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래기국과 된장찌개 먹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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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래기국과 된장찌개 먹는 교회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1.05.24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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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야일경(秋夜一景)

-백석


닭이 두 홰나 울었는데
안방 큰방은 홰즛하니 당등을 하고
인간들은 모두 웅성웅성 깨어 있어서들
오가리며 석박디를 썰고
생강에 파에 청각에 마늘을 다지고

시래기를 삶는 훈훈한 방안에는
양념 내음새가 싱싱도 하다

밖에는 어디서 물새가 우는데
토방에선 햇콩두부가 고요히 숨이 들어갔다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요한 6,5-13)

예수와 예수의 제자들을 초대교회까지 뒤쫓아 다니며 괴롭혔던 주제는 ‘구제(자서)’와 ‘정의’ 문제였다. “가난은 임금님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말도 있고, “역사가 지속되는 한 가난한 이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보듯이 가난한 이들과 자선, 그리고 정의라는 주제는 인류의 영원한 화두(話頭)이다. 그래서 현대교회 역시 이 화두를 비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은 어떤 해법을 가지고 있었을까.

한 아이의 손을 빌려 이루어진 기적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해서 누구나 잘 알고 있는 듯하나, 이를 실천하는 데 성공한 사람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그리 많지 않았다. 그날 예수님은 갈릴래아에 있는 티베리아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다. 요한복음서에 따르면 이날은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과월절을 맞으시기 얼마 전이었는데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기적을 보거나 이 소문을 들었던 많은 이들이 떼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아마도 먼길을 에돌아 오느라 기진하고 굶주렸을 터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사람들을 다 먹일 만한 빵을 어디서 사올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필립보가 나서서 황당한 표정을 짓는다. “이 사람들에게 빵을 조금씩이라도 먹이자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의 빵을 사온다 해도 모자라겠습니다.”(요한 6,7) 그때에 안드레아는 웬 아이가 보리빵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는 걸 보고는, 예수님께 말씀드렸다. “이걸로는 턱도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기적은 거기서 출발되었다.

한 아이가 내놓은 음식이 모든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고 열두 광주리의 부스러기를 모아들이게 만들었다. 있지도 않은 엄청난 양의 빵을 만드시는 예수님의 재주가 기적이라면 기적이겠으나, 그 많은 어른들이 주저하는 사이에 한 어린이가 제 가진 바를 모두 내놓은 사실 또한 기적이었다.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이 그 아이의 손을 빌려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고서는 하늘 나라에 갈 수 없다.”고 하셨던 것일까. ‘소창다명 소창(小窓多明)’이라 했다.

산동네에 가면 창문이 작고 낮은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들은 토굴 같은 방안에서 창을 통해 빛줄기를 이루며 쏟아지는 은총을 선명하게 체험한다. 그러나 창이 넓은 부잣집은 대낮에도 햇빛이 눈부시다 하여 커튼을 치고, 화려한 실내등으로 방을 밝힌다. 창이 있으되 막혀 있는 사람들의 마음과 창이 작되 햇빛을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의 마음은 천양지차(天壤之差)다.

예수님의 해법은 거기에 있었다. 예수님 자신이 가난한 사람 중의 하나가 되었으며, 그 제자들도 결국은 빈털터리로 갈릴래아 온 동네를 떠돌아 다녔으며, 모두가 배고픈 중생들이었지만 마음은 부자여서 가진 바를 언제나 남들과 나눌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그 재산이 드러날까 봐 내놓지 못하고 더 많은 탐욕에 눈멀기 십상이다.

세상에 물든 어른들은 그나마 있는 것을 손해볼까 내놓지 못할 때, 아이들은 사심없이 동그란 눈을 크게 뜨며 “여기에 먹을 게 있는데…” 하면서 순진하게도 복음을 실천한다. 상식적으로 볼 때, 그 아이가 내놓은 것은 보잘 것 없는 것이었으나 예수님은 상식을 뛰어넘어 기적을 행하신다.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공동체에서 부자들이 설 땅은 없다. 그들은 가지고도 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선을 하였는지 묻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행하였는지 묻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만인을 위해 재화를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이를 교회 전통 속에서는 어떻게 계승하였을까.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교부들의 해법, 자선과 정의

성서에서는 자비나 구제, 자선이라는 말이 수없이 나온다. 그러나 이런 뜻으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세다카(sedakah)는 ‘정의’를 뜻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정의란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원상복귀시키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었다. 히브리 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하면서 뜻이 뒤섞여 버린 것이다.

그래서 초기교회 교부들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어떻게 부자가 되었는지 말해보아라. 당신은 당신이 가진 부(富)를 누구에게서 받았는가? 그러면 그 사람은 또 누구에게서 그것을 받았는가? 그의 할아버지로부터, 그리고 그 사람은 또 그의 아버지로부터 받았다고 당신은 말하리라. 이런 식으로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당신은 이 소유의 정의로움을 밝힐 수 있겠는가? 물론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오히려 그 시작과 뿌리는 불의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나는 나의 것을 쓰고 있다. 나는 나의 것을 즐기고 있다.’라고 말하지 말라. 실제로 그것은 당신의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것이다.”(요한 크리소스토모)

교부 예로니모는 ‘불의한 돈’(루가16,9)이라는 예수님의 표현을 해석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모든 부는 불의에서 나온 것이므로 그가 ‘불의한 돈’이라고 말한 것은 참으로 적절했다. 한 사람이 잃어버리지 않았는데 다른 한 사람이 찾을 수 없다. 따라서 나는 흔히 쓰이는 격언이 참으로 옳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부유한 사람은 불의한 사람이거나 불의한 사람은 상속자이다.’”

바실리오 성인은 더욱 실랄하게 말한다.

“다른 사람의 옷을 훔치는 사람이 있을 때 우리는 그를 도둑놈이라고 한다. 벗은 사람에게 옷을 입혀줄 수 있는데도 옷을 입혀주지 않는 사람에게도 같은 이름을 붙여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당신 찬장 속에 있는 빵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속하는 것이며, 당신 벽장 속에서 좀먹고 있는 구두는 구두가 없는 사람에게 속한 것이며, 당신이 저축해 놓은 돈은 가난한 사람에게 속한 것이다.” 얼마나 충격적인 이야기인가.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오늘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하라고 했지 “오늘도 내일도 모레까지도…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양식을 미리 주시옵시고…”라고 가르치지 않으셨다. 그래서 암브로시오 성인은 자선은 시혜를 베푸는 행위가 아니라 정의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명백하게 말한다. “당신은 당신의 것을 가난한 사람에게 선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속한 것을 그에게 건네주고 있을 뿐이다.”

부자도 가난한 이도 없이

“하느님은 이 땅이 모든 사람들의 공동 점유(占有)가 되기를 원하셔서 그 열매를 모든 사람에게 제공하셨다. 그런데 탐욕이 점유의 권리를 흐트러 놓았다.”고 암브로시오 성인은 생각했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공동재산으로 주신 재화를, 온 세상을 혼자 살 듯이 독점하는 사람은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며, 당연히 그 재화는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져야 하느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 성인도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이 정의”라고 말한 것이다. 궁극적으로 예수님은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구별되지 않는 하느님 나라를 열망하셨다. 이를 성취하기 위해 예수님은 할 수 없이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구분하신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루카 6,20)는 축복과 “부요한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6,24)는 저주는 부자에게서 탐욕을 제거하고, 가난한 이들 가운데 새롭게 탄생하는 공동체(하느님의 나라)를 기대하셨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돈 때문에 죄를 짓고 재물을 좇는 사람은 눈이 먼다. 천막의 말뚝이 두 돌멩이 사이에 꽉 끼여들 듯이, 팔고 사고 하는 사이에 죄가 끼여들어간다.”(집회 27,1-2)고 하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대가 없이 굶주린 군중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신다(요한 6,11-12). 이렇게 하여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입에 올린 노래가 이루어졌다.

“그는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루카 1,53) 그러므로 성서에서 말하는 자선 또는 구제(救濟)란 ‘도둑맞았던 것을 원상회복시키는 정의’라는 성서의 가르침이 다시 한번 확인된다. 이제 어린아이같이 손에 쥔 빵을 나누지 않는 사람은 불의한 자들과 같은 운명의 배를 타게 될 것이다. “이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졸도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속에 들어가라.”(마태 25,41)

 

사진출처=한국일보
사진출처=한국일보

일해서 죽은 무덤은 없다

“이 할아버지가 원하셨던 것은 결코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서 하인을 거느리고 호의호식하며 살아가는 사치스런 것이 아니었다. 초가삼간에 처자식 거느리고 들에 나가 흙을 만지며 일하는 소박한 삶이었다. 이곳 마을들을 보면 대체로 평생 농사일을 부지런히 했던 이들이 훨씬 건강하시다. 반대로 형편이 좀 나았던 노인들은 그만큼 노동을 안 한 편이고 그래서 건강하지가 못하다. 우리 속담에 ‘일해서 죽은 무덤은 없다.’는 말이 있다.

흙과 더불어 일을 하는 것이 최상의 건강비결이다. 거기다 약간씩 부족하게 사니 모든 일에 지나치지 않는다. 부자가 될수록 욕심이 생기고 과식을 하면 오히려 건강을 해치기 때문이다. 행계댁 할머니는 평생 동안 고기를 잡숫지 않았는데도 팔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지금도 지게를 지고 산을 오르신다. 할머니가 잡수시는 것을 보면 옛날 어려운 시절에 먹던 음식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한 가지 다른 것은 깡조밥 대신 쌀밥을 먹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것도 아주 양이 적고 반찬은 시래기국이나 된장찌개다. 멸치 대가리 하나 없다.

사람의 행복은 편리한 것, 풍요로운 것이 아니라 조금씩 불편하고 조금씩 부족한 것이 훨씬 행복할 수 있다. 거기다 농촌 사람들은 죄를 짓지 않는다. 죄를 지을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식구끼리 이웃끼리 사소한 다툼은 있지만 사람 살아가는 데 그 정도는 오히려 생활의 활력소가 된다. 아이들은 싸우면서 자란다고 하지 않는가.”(권정생,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슬픔마저도’, 「녹색평론」 통권31호, 7-8쪽)

이 글은 우리 교회가 다시 짚어보아야 할 여러 가지 복음적 가치를 지적하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우리 교회는 과연 어린아이의 몇 조각 안 되는 빵을 기다리기보다 부자들이 제공하는 대량의 빵에 더 관심이 쏠려 있는 것은 아닐까. 조금씩 불편하고 조금씩 부족한 교회를 못 견디고, 주차장과 편의시설을 교회에 끌어들이느라고 노심초사(勞心焦思)하는 것은 아닐까.

예수님께서는 보잘 것 없는 어린아이의 손을 통해서 기적을 일으키려고 하셨건만, 우리 교회는 미련한 제자들처럼 더 많은 돈이 있어야 더 많은 이들을 먹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백 데나리온이 아니라 이천 이만 이억 데나리온도 다 채우지 못할 탐욕 때문에 교회가 망가질까 걱정된다. 이제 교회가 소박한 삶을 회복하고, 불편과 박해를 참으며, 약한 이들을 통하여 복음선포의 사명을 다하려고 노력할 때, 그래서 말 그대로 ‘세상의 종’처럼 일할 때 활력을 잃어버린 교회에 청춘이 되돌아오지 않을까.

 

마무리 기도

세상의 눈부신 아침마다
고드름처럼 주인 없이 매달린
오늘 하루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마음을
하느님, 당신은
우리 어머니 가슴같이 덥혀 주시고,
풍족해서 남아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 속 좁은 생활을 돌이키시어
조금 부족한 듯 
조금 아쉬운 듯
조금 불편한 듯
시래기국에 된장찌개면 족할
밥상공동체를 이루며 살게 하소서.
그래야 우리 교회가 반듯한 정신으로
그래야 우리 신자들은 소박함 마음으로
그래야 모든 이들이 사랑 안에서
당신을 만나뵐 수 있다는 믿음을
우리가 지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느님.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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