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위로는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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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위로는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 김선필
  • 승인 2021.07.25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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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김선필
사진=김선필

요즘 막내 아이 재롱을 보는 맛에 산다. 씽긋 웃는 모습을 보면, 온갖 시름이 다 녹아내린다. 아빠가 자신을 사랑하는 줄 아는 걸까? 아이는 나한테 달려와 안기기 일쑤다. 조금씩 말문이 트였는지 대답도 곧잘 한다.

막내 아이에게 언니와 오빠가 있다는 것은 축복이자 근심거리이다. 형제가 있으니 심심할 새가 없다. 아이는 언니와 오빠를 졸졸 쫒아다니며 함께 어울리고 싶어 한다. 그 모습이 귀엽기만 하다. 언니‧오빠와 함께 어울리며 지내는 덕분일까? 또래에 비해 성숙한 모습이 자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속상한 얼굴이 된다. 나와 눈이 마주친 아이가 내 앞에 다가온다. 그리곤 울음을 터트리며 내 품에 안긴다. 어찌된 영문인지 상황을 돌아본다. 언니와 오빠가 놀이에 끼워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나이 차가 있다 보니 규칙이 있는 놀이를 언니‧오빠와 함께 하기엔 다소 어려움이 있는 것 같다.

속상할 때마다 아이는 엄마‧아빠에게 다가온다. 안심이 되는 걸까? 엄마‧아빠 품에 폭 안기면, 아이는 금방 울음을 그친다. 그리곤 방긋 웃는다. 그렇게 위로가 필요할 때, 늘 곁에서 꼭 안아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인 것 같다.

생각을 좀 넓혀보고 싶다. 그렇다면 하느님 눈에 우리 인간은 어떻게 보일까? 이사야 예언자는 다음과 같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

“너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귀염둥이, 나의 사랑이다. 그러니 어찌 해안 지방을 주고라도 너를 찾지 않으며 부족들을 내주고라도 너의 목숨을 건져내지 않으랴!”(공동번역 이사 43,4)

이사야의 예언대로라면, 하느님께서는 부모가 아이를 보듯 우리 인간을 사랑스런 눈빛으로 바라보고 계신다. 그러니 하느님의 마음은 부모의 마음과 같다.

요즘 코로나19 확산세가 무섭다. 여기저기 지쳐가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특히 걱정되는 사람들이 있다. 쉴 새 없이 환자를 돌보는 의료진들, 코로나에 걸린 사람들, 코로나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사람들,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 텅 빈 영업장을 바라보는 자영업자들. 후원의 손길이 끊겨 제대로 먹고 마시지 못하는 이들. 그들 말고도 미처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도대체 누가 그들을 위로해줄 수 있을까? 위로가 필요한 이 시대만큼 하느님이 필요한 순간도 없을 것이다. 슬픔에 빠진 아이가 부모를 찾듯, 인간은 힘들 때마다 (그 호칭이 무엇이든) 하느님을 찾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부모가 아이를 꼭 안아주듯, 하느님께서도 그들과 함께 하시며 위로를 전해주고 싶으실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홀로 일하지 않으신다. 인간의 협조를 구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인 것 같다. 요셉과 모세가 없었다면, 하느님께서는 굶주림과 파라오의 폭정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성모님께서 순종하지 않으셨다면,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되어 우리 곁에 오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 같은 보통의 부모들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의 수호천사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 같다.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이와 비슷한 말도 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돌볼 수 없어 어머니를 보내 주셨다는...

하느님의 위로는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고통 받는 이에게 내미는 우리의 손길을 통해 당신의 위로를 전달하신다. 그 손길이 많을수록 하느님의 위로는 세상에 더 많이 가닿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우리가 하느님 위로의 전달자가 될 때, 우리는 더 많이 하느님을 체험하고 그분으로부터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질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나는 하느님 위로의 전달자인가? 아니면, 이웃의 고통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이 시대의 방관자인가? 아무래도 나는 방관자에 가까운 것 같다. 이를 반성하며,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바쳤던 평화의 기도가 내 삶의 일부가 될 수 있도록 하느님께 자비를 청한다.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김선필
서강대학교 신학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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