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평한 사랑을 꿈꾼 철학자, 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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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평한 사랑을 꿈꾼 철학자, 묵자
  • 유대칠
  • 승인 2021.04.27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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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칠의 뜻으로 보는 철학사-6

어떤 세상이 아름다운 세상일까? 거대하고 화려한 건물로 가득한 세상이 아름다운 세상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 아무리 거대하고 화려한 건물로 가득한 곳이라도 누군가를 향한 무시가 일상이 되어 버린 곳이라면 결코 아름답다 할 수 없을 것이다.

강이 흐르는 아름다움 속에서 성현의 오랜 지혜가 녹아든 글을 읽으며 사색하는 선비를 상상해 보자. 참으로 평화롭고 아름답다. 그러나 그 선비의 그 아름다움을 위하여 희생당하고 있는 노비를 생각해 보자. 노비의 힘겨운 삶이 없다면 그 선비의 아름다워 보이는 일상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 아름다운 풍경도 아름답지만은 않다. 보이는 것이 좋아 보여도 보아야할 것을 보면 조금은 서글픈 풍경일 뿐이다. 조선을 지나고 지금 우리는 정말 제대로 아름다운 세상을 살고 있을까? 이제 법적으로 노비로 살아가는 이는 없다. 하지만 거대하고 화려한 건물과 성공으로 가득한 이 자본의 세상도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없다.

어찌 보면 그 근본은 그리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노비의 희생으로 양반의 유유자적한 아름다움이 유지되던 세상은 아니지만 지금도 여전히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희생으로 가진 자들의 성공이 유지되고 있다. 조선 시대, 양반의 아름다운 일상을 떠올릴 때, 노비의 아픔을 생각하지 못하듯이, 지금 우리도 우리 시대의 경제적 성공을 떠올릴 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프고 힘겨워하는 이들을 쉽게 떠올리지 못한다.

2013년 1090명, 2014년 992명, 2015년 955명, 2016년 969명, 2017년 964명, 2018년 971명, 2019년 855명, 2020년 882명. 매년 거의 1000명의 산재 사망자가 자본의 화려함 뒤편에서 죽어가고 있다. 더욱더 슬픈 것은 가지지 못한 이들 가운데 더 가지지 못한 하청노동자의 죽음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더 크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화려함의 뒤편에 가려진 맨얼굴이다. 우리 사회엔 아직도 죽음에 차별이 있다. 몇몇 기업에선 오직 하청노동자만이 죽어갔다. 더 가지지 못한 이만 죽어갔다.

사람을 마주 할 때, 이런저런 조건 속에서 그 사람을 계산한다. 그 사람을 그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자신에게 윗사람인지 아랫사람인지 따지고, 자신과 얼마나 가까운 거리에 있는지 따진다.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서 다르게 대한다. 같은 학연, 지연 그리고 혈연이면 더 가까이 더 사랑하고 그렇지 않으면 거리를 둔다. 덜 사랑해도 그만이다. 그러니 가진 이들은 자신들끼리만 모이고 뭉칠 것이다. 자신들끼리 가깝고 자신들끼리만 더 사랑하며 말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특권층을 보자. 자신들끼리 더 사랑하며 뭉쳐있다. 어쩌면 그들에게 산재 노동자의 죽음은 자신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아랫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 한마디로 남의 일이라 생각할지 모르겠다.

중국의 철학자 묵자는 사람을 나누고 이런 저런 조건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으로는 아름다운 세상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그가 우리에게 제안한 것이 ‘겸애(兼愛)’다. 겸애란 모두에게 공평한 사랑이다. 나의 가족을 향한 마음만큼이나 나 아닌 남의 가족에 대해서도 공평함을 애쓰는 사랑이 겸애의 마음이다.

묵자는 구별하고 차별하는 사랑인 ‘별애(別愛)’는 이 사회의 여러 어두움을 해결할 수 없으며, 오히려 더욱더 깊어지게 한다고 보았다. 참 맞는 말이다. 가진 자들끼리의 사랑 속에, 그 특권을 가진 이들의 사랑 속에, 그들의 그 잔혹한 별애 속에 가난한 이의 아픔은 그저 남의 아픔이지 우리의 아픔이 아니다. 민중의 아픔을 남의 아픔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계속 특권을 누리며 그 사회의 권력층으로 있다면, 그 사회의 민중에게 희망은 있을까?

묵자는 친족 중심 혹은 자기 무리 중심으로 자기들끼리 잘 되길 바라는 이들에게서 희망을 구하기 어렵다고 한다. 당연하다. 오직 홀로 자신만의 웃음을 위해 살아가는 이들에게서 어떻게 더불어 삶의 웃음을 기대하겠는가? 그들은 오직 그들만이 홀로 특권을 누려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기에, 더욱더 견고하게 학벌사회와 지연사회 그리고 혈연사회를 만들어 갈 뿐이다.

참된 희망은 모두에게 공평한 사랑, 겸애에서 얻어질 것이라 묵자는 확신했다. 겸애가 일상 속에 녹아든 사회라면 더불어 삶은 당연할 것이다. 홀로 자기 가족과 자기 무리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저런 사회적 조건을 넘어 인재를 등용하게 될 것이다. 당연히 말이다. 국적이니 집의 평수니 피부색이나 종교니 이런 것으로 서로를 구별하지 않고 겸애의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부조리한 특권이 당연시 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산재 노동자의 죽음이 남의 슬픔으로 여겨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

묵자의 겸애는 오랜 과거의 사상이지만, 아직 우리에게는 먼 이야기다. 부조리 속에서 만들어진 그들의 특권은 너무나 견고하고, 그 특권의 밖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은 너무나 힘들다.

4월 28일은 세계 산재 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이다. 잔인한 세상, 여전히 특권층의 그 별애가 지배하는 세상, 여전히 겸애가 아쉬운 세상, 그 특권의 밖에서 죽어간 이들을 추모하는 날이다. 묵자의 겸애가 우리 삶 속 일상이 되는 세상을 꿈꾸며 이 슬픈 죽음이 더는 없는 세상을 꿈꾸며 그들을 위해 잠시 기도의 시간을 가져보자.

 

유대칠 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한다.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고전 세미나와 연구,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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