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스콧 니어링, 스승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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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스콧 니어링, 스승을 만나다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1.05.10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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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콧 니어링 자서전] 스콧 니어링, 실천문학사, 2000

책장에 처박혀 있던 책을 다시 꺼내 들었습니다, <스콧 니어링 자서전>입니다. 일산의 아파트 생활을 청산하고 파주 운정지구와 가까운 한적한 곳에 목조주택을 지어 마당을 꾸미고 산지 한 해가 훌쩍 넘었습니다. 이곳에서 두 번의 겨울을 지내고 두 번째 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아담한 마당에는 배롱나무와 공작단풍, 체리와 앵두나무, 감나무와 대추나무, 화살나무와 화이트핑크셀릭스, 그리고 다양한 수종의 장미를 심었습니다. 나무들은 꽃이 피기 전에 굳은 껍질을 뚫고 올라오는 새순이 감동을 주었고, 구근식물인 백합과 수선화, 작약이 그야말로 흙에서 솟아오르는 모습은 얕은 탄성과 더불어 ‘생명’이라는 낱말의 위대함을 알게 합니다. 첫 해에 심어 두면, 다음 해에 기쁨을 선물하는 생명 앞에서 ‘정직한 노고’를 생각합니다.

스콧 니어링의 책 표지를 넘기니, “다시 스콧 니어링. 2018.2.25. 11:55pm”이라고 아내가 적어놓은 문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귀농 이후 십년 가까이 무주와 경주에서 보냈던 시간들이 다른 방식으로 파주에서 갈무리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1999년 가을 우리가 귀농을 결심할 때, 가장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책 가운데 하나가 헬렌 니어링이 지은 <아름다운 삶, 사랑과 그리고 마무리>(보리, 1997)였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천주교사회사목연구소에서 일하다 공장에 들어갔고, 노동운동 활동가로 일했습니다. 당시 아내는 봉제공장에 나는 의자공장에 다녔던 시절입니다. 그 뒤로 서강대 신학대학원에서 공부를 하면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사무국장과 격월간 잡지 <공동선> 편집장을 하다가 귀농했던 거지요.

사람의 삶이란 한 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것이어서, 저는 지금도 아무런 청사진 없이 살고 있습니다. 무주를 떠나 경주에서 서울에서 일산에서 표현예술심리치료사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으로, 지금은 <가톨릭일꾼>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정작 계획된 미래는 없습니다. 다만 지금여기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고, 그 일을 하면서 밥을 벌고 있습니다. 처음 가톨릭일꾼운동을 시작할 때 생각이라면, 벌써 환대의 집 하나쯤 뜻있는 자매형제들과 더불어 세웠을 텐데, 아직까지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웹진과 신문을 만들고, 글 쓰고 강의를 하면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전부이지요.

예전에 이현주 목사님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글 쓰는 재주뿐이라서...” 하시던 말씀이 떠오릅니다. 그래서 지금은 ‘일’에 관하여 편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얼 하자고 의도하지 말고, 당장 어떤 누군가의 필요에 따라서 저한테 다가오는 일을 성심껏 해보자고 말입니다. 제 삶에서 의도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고, 저는 그저 그분 목소리를 따라 걷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 삶의 주인이 그분이시라면, 그밖에 바랄 게 또 무엇이 있을까, 싶습니다.

저희 가족에게 삶의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던 스콧 니어링은 제 스승이었고, 그분에게도 스승이 있었다는 사실이 제 마음을 편안하게 합니다.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처럼 큰 복은 없으니까요. 먼저 스콧 니어링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출판사에서 자서전 날개에 잘 요약해 놓았네요. 그걸 옮겨봅니다.

 

스콧 니어링처럼, 시골에서 충만하게 사는

"스콧 니어링은 1883년 미국 한 탄광도시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며 자본의 분배 문제를 깊이 연구했는데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에 앞장서다 해직되었다. 그후 톨레도대학에서 근무했으나 전쟁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주장하다 또다시 해직되었다. 1917년 반전 논문을 발표하여 스파이 혐의로 기소되어 1919년 연방법정에서 피고로 섰지만, 배심원들의 30시간에 걸친 긴 숙의 끝에 무죄판결이 내려졌다.

생의 후반기로 접어든 니어링은 스무 살 연하의 매력적인 여성 헬렌 노드(지금은 헬렌 니어링으로 더 잘 알려진)를 만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처음에는 버몬트에서 그리고 후에는 메인에서 그들은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적인 생활을 했고, 겨울에 농장이 얼어붙어 농사를 지을 수 없으면 여행을 떠나고 강연을 하고 저술을 하며 지냈다. 1983년 8월 24일 100세가 되던 해, 스콧 니어링은 부인 헬렌 니어링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 그는 자신이 살아온 1백 년의 시간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진정으로 의미 있고 충만한 삶이 어떤 것인지를 실천적으로 보여준 사람이었다.”

스콧 니어링을 알기 위해 자서전을 다 읽을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몇 구절만 읽어보아도 그분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몇 구절만 우리 마음에 새겨넣고 살 수 있어도 인생이 바뀌고 세상이 달라지겠다, 생각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20년을 메인 주의 바위투성이 해안에 있는 외딴 농장에서 보냈다. 버몬트에서나 메인에서나 우리는 기본 식품과 집, 땔감을 스스로 마련하는 자급경제를 유지했으며, 일정한 목표를 정해 놓고 그것에 따라 생활했다. 우리는 가능한 시장과 임금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로 했다. 이윤을 남기기 위한 자본주의 경제는 노동력과 현금의 맞교환을 전제로 삼는다. 노동력과 교환한 현금의 일부를 세금으로 내고, 나머지는 먹을 것과 입을 것과 가재도구와 그 밖의 필수품을 사는 대가로 시장에서 지출한다. 이런 방식을 받아들이는 개인은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노동시장과 생필품시장과 국가에 맡기는 셈이다.”

스콧 니어링과 헬렌은 시골생활의 가장 큰 매력은 “자연과 접하면서 생계를 위한 노동을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갑자기 이 구절을 읽으며, 양계를 하면서 거창에 자리 잡고 사는 후배 김종일이 생각납니다. 부산에서 노동운동을 하다가 지금은 시골에서 완전 농사꾼이 되었습니다. 대학시절 제3세계신학회를 함께 하던 후배 김의열은 졸업 후 고향에 내려가 여지껏 농사를 짓고 삽니다. 무주에서 담양에서 만났던 무던한 친구 정복섭과 든든한 손길수도 있지요.

가톨릭일꾼에서 만난 안미순 님은 사과농사를 짓고, 농사꾼이면서 시인으로, 판화가로 사는 서정홍 형과 이철수 선생님에 대한 그리움이 간절해집니다. 그분들은 땅에서 좋은 몫을 택했습니다. 그분들을 뒤따라가다 돌아온 저는 도시도 시골도 아닌 곳에 머물고 있는 셈입니다. 여기에서도 제 몫이 있으리라 잠깐 나 자신을 위로해 봅니다. 그이들에 대한 찬사를 겸해서, 스콧 니어링의 이야기 한 마디 더 전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시골생활은 상아탑에 은거하는 것과는 다르다. 우리의 시골생활은 미친 세상에서 제정신을 갖고 사는 삶의 한 예이자 본보기이다. 시골생활은 사회와 접촉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자연과의 접촉방법이다. 시골생활은 이 폭력적인 세상에서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살 수 있게 해 준다. 시골생활은 기존 사회질서의 한 부분을 대신할 수 있는 바람직한 대안이며 비정상적인 정치에서 벗어날 수 있는 피난처이다. 또한 시골생활은 활동적인 사람들이 만년을 보내기에 더없이 좋은 조건이기도 하다. (동양적 인생관에 의하면 가장의 시절가 지나면 은자의 시절이 온다고 했다.) 현자나 성숙한 인간이 자신의 직업과 취미에 종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시골생활이다. 문명의 유혹과 천박함을 간파하고 이 험난한 세상에서 자존심과 품위를 지키며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갈 길을 찾는 젊은이들의 수가 점점 늘고 있는데, 시골생활은 이런 젊은이들을 위한 삶의 형식이기도 하다.”

아마 이런 이유로, 이런 꼬임에 푹 빠져서 저 역시 30대 후반에 일찍 귀농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때는 나주평야의 붉은 흙만 보아도 가슴이 콩닥거리던 시절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무모했다 싶은 구석도 있었습니다. 너무 가진 게 없어서, 시골생활이 낭만을 찾기에는 퍽 고단했던 탓입니다. 그리고 두 사람만의 천국을 꿈꿀 수 있었던 스콧 니어링과 헬렌과 달리 아이가 생기면서 이런 고민은 더욱 깊어갔습니다.

하지만 순백한 나이에 6년 동안 무주 산골에 살면서 겪은 일들은 너무 깊은 것이어서 후회는 없습니다. 산등성이 너머 초승달을 이고 아기를 업고 산길을 따라 집으로 올라가던 일들, 그리고 인적이 끊어진 임도 옆에 있는 논에서 보름달을 보면서 무논에 손모를 내던 일들,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을 따라 올라가 산 높은 분지에 누워서 떨어지는 눈꽃을 바라보던 일은 지금도 눈에 선한 기쁨입니다. 그때 그 시각에 그곳에 살지 않았다면 천만금으로도 얻을 수 없는 경험들입니다.

스콧 니어링의 스승들, 어머니 ... 그리고 톨스토이

타고난 선생이었던 스콧 니어링에게 ‘인생이란 (당연히) 배움의 여정’이었습니다. 그는 자서전을 ‘어린 시절 나의 스승들’에서 시작합니다. 미국 오하이오 주 톨레도 시의 샘 존스 시장 이야기가 앞머리에 나옵니다. 샘 존스 시장이 저명인사들과 저녁식사를 하러 호텔에 들렀을 때의 일입니다. 당시엔 호텔식당에 들어갈 때 방명록에 이름을 적는 게 관례였습니다. 맨 처음 사인을 한 유명한 목사님은 자기 이름 뒤에 ‘D.D.(신학박사)’라고 적었고, 두 번째 사람은 ‘Ph.D.(철학박사)’라고 썼습니다.

자기 차례가 오자 샘 시장은 잠시 머뭇거리다 ‘L.L.L.’이라고 적어넣었습니다. 그걸 본 신학박사가 말했죠. “잠깐, 샘. 자넨 대학 문턱에도 가 본 적이 없잖아.” 그러자 시장이 말했죠. “천만에 말씀! 난 이래봬도 ‘인생의 역경’이란 대학을 다닌 몸이오. 우리 대학 교기의 색깔은 시퍼렇게 멍든 색이요, 구호는 ‘아얏!’이지.” “그럼, ‘L.L.L.’은 뭔가?” 샘이 말했습니다. “그건 배우고, 배우고, 또 배운다(Learning, Learning, Learning)이라네.”

스콧 니어링은 샘 시장처럼 자신도 인생의 역경을 겪으면서 그때마다 스승들을 만났고, 거기서 정말 배워야 하는 것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그의 첫 번째 스승은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 미니 재브리는 균형잡힌 식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가르쳐 주었고, 자연과 모험, 역사와 전기, 소설에 이르기까지 책을 자녀들에게 읽어주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던 것입니다. 그녀가 손녀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가족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언제나 자녀들을 내 소유물이 아니라 개별적인 인격체로 여겼다.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에 나오는 이 대목을 읽어주고 싶구나.

당신의 자녀들은 당신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그들은 생명의 아들이고 딸입니다.
그들은 당신을 통하여 왔지만
당신에게서 온 것이 아닙니다.
또한 당신과 함께 있으나 당신의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 사랑을 줄 수 있으나 생각을 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의 생각이 있으니까요.
당신은 그들의 몸을 가둘 수는 있어도 마음을 가둘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은 미래의 집에 거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으로서는 꿈속에서조차도 방문할 수 없는 그런 곳에 말입니다.
당신은 그들처럼 되고자 할 수는 있겠지만 그들을 당신처럼 만들려고는 마십시오.
왜냐하면 인생은 과거로 가는 것이 아니며 어제에 머무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스승은 친할아버지였습니다. 그분은 마을의 탄광 및 벌목사업의 감독자였는데, 급진적인 사상을 갖지는 않았지만 체제 순응적인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언젠가 감리교 목사와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그 목사가 “식사 전에 기도를 잠깐 드려도 괜찮을까요?” 묻자, 할아버지는 머뭇거리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물론이오. 기도한다고 무슨 문제가 있겠소.” 할아버지는 스콧 니어링에게 과학과 기술, 토목 공학과 엄밀하게 생각하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세 번째 스승은 펜실베니아 대학 워튼 스쿨의 경제학부 사이먼 넬슨 패튼 교수였습니다. 패튼 교수는 토씨까지 받아 적어야 좋은 성적표를 받을 수 있었던 교육환경에서, 학생들에게 질문하고 토론하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상을 공유하는 학생들을 발견했을 때 기뻐했습니다. 그가 바라던 것은 “정확하게 관찰하며, 관찰한 것을 명쾌하게 묘사하고” 뜻이 통하는 사람을 발견하는 것이었습니다. “교사의 자리는 진보의 최일선”이라고 믿었던 패튼 교수는 1917년 정년퇴임을 몇 개월 앞두고, 모두가 주저하던 반전 대중집회의 의장직을 수락하는 바람에 ‘비애국적인 운동에 이름을 빌려주었다’는 이유로 해임당했습니다. 스콧 니어링은 훗날 “나는 강의실에서 그에게 배운 것 못지않게 그의 삶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했습니다.

 

네 번째 스승은 스콧 니어링이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사람, 톨스토이였습니다. 부유한 귀족가문 출신의 작가로서 명성과 부가 절정에 달한 삼십대 초반에 톨스토이는 혁명적 저항과 선동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이러한 방향전환은 자기 속한 지배계급의 실상에 눈을 떴기 때문입니다. 그가 누리던 낭만적 계급문화는 착취와 억압에 신음하는 러시아의 농민, 노동자 대중의 희생 위에 세워진 허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자신이 그 사회의 수혜자이면서도 그 체제를 비난하고, 뜻이 같은 사람들과 연대하여 기존체제를 완전히 갈아엎고 그 자리에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과 자기 지위에 대항하는 불가능한 일을 꾀했던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남을 해를 끼치지 않는 삶을 희망했습니다. 살인하지 말아야 하므로 모든 전쟁을 반대하고, 노예제는 폐지되어야 하며, 동물을 노예로 부리는 일도 중단하라고 말합니다. 평화주의자이며 채식주의자였던 톨스토이는 자신의 신념을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해 계급과 신분의 차별을 없애고, 모두에게 동등한 교육의 기회를 주고, 노동 착취가 중지되고, 사회적 친교가 대대적으로 이뤄지는 사회를 꿈꾸었습니다. 스콧 니어링은 그의 작품을 읽고, 힘닿는 데까지 그의 생각을 전파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진리가 내가 속한 사회의 생활 패턴 속에서 구현되도록 돕는데 시간과 정력을 바치기로 작정했다”고 합니다. 스콧 니어링은 존 러스킨의 다음 말을 빌어 톨스토이에게서 배운 것을 명료하게 표현합니다.

“나는 살아있는 생물은 어떤 것도 쓸데없이 죽이거나 해치지 않고, 아름다운 것을 파괴하지 않겠으며, 하찮은 생명까지도 소중히 지키고 가꾸며, 지상의 자연스런 아름다움과 자연의 질서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스승에 관하여

그대에게 스승은 누구인가? 라고 묻는다면, 그 헤아릴 수 없는 이들을 다 거명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스승은 우리네 삶을 비추어 주는 거울일 텐데, 하고 많은 분들 가운데 이번 참에 부르고 싶은 이름들이 있는 것은 다행입니다. 문익환 목사님은 전태일을 ‘오늘의 예수’라고 말했다지요. 그래요, 전태일뿐 아니라, 전태일에게서 예수님을 발견한 문익환 목사님은 저의 스승입니다. 그리고 명쾌하면서 다정한 말을 건네주었던 김종철 선생님과 한현 선생님, 늘 마음으론 동지라 여기는 이연학 신부님과 문정현 신부님이 계시지요.

출판인 가운데는 괴산에서 농사도 짓고 있는 홍승권 선생님과 판화가 이철수 선생님, 너무 오래 뵙지 못해 그리운 이현주 목사님, 학문적으로 심상태 신부님과 김진호 선생님도 스승이지요. 허나, 단연코 가장 큰 스승은 아내입니다. 일상에서 저의 나태함과 인색함과 옹졸함을 일깨워주는 가장 강력한 안티세력이니까요. 먼나라에 살았던 ‘위대한’ 영혼들도 있습니다. 그중 으뜸은 시몬 베유와 도로시 데이입니다. 그분들의 말투 하나까지 닮고 싶지만, 따라 살지 못해 늘 안타까운 사람들입니다.

시절인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원한 스승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때그때 제 영혼에게 필요한 말씀을 말로 몸으로 전해준 사람들이 그 시절 제 스승이었다는 고백입니다. 인연을 따라 새로운 스승을 만나고, 제 갈망과 영적 준비상태에 따라 새로운 인연이 은총처럼 찾아옵니다. 그럴 때마다, 이 사람이다, 느낄 때마다 주저 말고 스승에게 영혼을 맡겨두어야 합니다. 그 스승 안에서 몸이 자라면, 문득 그 몸에서 나와 제 고유한 길을 따라 다시 하느님을 찾아가는 여정에 나서겠지요.

세상에 ‘절대’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생각도 ‘절대’라는 말을 쓰는 순간에 독설이 되고 고집이 됩니다. 정작 ‘나’는 없는 것이어서 인연을 따라 모이고 흩어진다 합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꺼이 제 마음의 풍경을 열어놓고, 누가 마당으로 지금 들어서고 있는지 찬찬히 살필 일입니다. 그 사람이 비추어 주는 나의 어둠과 빛을 직면한 용기만 있다면, 세상 모든 게 스승이 되기도 하겠지, 생각합니다.

 

* 이 글은 <공동선> 2021년 5-6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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