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 데이, 관료주의를 경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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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데이, 관료주의를 경계함
  • 로버트 콜스
  • 승인 2021.06.28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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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콜스의 [DOROTHY DAY, A RADICAL DEVOTION]

도로시 데이를 존경하면서도 가톨릭일꾼운동은 적절치 않거나 이상하다고 보았던 많은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그의 사고방식을 구분하는 것은 시간에 대한 독특한 감각만이 아니었다. 특히 1930년대에 연방정부의 권위는 뉴딜 정책을 유일한 희망으로 보았던 미국의 수백만 사람들에게 거의 신성한 것으로 여겨졌다. 한편 도로시 데이는 “노예나라”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자유의지론자라는 말을 좋아한다고 선포하였다. 그러면서 “지방화 되고 자치적인 기구들”이라는 개념이 이 세계 곳곳에서 등장하고 있는 공공연한 전체주의 체제뿐만 아니라, 점점 더 주인행세를 하고 강제적인 국가통제를 감행하는 서구자본주의도 대체 할 것이라고 긴 토론을 전개하였다.

1930년대에 무정부주의는 혼란과 임의적인 폭력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도로시 데이에게 무정부주의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개인이 공동체에 가지는 증가되는 책임감이며 동시에 “멀리 떨어져있고 중앙집권적인 국가”에 훨씬 덜 의존적이고 덜 얽매이는 것을 의미했다. 과제에 대해 자유의지론적인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그에게는 지극히 중요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연방프로그램들이 긴급한 문제에 해답을 마련해주는 것 같고 꽤 빠른 시간 안에 다른 방식으로는 처치하기 어려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엄청난 양의 돈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현대국가의 권력, 즉 사람들을 한데 모으는 역량, 프로그램에 착수하는 능력, 비교가 안되는 엄청난 자원동원능력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목적은 달랐고, 그의 접근방식은 사람들의 태도, 도덕생활, 인간존재로서의 총체적인 윤리목표를 지향하였다. 그는 전체적인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 서로 함께 살아가는 방식과 태도에 영향을 미치고 싶었다.

그러나 둘이 대화를 하면서 그는 인격적인 정치의 불리함을 인정하고 있다

(*도로시 데이는 엠마누엘 무니에의 저술들을 읽었고 「정신」에 대해서, 또한 2차 대전 후 불란서에서 일어났으며 설득력 있고 철학적이며 정치적인 운동으로서 표현된 “인격주의”를 잘 알고 있었다. 인격주의 운동은 국가보다 개인을 개혁의 요원이라고 더 강조했다. 그것은 안으로부터 시작되어 바깥으로 향하는 개혁이며, 강한 도덕적 요소와 함께 사회 정치행위와 연결된 평등주의적 실존주의 같은 것이었다. 이런 운동은 분명히 오랫동안 유럽을 지배해 왔던 좌우 양파 전체주의, 국가 중심의 이념들에 대한 응답이었다).

“많은 젊은이들이 이곳에 와서 우리와 함께 일하고 나서 얼마 후에 많은 것을 배웠고 우리에게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서, 예를 들면 우리의 평화주의, 사형제도 반대, 소공동체에 대한 관심, 그리고 국가의 강압적인 권력반대 등의 문제들에 대해서 우리와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비실질적이며, 훌륭한 이상주의자들이지만 크고 중요한 문제를 향해서 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은 옳습니다. 우리 중에 한 사람이 표현하듯이 우리는 예수의 골고타 수난만큼이나 실질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이 되기 위하여 애쓰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빵과 버터와 커피, 차 한잔으로 사람들을 애타게 돕고 싶은 또다른 모금 그룹이 아닙니다.

그래요,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먹입니다; 가지고 있다면 집없는 이들에게 묵을 자리와 입을 옷을 주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이런 일에는 강한 신앙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합니다. 만일 바깥 사람이 와서 우리가 기도하는 것과 기도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그는 이 삶의 전체 의미를 놓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주 님을 증언하기 위하여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따르기 위하여 이곳에 와 있습니다. 이 애덕의 행동을 통하여 그분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곳에 와 있습니다. 되풀이 하지만, 우리는 그분의 뒤를 따르기 위하여 이곳에 와 있습니다. 전쟁과 우리동료들의 살해를 반대하고 우리가 보고 만나는 모든 것에 다가가기 위하여 이곳에 있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우리의 기술이 유용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혹은 우리가 효과적인 인도주의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방문객은 우리가 효과적인 인도주의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의 결론이라고 하면서 덧붙여 말했어요. 그는 나에게 도시, 주, 연방기관들이 우리로부터 배울 것이 많다고 했습니다. 즉 우리가 우리의 후원자들과 훌륭한 관계를 맺고 있고, 우리가 목표로 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효과적으로 다가가고 있으며 최소한의 마찰과 최소한의 관료적인 형식으로 일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 말에 감명을 받고 고맙다고 해야 했겠지요.

그렇다고 지금 말한 것처럼 그의 이 말이 고맙지 않게 들렸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두려움의 대상을 어떻게 찾아내는가는 흥미로운 일입니다. 그 남자는 나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나는 그를 모든 정부 관료들과 모든 이성적인 개혁자들의 대변자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거리에서 내쫓아 미국의 의회가 지원하는 다양한 프로그램과 프로잭트에 밀어 넣고 싶은 사람들입니다.

실제로 그는 친절하고 감수성이 있는 사람이었고, 온 마음을 다해 될 수 있는 대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많이 돕고 싶었습니다. 그는 우리들처럼 비전을 갖고 있었어요. 그는 더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더 편안한 삶을 누리도록 더 많은 법들이 돕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내가 누구라고 그의 비전이 틀렸다고 말하겠습니까? 그는 이곳에서 떠난 후 워싱톤으로 갔습니다. 나는 그가 지금은 연방기관에서 일하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지요.

한번은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농담조였지만 또한 진지했습니다­ 만일 그가 보건 교육 복지장관이 될 수 있다면 미국의 가난을 철폐하려고 노력하겠다고 말입니다. 나는 왜 그런 일을 하고 싶냐고 물었지요. 그는 알고 있는 온갖 통계숫자를 외웠고 그 소리는 어마어마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어떤 특정한 가난한 사람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숫자들과 퍼센트만 생각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나는 그에게 내가 알지 못했던 많은 숫자들과 비율이 있다고 말하면서, 미국에서 가난이 사라져도 여전히 많은 가난이 남아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문제는, 어떤 종류의 가난을 다루는가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영적인 가난 혹은 자발적 가난은 영적인 궁핍을 피하도록 사람을 돕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내 말에 어려움을 느끼는 것 같이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나는 그가 왜 그런지 알 수 있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깨달았지만, 나는 그를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서 당신이 밖의 거친 실제세계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어떤 귀엽고 작은 실험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듣게되면, 마치 쓸모 없는 어떤 황홀경에 빠져서 당신 자신이 약간 줄타기를 하는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 아니면 비난자들을 옹졸하게 쳐다보며 도대체 이 사람들이 누구이며, 다양한 법적 승리들, 큰 사무실, 그리고 대량의 할당금을 갖고서 도대체 무엇을 성취했다는 것인가 하고 자신에게 묻기 시작합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함께 공격하고 있었다. 한 순간은 현대적이고 관료적이며 비인격적인 국가와 복지기관들을 조롱하고 다음 순간에는 지나치게 냉소적인 자기자신을 비판하였다. 어느날 그는 다정하게 나를 물고늘어지며 논쟁을 걸어왔다. “당신도 여기 우리들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드네요. 솔직하게 말해보세요.” 그는 내가 프랭클린 루즈벨트와 로버트 케네디를 칭찬하는 말을 들었었다. 우리는 몇시간 동안 이 두 사람과 전반적인 미국의 정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예외적으로, 날카롭게 직선적으로 말했다:

“나는 미국인이고, 아마 노동계층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집안에서 왔지요. 나는 루즈벨트가 미국의 수백만 노동자들에게 무슨 의미인가를 알고 있어요. 당신은 1930년대에 작은 소년이었고 나는 그때 훨씬 더 나이가 들었었지요. 그리고 난 그때의 절망감을 잊을 수 없어요.

나는 1920년대에 백악관에 있었던 사람들이 아니라 그때 루즈벨트가 워싱톤에 있어서 기뻤습니다. 우리 공동체에서는 루즈벨트를 위해 기도했지요. 하지만 우리는 지난 50년 동안 교종들이 말해온 것에 대해서도 생각했고 기도했어요. 또한 예수님과 그분이 지상에 계셨을 때 하신 말씀에 대해서도 생각하면서 그분의 길을 따르려고 노력하고 있지요.

나는 뉴딜 정책에 대해 비꼬고 싶지는 않습니다. 우리 공장노동자들과 농민들이 루즈벨트와 그의 프로그램들에 어떻게 의지했는지 기억합니다. 나는 그가 노동자들을 방문했을 때 그들의 얼굴 표정들을 보았지요. 그는 그들의 구세주였습니다. 문제는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가 그들의 구세주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정책은 우리나라의 안정을 위협했던 상황에 긴급하게 응답했던 것이었습니다.

1930년대가 끝나가면서도 여전히 같은 문제들이 더 악화되었지요. 그리고 나서 전쟁이 왔어요. 당신은 전쟁과 뉴딜정책 두 가지 모두에 대해서 우리를 이해하기 힘들지요. 나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뉴딜정책 지지자들이 아니었고, 많은 가톨릭일꾼공동체 사람들은 전쟁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우리들에게 아주 어둡고 힘든 나날이었어요. 우리는 함께 읽고 말했으며 함께 기도했어요. 쉽지가 않았지요. 우리는 히틀러와 무쏠리니를 우리의 온 마음과 정신으로 반대했어요. 우리는 파시즘이 얼마나 사악한 것인가를 처음부터 경고했습니다. 한결같이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에게 열려있는 모든 가능한 방법을 다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운운하는 그 마지막 문장이 그의 말을 멈추게 했고 나는 그것을 어떤 신호처럼 느꼈다. 우리들이 이제 그리스도교적 평화주의의 본질에 대하여 맞대면하는 시점에 온 것이라고. 나는 히틀러에 대한 평화주의적 응답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염려가 되었다. 가톨릭일꾼 전통이 갖고 있는 평화주의적 측면은 대량 학살을 앞에 놓고 볼 때 언제나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증인”이라는 개념은 이해할 수 있었다. 가톨릭일꾼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적인 삶의 방식을 증언하는 사람들이었다. 더 큰 차원에서 이들의 증언은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지만 그들이 이런 원칙들을 소중하게 ­ 그 이상으로 ­ 생명 그 자체로 고수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측면이다. 그러나 도로시 데이와 그의 추종자 일꾼들은 단순한 증인들에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군사주의, 전체주의, 파시즘 그리고 공산주의를 수세기 동안의 실리주의와 실용성의 결과로, 점점 더 상승된 국가권력의 결과로, 그러나 인간의 야만적인 본능이 더 큰 합병을 허용한 또 하나의 표현으로 보았다.

 

[원출처] <Dorothy Day, a Radical Devotion>, Robert Coles, 1987
[번역문 출처] <도로시 데이, 뿌리로부터 온전히 살다>(<참사람되어>2002, 7월호)

로버트 콜스(Robert Coles)

하버드 의과대학의 정신의학과 및 사회윤리학과 명예교수. 청소년 문제 상담 전문가로 활동해 왔으며, 50여 권이 넘는 책을 집필한 작가. 1973년 미국의 다양한 계층과 인종의 아이들을 직접 취재하고 분석한 <위기의 아이들>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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