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을 은혜라고 말하는 나는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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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을 은혜라고 말하는 나는 미쳤다
  • 최태선
  • 승인 2021.04.27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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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등나무 꽃이 주렁주렁 피었다. 등나무 꽃이 피면 생각나는 권사님이 있다. 그분은 정말 나를 사랑해주셨다. 그러나 그분의 신앙이 나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많은 충돌이 있었다. 그 충돌은 사소한 것도 있었지만 아주 심각한 것도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런 충돌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나를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 나에게 결코 동의하지 않았던 신앙에 대한 이해 차이도 대부분 사라졌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은 오래 참고 기다려야 한다.

내게 힘이 있었다면 그런 오래 참음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무엇보다 가난해졌다. 가난은 힘이 없어지는 가장 확실한 첩경이다. 어쩌면 유일한 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가난하지 않거나 가난을 사모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여려 모양으로 경건을 가장할 수 있다. 어쩌면 가난도 그럴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가난을 경건으로 가장하려는 사람은 최소한의 가능성이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가난에 대한 이해는 그만큼 중요하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가난을 이해하는 그리스도인을 만나기가 어렵다. 가톨릭의 경우에는 수도자들이 있다. 재속 수도자들도 있다. 그래서 가난을 모토로 하는 청빈이 낯설지는 않다. 하지만 개신교의 가난 이해는 처참하다. 가난한 것은 저주다. 자신의 노력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가난은 조상 탓이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의 가장 분명한 현상이다. 그래서 나처럼 가난을 복음의 핵심으로 이해하는 목사는 자연스럽게 경원시하거나 배척을 받게 된다.

안타까운 일이다. 정말 안타깝다.

“우리는 아무것도 세상에 가지고 오지 않았으므로, 아무것도 가지고 떠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유혹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도 해로운 욕심에 떨어집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립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좇다가, 믿음에서 떠나 헤매기도 하고, 많은 고통을 겪기도 한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생각해보니 내가 목사가 된 것은 잘한 일이다. 개신교가 그리스도교가 맞는다면 나 같은 목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바울이 사랑하는 디모테오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다. 이 말씀을 잘 묵상해보라. 그리스도교에 부자는 발붙일 곳이 없다. 그리스도인들도 부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부자가 되었다고 부자로 살 수 없다.

“부자가 가지고 있는 부는 가난한 이들의 것이다.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라 돌려주어야 한다.”

이것이 율법은 물론 복음의 핵심이다. 가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하는 것은 부자 관원 개인에게 주어진 시험이 아니다. 자캐오의 실천은 자캐오만의 실천이 아니다. 누구건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면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이 사실을 부인한다.

“부자가 가지고 있는 부는 하나님의 축복이다. 믿음이 좋으면 반드시 부자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여러분(당신의 자녀들인)이 부자로 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약간은 각색을 한 것이지만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의 메시지의 핵심이다. 대부분의 방송설교의 주된 내용이기도 하다. 얼마나 왜곡된 복음인가.

복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한 사람이라면 위에 인용한 디모테오서의 말씀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 내용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모를 수가 없다. 그러나 솔직히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라. 어떤 내용이 들어있는가.

나는 어제 결혼식엘 다녀왔다. 그곳에서 친척들을 만났다. 그곳에도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과 나눌 대화가 없다. 그들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성서의 부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디 우리 친척들만 그런가. 내 친척들이기 때문에 내가 그들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있기에 그것을 알고 있을 뿐이다.

오래 전, 처음에 언급한 권사님께서 내게 부탁을 하나 하신 적이 있다. 최순영 동아그룹 회장의 부인인 이형자님의 자서전에 이형자님이 도왔던 사회복지법인들을 대표하여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자료를 줄 터이니 글을 잘 쓰는 내가 그것을 정리하여 글을 써달라는 것이었다. “독사보다 무서운 것이 권사”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던 분을 위해 글을 쓰라는 것이었다. 정말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써드렸다. 그 일은 내 인생에 주어진 가장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그 책이 출판되어 전하는 메시지가 무엇인가. 믿음이 좋아 부자가 되어 잘 살았고 혼자만 잘 살지 않고 고아원들을 돕고 그곳의 원장들을 해외여행까지 보내드렸다는, 선행까지 하는, 복 받은 삶을 살았다는 것이 아닌가.

복음을 실천하려다 가난해지고 신용불량자가 된 목사가 쓸 수 없는 내용이다. 그러나 가난해진 나는 그분의 부탁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것이 불행한 일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렇게 무력해지고, 이렇게 자신의 생각을 꺾을 수 있는 것이 사실은 은혜이다. 그냥 은혜가 아니라 은혜 중의 은혜이다.

가난해지고 그야말로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나는 참으며 살 수밖에 없다. 내 뜻을 펼칠 수가 없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내가 받은 진짜 은혜이다. 만일 내가 이 은혜를 받지 못했다면 나는 아무리 잘해도 김동호 목사님이나 이찬수 목사님처럼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금 이 말에 분노가 일거나 구역질이 나는 분들이 계실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분들이 나처럼 가난해져서 복음을 알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렇게 되면 결국 지금 내가 말한 오늘날 가장 존경을 받으시는 이 두 목사님이 사실은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분들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이분들처럼 커지고 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가 참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안다. 그러나 나처럼 가난해지는 것은 그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어려운 일이다. 실패는 가난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그것을 은혜로 받아들이는 것은 성공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어렵다. 무엇보다 외로움을 견딜 수가 없다.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고 멸시와 천대를 받는 일은 복음에 미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 미침을 잘 보여주는 성서의 장면이 있다. 결박된 바울의 모습이다.

"짧거나 길거나 간에, 나는 임금님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고 있는 모든 사람이, 이렇게 결박을 당한 것 외에는, 꼭 나와 같이 되기를 하느님께 빕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렇게 미쳐야 한다. 결박된 죄수가 임금님보다 더 당당하지 않은가. 가난 역시 마찬가지이다. 세상은 가난이 도대체 뭐가 자랑스러우냐고 외칠 것이다. 적어도 자가용 비행기를(일등석을) 타고 다니는 목사가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아직 미치지 않아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미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바울은 미쳤다. 가난을 은혜라고 말하는 나도 미쳤다. 당신은 어떤가. 아직도 여전히 돈을 사랑한다면 당신은 아직 미치지 않은 것이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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