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메니데스, 보이지 않는 세상을 바라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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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메니데스, 보이지 않는 세상을 바라보다
  • 유대칠
  • 승인 2021.04.15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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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칠의 뜻으로 보는 철학사-5

‘없는 것’은 없고 ‘있는 것’은 있다. 당연한 말이다. 굳이 깊은 사유에 빠져들지 않아도 너무나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이 또 쉽지 않다. 이상하게 철학은 그런 일을 한다. 너무 당연한 것을 금세 다르게 보게 만들고 무척이나 낯선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 말도 그렇다. 없는 것은 없고 있는 것은 있다. 너무 당연해 더 이상 무슨 설명과 이해가 필요할까 싶지만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기원전515?-기원전450?)는 이 말이 결코 쉽지도 않으며 존재하는 모든 것의 비밀로 다가가는 첫 걸음으로 만들어 버린다.

생성된다는 것은 없던 것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있던 것이 계속 있기만 한다면, 생성은 없다. 소멸이란 있던 것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없던 것이 계속 없다면 소멸은 없다. 생성과 소멸을 위해 있던 것은 없어져야하고 없던 것은 있어져야 한다. 없는 것이 없고 있는 것은 있다면, 생성도 소멸도 없다. 있기만 한 세상이니 말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오직 있기만 한 세상, 생성과 소멸로 가득한 변화의 세상이 아니라, 오직 있기만 한 세상, 없어지는 것도 새롭게 생기는 것도 없는 오직 있기만 한 세상, 그 영원히 변하지 않은 그런 세상을 참된 세상의 모습이라 믿었다. 만일 그것이 참된 세상의 모습이라면 지금 우리가 감각하는 이 변화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진짜가 아니다. 진짜는 그때그때 변화하는 변덕스러운 것이 아니다. 진짜는 변하지 않은 그 무엇이다.

하지만 우리가 감각으로 느끼는 이 세상은 모든 것이 변화한다. 무척이나 변덕스러운 것이 사람의 마음이고 그 만큼이나 쉽게 변하는 것이 세상의 흐름이다. 금세 옷의 유행도 달라진다. 이런 옷이 유행인가 싶다가 금세 다른 것으로 바뀐다. 어느 하나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 옷의 모양새도 집의 모양새도 어느 하나 그 자리에 그렇게 가만히 머물지 않고 쉼 없이 변한다. 이런 것이 있었나 했는데 금세 없어지고 그 자리엔 다른 것이 있다. 그렇게 없어지면서 무엇인가 생긴다.

없다 생기고 없다 생기는 것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이치다. 그런 변덕스러운 것이 진리가 될 수 없다. 진리는 변덕스럽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감각’으로는 절대 변하지 않는 세상을 느낄 수 없다. 감각으로 느끼는 세상은 있다 없다 있다 없다 한다. 모든 것이 그렇다. 있던 힘은 사라지고 없던 주름이 늘어나면서 사람은 노화되어간다. 그렇게 변해간다. 그것이 눈에 보이는 세상의 이치다. 감각되는 세상의 이치란 말이다. 그러니 파르메니데스는 ‘감각’이 아니라 ‘이성’으로 영원한 것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원하다는 것은 시간을 벗어나 있다는 말이다. 또 그 시간 속에 있다는 것은 변하고 있단 말이다. 과거에 있던 것은 없던 것이 된다. 현재 있는 모든 것은 또 없어져 미래가 될 것이다. 그렇게 시간 속 모든 것은 있다가 없어진다. 시간 가운데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다. 한때 박정희는 최고의 권력자였다. 하지만 그의 시대도 곧 과거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전두환의 시대가 왔다. 총칼로 대통령이 된 그도 그 시대 최고의 권력자였다. 그러나 그의 시대도 과거가 되어 버렸다.

 

가운데 있는 사람이 파르메니데스.

 

영원할 것 같은 이 세상 권력들도 결국은 과거가 되어 사라진다. 과거형이 되어 버린다. 파르메니데스는 있다가 없어지는 세상을 참된 세상이 아니라 생각했다. 참된 세상이 아니니 그런 변덕스러운 세상에 기생하여 살아 선 안 된다. 참된 세상은 있다가 없어지는 그때그때 잠시 달콤한 세상이 아니라, 영원한 세상이라 그는 확신했다. 있다가 없어지는 변덕스러운 세상이 아니라, 항상 있기만 한 세상이라 확신했다.

생노병사(生老病死)의 세상을 느끼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파르메니데스가 이야기하는 그 영원한 세상은 쉽게 상상되지 않는다.

“그것은 한때 있었던 것도 아니고, 앞으로 있게 될 것도 아니다. 지금 모두 더불어 하나로 연속적인 것으로 있기 때문이다.” (조각글 8)

그의 글을 직접 읽어봐도 머릿속으로 잘 그려지지 않는다. 도대체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는 항상 현재의 모습으로 있기만 한 세상은 어떠한 세상일까? 없음에서 있음이 되는 것도 아니고 있음에서 없음이 되지도 않는 세상은 도대체 어떤 세상일까? 변화무쌍한 세상, 그때그때 달콤함을 유일한 인생의 낙으로 생각하는 우리에게 파르메니데스가 이야기하는 그 참 세상은 정말 쉬이 그려지지 않는다. 감각적으로 좋은 것만을 위해 살아온 우리에게 그 형이상학적인 세상은 상상조차 쉽지 않다. 영원한 가치보다는 그때그때 변덕스러운 부동산의 가치에 울고 웃는 우리에게 파르메니데스의 그 세상은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모든 것이 변해가는 감각의 세상만이 진짜라며 살아간다. 영원한 진리는 보지 못하고 변화하는 변덕스러운 세상이 전부라며 살아간다. 파르메니데스가 이야기하는 세상이 어떤 모양인지 이해하는 것보다 어쩌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일지 모르겠다. 이성으로 영원한 것을 치열하게 고민하며 그 영원한 이상을 추구하기 보다는 당장 눈앞에 감각되는 것에 집중하여 살진 말자는 것이다. 있다 없어지는 변덕스러운 것에 우리 온 존재를 의지하지는 말자는 말이다.

우리의 역사를 보자. 영원을 향한 믿음을 가졌다면서 눈에 보이는 기쁨에 거짓된 권력과 손을 잡은 종교들도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도 독재자의 시대에도 말이다. 영원을 향하여 애쓰는 파르메니데스의 눈에 변덕스러운 그 찰나의 기쁨에 온 존재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우리는 얼마나 어리석인 존재일까. 말로는 신과 더불어 영원한 구원을 이야기하며 겉으로는 찰나의 기쁨에 부끄러움도 모르는 우리는 얼마나 어리석고 위선적일까. 찰나의 순간, 곧 없어진 가치가 아니라 영원히 있을 그 가치를 고민하며 그 가치를 향하여 애쓰며 살아야겠다. 우린 영원 속에서 영원을 향하여 영원을 꿈꾸며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이니 말이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한다.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고전 세미나와 연구,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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