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는가?" 김의기 열사를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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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는가?" 김의기 열사를 기억한다
  • 박철
  • 승인 2021.05.31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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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칼럼
사진=장영식
사진=장영식

예수가 30대 초반 나이에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예루살렘에 오셔서 곧 십자가의 죽음과 고난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최후의 기도를 바쳤다.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정도로 전심을 다해 기도하셨다. 예수는 고난과 십자가를 피하고 싶었다. 살고 싶었다. 얼마나 두려웠을까? 그러나 예수는 자신의 뜻보다 하느님의 뜻을, 하느님이 원하시는 길을 가시기로 결심한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만 하시면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태 26,39)

김의기가 41년 전 5월 광주에서 계엄군의 잔혹한 학살 장면을 목격했을 때 나이가 22살이었다. 남들보다 학교를 2년 일찍 들어가 대학 4학년이었다. 김의기는 어떻게 하든 계엄군의 광주의 학살만행의 진실을 서울 시민들에게 알려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22살 청년이 되어서 생각해보자. 언론은 보도검열에 의해서 완전통제 되었다. 진실은 완전 차단된 상태였다. 5.17일부터 전국에 걸쳐 예비검속이 실시되어서 재야인사들도 다 숨어 있었다. 살벌하기 짝이 없는 공포의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그때 김의기는 진실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으로 5월 30일 오전 기독교회관을 찾아왔다. 그러나 막상 기독교회관에 왔는데 계엄상황에 금요기도회는 취소되었고, 장갑차 두 대가 기독교회관 정문을 봉쇄하고 있었다. 정보기관에서 나온 많은 정보원들과 총을 든 계엄군들이 왔다갔다가 하는 상황이었다. 오충일 목사님의 증언에 의하면 80년 5월 당시 기독교회관의 직원들보다 계엄군과 정보원들이 더 많았다고 한다. 얼마나 살벌했을까 그림이 그려진다. 오금이 저린다는 표현이 그래서 나왔을 것이다.

22살 청년이 감당하기 어려운 엄청난 공포가 찾아왔을 것이다. 사랑하는 부모님과 형제들, 그리고 장래를 약속한 여자친구, 학교 선후배들, 친구들이 눈앞에 어른거렸을 것이다. 김의기는 고민 끝에 기독교회관 6층 EYC사무실에서 마지막 유서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작성하고 타이프 했다.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는가? 피를 부르는 미친 군화발 소리가 고요히 잠들려는 우리의 안방에까지 스며들어 우리의 가슴과 머리를 짓이겨 놓으려 하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보이지 않는 공포가 우리를 짓눌러 우리의 숨통을 막아버리고 우리의 눈과 귀를 막아 우리를 번득이는 총칼의 위협 아래 끌려 다니는 노예로 만들고 있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날 오후 4시경 김의기는 죽음의 진상이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계엄군 장갑차 사이에 떨어져 죽었다. 얼마든지 죽음의 길을 피할 수 있었지만, 그는 민주화의 제단에 자신의 몸을 아낌없이 던졌다. 머리가 으깨지고 붉은 선혈을 쏟았다.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과 5.18을 알리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진 김의기의 죽음은 그 의미와 뜻이 일맥상통한다. 김의기가 자신의 목숨을 던져 알리고자 했던 것은 진정 무엇이었을까? 41년 전 불의한 세력들에게 포위되어 찍소리도 내지 못하는 서울 시민들을 향하여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고 외쳤다.

우리가 살다 보면 여러 가지 사회적 모순과 비리와 불의한 일들과 직면하게 된다. 그때 봐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하고 싶다. 현실과 타협할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김의기는 우리에게 묻고 있다.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사진=장영식
사진=장영식

재작년에 <JTBC>에 의해서 밝혀졌는데 5월 31일자 <중앙일보>에 김의기 투신 사망기사도 계엄군의 사전검열에 의해서 불가하다는 도장이 찍혀 보도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것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이런 가정을 해본다. 만약 김의기의 투신사건이 계엄상황이 아니었다면? 계엄군의 보도검열 없이 언론에 사실이 보도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박종철.이한열 열사같은 사회적 파급을 끼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매년 5월 5.18국립묘역을 찾아올 때마다 망월동 가는 길에 이팝나무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5.18국립묘역에는 다 피지도 못하고 죽은 5월 열사들과 5월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진 민주열사들이 묻혀있다.

우리집 큰 아들 호빈이가 6살 무렵 망월동에 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5.18묘역이 조성되지 않았을 때였다. 호빈이가 내게 물었다. ”아빠 여기 무덤이 왜 이리 많아? 이 사람들은 왜 죽었어?“ 그 질문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묻혀있는 분들 때문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고, 우리가 민주주의를 경험하고 만족하지는 못하지만, 이만큼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렇다. 41년 전 김의기가 우리에게 던진 물음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는가?“ 그 질문에 바로 답하기 위해 우리는 죽을 때까지 노력해야 할 것이다.

 

박철
탈핵부산시민연대 상임대표
샘터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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