술친구들까지도 자기하고 생활정도가 비슷한 사이를 좋아하게 된다.

그렇지만 항산(恒産)이 항심(恒心)이라고 생활에 과히 불안을 느끼지 않으면 정신의 불필요한 소모가 없어진다. 도시 마음을 쓸 데가 없는 것 같다. 약간의 사치를 하는 것도 싫지 않고, 남이 하는 사치도 자기의 사치보다 더 즐거웁게 생각된다. 하늘은 둥글고 땅도 둥글고 사람도 둥글고 역사도 둥글고 돈도 둥글다. 그리고 시(詩)까지도 둥글다.”

김수영은 새벽에 돌격대처럼 행인들에게 마치 복수를 하려는 듯 먼지세례를 퍼부으며 ‘광적으로’ 길을 쓸고 있는 청소부들을 본 적이 있었다. 이때 김수영은 ‘청소부들의 폭동’보다 정거장에 서있던 행인들의 무료한 표정 때문에 가슴이 더 섬뜩해졌다고 한다. 그때 김수영은 ‘거지가 되어야 한다. 거지가 안 되고는 청소부의 심정도 행인들의 표정도 밑바닥까지 꿰뚫어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재빨리 구세주처럼 다가온 버스에 올라탔다고 했다.

마음이 사정없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그런 날에는, 노모를 모시고 돼지를 키우는 동생의 농장으로 나가본다고 김수영은 말한다. 그리고 “흙은 모든 나의 마음의 때를 씻겨준다. 흙에 비하면 나의 문학까지도 범죄에 속한다”고 했다.

“붓을 손보다도 삽을 드는 손이 한결 다정하다. 낚시질도 등산도 하지 않는 나에게는 이 아우의 농장이 자연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는 유일한 성당(聖堂)이다. 여기의 자연은 바라보는 자연이 아니라 싸우는 자연이어서 더 건실하고 성스럽다. 아니, 진실하니, 성스러우니 하고 말할 여유조차도 없다. 노상 바쁘고, 노상 소란하고, 노상 실패의 계속이고, 한시도 마음을 놓을 틈이 없다.”

김수영에게 시는 바라보는 자연이 아니라 싸우는 자연 속에서 진정성을 얻는 것이었다. 김수영은 안빈낙도를 꿈꾸지 않는 시인이다. 선비들의 놀음이 아니라, 농부들의 투쟁을 닮아야 한다고 한사코 시인은 우기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아우의 농장은 “늙은 어머니의 시꺼멓게 갈라진 손”을 닮아 있다. 김수영은 이따금 불교를 믿고 있는 어머니에게 타박을 놓곤 했다. 절에 갖다 줄 돈이 있으면 반찬이나 해 잡수시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노모가 행하는 마지막 사치를 타박하고 싶은 마음이 나지 않는다고 고백했다.

“결국 내 자신의 되지 않는 문학행위도 따지고 보면 노모가 절에 다니는 거나 조금도 다를 게 없다. 어머니는 절에도 다니지만 아직도 땀을 흘리고 일을 하는데 나는 땀도 안 흘리고 오히려 불공 돈의 몇 갑절의 술값만 낭비하고 있다. 언제 어머니의 손만 한 문학을 하고 있을는지 아득하다.”

그래서 김수영은 자기 서재를 갖지 않는다고 <반시론>에 썼다. ‘배부른 시’를 쓰지 않으려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예전에는 글을 쓸 때 식구들이 부스럭거리기만 해도 신경질을 부렸는데, 요즘은 이 사람들이 훼방을 좀 놀아주었으면 생각한다. 그게 시를 쓰는데 약이 되기도 하고, 구명대 역할을 해준다고 믿는다. “잡음(雜音)은 인간적이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안방에서 시를 쓰다가 영 시끄러워 방해가 되면 일손을 멈추고 잡담을 한다고 했다. 청소부들은 거리를 쓸고 김수영은 그렇게 시를 쓴다. 문득 “저 사람은 기도방이 없어서 기도를 못한다네요.” 하던 아내의 말이 떠올라 잠시 민망해진다.

어디로 나가는 겁니까?

김수영은 시인이지만, 그의 시를 여기선 소개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가 삶의 갈피에서 건져 올린 이야기들이 모두 시처럼 읽히기 때문이다. 우리 삶에 정답을 콕 집어 말할 수 없듯이, 시는 정답을 말하지 않는다. 삶의 구비에서 파동일 일어날 때, 그 진동을 되돌려줄 뿐이다. 교과서가 재미없는 것처럼,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 무엇인가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고, 내가 만져본 만큼 느낄 것이며, 그곳에서 관상은 시작된다.

다석 유영모 선생님은 하느님을 “없이 계신 분”이라고 했다는데, 아마 시처럼 하느님도 “알 듯 모를 듯 계시는 분”이라서 안심이 된다. 그분이 나를 이념이든 교리든 집단이든 어딘가에 가두어 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사랑하기 위해 자유롭게 되라”는 말이 참으로 귀한 말씀으로 들린다.

 

<양계유감>이라는 김수영 이야기 하나 더 하고 마치려 한다. 김수영 일가는 성북동에서 마포 서강 강변으로 이사해 양계장을 열었다. 시인으로 열심히 생계형 글쓰기를 하여도 살림에 보탭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김수영 말로는 ‘내 솜씨에 무슨, 아내가 하는 일’이라 했다. 김수영은 당연히 어머니가 저보다 강하다 했다. 시인과 노모가 계사 바닥을 긁는다. 그 일을 하면서 시인은 곧잘 신경질을 냈고, 노모는 한 번도 신경질을 내는 법이 없다. 시인이 계사 바닥을 삽으로 긁다가 팔이 아파서 쉴 때도 노모는 여전히 일을 계속 하면서 네가 잡은 삽이 불편할 것이라며 당신 삽과 바꾸어 주었다. 김수영은 “어머니는 언제나 여유가 있어 보였다”고 했다.

하지만 양계가 쉬운 일이 아니다. 전염병에 사료값까지, 나중엔 시인의 원고료 벌이만큼 사정이 비참했다. 그런데 이런 집에도 양계를 하니 돈이 있는 줄 알고 도둑이 들었다. 한밤중에 아내가 도둑이 들었다고 고함을 치고, 맞지도 않는 신짝을 끌고 가보니 과연 50이 넘은 사내가 서 있었다. 헙수룩한 양복을 입고 동네 마실 나온 사람마냥 서 있었다. “당신 뭐요?” 하고 소리를 버럭 질렀지만 온순하고 맥이 풀린 것 같은 도둑은 아무 말이 없었다. “여보, 당신 어디 사는 사람이오? 이 밤중에 남의 집에 무엇하러 들어왔소? 닭 훔치려고 들어 왔소?” 말이 없는 도둑은 흉기도 없이 저도 놀란 기색이었다. 이내 시인이 말투가 존댓말로 바뀌었다. “이게 보세요. 이런 야밤에...” 그제야 그 사내는 “백 번 죽여주십쇼. 잘못했습니다.” 하고 빌었다. 말투가 퍽 술에 취한 듯싶었다.

“집이 어디요?”
“우이동입니다.”
“우이동 사는 사람이 왜 이리로 왔오?”
“모릅니다. ... 여기서 좀 잘 수가 없나요?”

김수영은 어이가 없었다. 술 취한 척 하지 말고 어서 가라고 재촉하자, 도둑은 돌아서 두어서너 걸음 가다가 뒤를 돌아다보며 태연하게 물었다. “어디로 나가는 겁니까?” 이 말은 사람이 보지 않을 때는 거리낌 없이 철망을 넘어 왔겠지만,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다시 넘기가 민망했기 때문이다. 입구는 알겠는데 퇴로를 모르겠다는 안타까움이다. 김수영은 양계를 시작했는데 접을 방법을 찾지 못하는 난감함을 이때 떠올렸다고 한다. 그이나 시인이나 삶은 그만큼 곤혹스러운 것이었다. 갑자기 하얀 런닝을 입고 찍은 김수영의 유명한 사진이 생각난다. 납득이 가는 그 사진을 떠올리며, 시인에게 낭만을 요구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 이 글은 <공동선> 2021년 9-10월호에 실렸습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종이신문 <가톨릭일꾼>(무료) 정기구독 신청하기 
http://www.catholicworker.kr/com/kd.htm

도로시데이영성센터-가톨릭일꾼 후원하기
https://v3.ngocms.co.kr/system/member_signup/join_option_select_03.html?id=hva82041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