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정권에 밀착했던 대구교구, 이젠 정화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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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에 밀착했던 대구교구, 이젠 정화될 수 있을까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1.05.10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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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이데올로기적 선택과 대구교구의 보수성-4

대구교구 사제들, 전두환 정권에 직접 참여

1979년 유신체제가 무너지자, 정국은 온통 헌법개정 작업에 관심이 쏠렸다. 이에 한국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는 1980년 1월 16일, 개정헌법에 억제할 수 없는 인간기본권과 정의에 입각한 화해 및 평화의 원리가 반영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무원과 군의 정치적 중립을 엄격히 규정함으로써 평화적 정권교체 원칙을 설정하라는 것이다. 이에 12.12사태로 등장한 신군부는 1980년 2월 18일, 김수환 추기경을 개헌 등 정치문제와 안보문제 등 중요국가 정책에 관한 자문을 받기 위한 국정자문위원회의 자문위원으로 위촉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3월 13일 발족한 ‘개헌심의위원회’에는 이문희 주교와 아울러 교회 내 강력한 보수계 인사로 분류되는 수원교구장 김남수 주교를 위촉했다.

한편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는 “군부에 의해 감독을 받는 민간정부”를 지향하는 이원집정부제 안에 내밀어 민주화를 요구하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고, 군부세력의 합법적 정통성을 획득하기 위한 돌파구로 광주학살사건을 저질렀다. 그후 1980년 8월 27일에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전두환은 2,525표 가운데 무효표 하나를 뺀 2,524표라는 기록적인 찬성을 얻어 제5공화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당시 해산된 국회를 대신해서 만든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는 각종 악법이 쏟아져 나왔는데, 이 입법회의에는 대구교구의 이종흥, 전달출 신부가 위촉되었다. 1981년 3월 23일 주교회의 정평위원회는 이들 두 사제가 입법회의에 참석하는 것을 반대하는 건의서를 주교단에 제출했다. 사제들이 공직을 맡는 것은 교회법에 어긋나고, 교회의 일치에 역행하는 것이며, 종교가 정치의 도구로 이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교단은 끝내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전달출 신부는 평소 양복을 입고 다녔으며, 전 신부라고 부르기보다 전회장이나 전사장으로 불렸다고 한다. 

전달출 신부는 <대구매일신문>과 <가톨릭신문사> 사장 출신으로 한국반공연맹 이사를 역임했으며, 그후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운영위원으로도 활동했다. 1991년부터는 서정길대주교 재단 이사장을 맡기도 했다. <신부 전달출 회장 회갑기념논총>(1991년, 매일신문사)에 축하의 글을 실은 조선일보사 사장 방우영은 “전(달출)사장은 79년부터 83년까지 근 5년동안 신문협회 부회장으로 같이 있으면서 어려움과 즐거움을 같이 나누었다”면서, 전달출 신부는 “시류에 영합하고 권력에 아부하며 위선으로 가득 찬 흙탕물 같은 당시의 세태 속에서 그는 항상 나라를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했다. 그는 늘 주장하였다. 혼란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악순환이 온다. 옳은 일이라도 한 발자욱씩 쟁취해야지 모든 것을 요구하고 모든 것을 단번에 이루려고 하다가는 힘을 가진 자들에게 기회와 구실을 주고 결국 또 다시 불행한 사태를 초래할 나라는 후퇴하고 백성은 고통을 면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그분은 항상 말해왔다.”고 전했다.

대구교구는 1980년 11월 14일 한국신문협회와 한국방송협회는 각각 임시총회를 열고 전국 신문·방송·통신사의 통폐합 등 한국언론계의 전반적인 구조개편을 내용으로 하는 '건전 언론 육성과 창달에 관한 결의문'을 채택했을 때도 신군부 세력의 혜택을 받았다. 당시 신문과 방송은 보안사령부에 의해 강제 재편성되었는데, 지방지는 1도 1지 원칙이 적용되어 대구교구에서 발행되던 <매일신문>가 <영남일보>를 흡수해 대구의 유일한 일간지가 되었던 것이다.

한편 1986년 5월 3일 인천집회 이후에 한국사회는 대통령 직선제 쟁취와 민주정부 수립이라는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는데, 그해에 이효상의 둘째아들인 이문희 주교가 보좌주교 딱지를 떼고 7월 5일 서정길 대주교에 이어 대구대교구 제8대 교구장이 되었다. 유신체제가 시작된 1972년 10월 7일 당시 38세의 나이로 대구대교구 보좌주교에 오른 지 14년 만이다. 이문희 대주교는 경북대 정치학과 출신으로 아버지 이효상이 민주공화당에 입당한 1962년에 프랑스 리옹 신학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1965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1986년 대주교가 되던 <가톨릭신문>과 나눈 인터뷰에서 “원래 나는 대학을 들어갈 때 정치가가 되려고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정치나 경제 등은 누구나 할 수 있고 할 사람도 많은데, 인간들을 하느님과 가까이 있게 해서 우리의 정신 세계를 풍요롭게 하는 신부님이 되려는 사람은 드문 것 같아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문희 대주교가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것은 대구교구에서 아버지 이효상이 갖는 위상에 비추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더구나 14년 동안 보좌하던 서정길 대주교의 정치적 성향에 깊이 침식되었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한국사회가 직선제 개헌 논의로 다시 한번 뜨거워졋던 시기에 전두환은 모든 개헌 논의의 중단을 골자로 하는 4.13호헌조치로 대응했는데, 이에 광주대교구 사제단이 최초로 4.13호헌조치를 만민주 반민중적 조치라고 규정하며 항의단식농성에 들어갔다. 그후 지속된 ‘직선제 개헌을 위한 단식기도’ 행진에 5월 4일에는 대구교구 사제들도 이례적으로 참여했다. 대구 교구 소속사제들은 “그 동안의 무관심과 무기력을 동반한 침묵을 반성하면서 속죄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오늘과 내일의 온갖 고난에도 굴복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는 표현으로” 단식기도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교구장이 바뀐 직후라서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결국 이문희 대주교의 반대로 참여사제들은 주교좌 성당에서 쫒겨나 개별적으로 기도회에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구교구 주교좌 계산동 성당 (사진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대구교구 주교좌 계산동 성당 (사진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대구교구는 외부의 힘으로나마 정화되어야

바티칸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공산주의를 방어하고 가톨릭정신에 바탕을 국가를 건설하자는 기치아래 가톨릭교회의 정치세력화에 몰두했다. 그 과정에서 한국사회와 교회 역시 숱한 내홍을 겪었다. 해방공간에서 남한에서는 노기남 주교가 정치주교라는 이름을 얻으면서까지 ‘가톨릭계의 면모’라는 슬로건으로 장면을 지지하고, 그를 통해 정치세력화를 꾀했다. 이 당시 교회는 공산주의로부터 받은 상처 만큼이나 깊은 반공주의를 내세웠으나, 비교적 합리적 과정으로 민주주의를 선택했다. 특별히 한국교회는 정치세력화 과정에서 전략적으로 이승만 정권과 유착했으나, 결국 민주주의에 대한 원칙 때문에 이승만과 결별하고 4.19혁명으로 상징되는 민주화운동의 여정에 나섰다.

이러한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5.16 군사쿠데타로 좌절되고, 1960년대 말에 가서야 다시 불붙기 시작했는데, 이는 정치세력화가 아니라 민주화를 위한 사회참여의 형식이었으며, 제도적으로는 정의평화위원회를 통해 구현되고, 실천적으로는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통해 구현되었고, 정치적으로는 장면을 계승한 김대중에 대한 선택을 낳았다. 이 시기는 “가장 완전한 반공은 민주주의를 통해 이뤄진다”는 지학순 주교의 발언처럼 반공주의와 민주주의가 불안한 동거에 들어간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후 한국교회는 해방신학의 세례를 받으면서 반공주의조차 변수로 선택하는 과정을 겪으면서 발전한다. 이는 분단시대를 경험하는 교회가 민주화 과정에서 통일문제를 다룰 수 있는 역량으로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천주교회의 성장과정에서 유독 대구교구만이 ‘지역교회’의 한계 안에서 군사정권과 한국사회의 기득권 세력에 유착되어 있었다. 이는 무소속으로 정계에 입문한 이효상이 서정길 대주교의 엄호를 받으며 정치적으로 성정해 가는 과정과 맞물려 있다. 결국 대구교구는 한국교회의 공통의 경험에서 배제된 채 대구교구만의 독자적 길을 걸어감으로써 사실상 한국사회 안에서 섬처럼 고립되어 있다.

더구나 이효상의 아들인 이문희 대주교가 서정길 대주교에 이어 보좌주교로 14년, 교구장으로 20년 넘게 봉직함으로서 더욱 굳졌다. 더구나 교회는 주교의 재치권을 ‘통치’라고 표현하고 있듯이, 주교의 성향은 교구 전체에 미치는 파급력에서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절대적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이효상과 <매일신문>이 갖는 대구지역 내 영향력 도한 대구민심의 향방을 결정짓는 방향타로 작용했을 게 뻔하다. 그런 점에서 대구지역과 대구교구는 ‘저들만의 천국’을 지난 50여 년동안 구가해 온 셈이다. 그래서 그 악몽으로부터 깨어나 개명(開明)한 세상으로 나오는 것은 대구교구 자체의 정화력으로는 힘겨울 것이고, 외부의 자극으로나마 서서히 깨어나길 기대한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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