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을 떠나 교회와 결혼한 도로시 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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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을 떠나 교회와 결혼한 도로시 데이
  • 로버트 콜스
  • 승인 2021.04.12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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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콜스 [Dorothy Day, a Radical Devotion] -12

도로시 데이와 포스터의 첫 번째 아이, 타말 테레사가 태어났다.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이 데이에게 큰 기쁨을 가져왔다. 그는 자신이 아이를 가지게 되리라고 믿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의 미래 아버지의 반응은 달랐다. “포스터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런 세계에서 아이들을 키울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갈등이 있었다.” 그는 또 다른 측면을 밝힌다 : “그의 책임에 대한 두려움,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싶지 않은 마음, 그의 극단적인 개인주의가 그를 포함하여 모든 남자들이 아버지가 되지 말아야 한다고 느끼게 했다.”

이런 의견의 차이는 갈등의 시작일 뿐이었다. 임신한 동안에도 도로시 데이는 늘상 기도했다. 그는 <그리스도를 본받아>도 읽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아이의 탄생, 아이의 세례 그리고 자신의 점차적인 가톨릭 교회 입문을 생각하며 몰두해 있었다. “나는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내 아이에게 세례를 받게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라고 그는 <긴 외로움>의 “아이를 가지면서” 부분에서 말한다. 그는 계속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내가 수년동안 허우적거리고 의심하며 주저하고 훈련받지 못했으며, 도덕을 개의치 않고 살았던 것처럼 내 아이를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도로시 데이는 그의 관습적인 결혼의 운명과 아기의 미래 종교생활 그리고 자신의 종교생활 모두가 그 당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고 분명히 말한다. “아이를 낳는 데에도 거의 죽음까지 생각해야하는 전투가, 신체적 고통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 내 자신의 영혼을 위한 싸움이 다가오고 있었다. 타말은 세례를 받을 것이고 나는 그런 분열이 내 주변의 인간관계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고 있었다.”

“사랑은 넘친다”는 장에서 그가 역설적으로 분명하게 표현하듯이 일은 실제로 더 악화되고 있었다. 타말은 1927년 7월에 세례를 받았고 그의 어머니는 세례후의 잔치가 어떻게 되었는지 설명하면서 결과를 이야기한다.

"우리는 삶은 가재와 샐러드를 먹는 즐거운 점심식사를 위해 해변의 집으로 돌아왔다. 포스터는 잔치를 위해서 가재를 잡았으나 파티에 참석하지 않고 나갔다. 그는 며칠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내가 영적인 생활을 갈망하는데 대한 항의로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는 영적인 삶을 병적인 도피주의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의 물질주의 속에서 크게 기뻐하고 있었다... 포스터는 인간을 신앙의 눈으로가 아니라 이성의 관점에서 보았다. 그는 세례를 어떤 미신적인 숭배라고, 여자들이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호들갑이며 소란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에 그는 마음이 관대해져서 가재도 가져왔다. 그리고 나서 이 모든 것이 예고하는 것에 끝을 내려는 것처럼 화를 냈다. 질투가 자리를 잡았고 그는 나를 떠났다.

실상, 그는 그해 겨울과 다음해 여름동안에 꽤 여러 차례 나를 떠났었다. 내가 점점 더 종교에 몰두하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우리 둘 사이의 긴장은 비참할 정도였다."

그는 결국 아프게 되었고, 그들의 "결혼“은 곧 끝이 나게 되었다.

"나는 너무나 압박을 받아서 숨을 쉴 수가 없었고 밤에도 목이 졸려 일어나야 했다. 나는 약해졌고 활력이 없어졌다. 의사는 갑상선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코넬 병원에서 신진대사 검사를 했고 병원 측은 내가 과민한 상태에 있다고 말했다. 겨울쯤에 갈등이 더욱 심해져서 큰 싸움이 일어났고 우리는 다시 별거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그가 돌아왔을 때, 나는 그를 집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내 마음은 우리가 함께 겪고 있는 이 고문을 영원히 끝내려는 내 자신의 결심 때문에 부서지고 있었다."

다음날 그는 “조건부의 세례”를 받았다(그는 수년 전에 이미 감리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었다), 그리고 곧 “첫 고백”을 했으며 다음날 아침 첫 영성체를 하게 되었다.

둘 사이의 위기 전에 도로시 데이는 포스터가 아무리 아이들을 낳는데 대해서 관념적인 반대를 했다 해도, 아기에게는 사랑스럽고 잘 보살피는 아버지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그는 또한 자신의 개종이 그들의 개인적인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잘 알고 있었다. “아이만이 그의 관심을 끌었다. 애기는 그의 기쁨이었다. 물론 그런 사실이 내가 가톨릭이 되었을 때 그를 쳤었던 잔인한 타격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포스터는 그때 심각하게 좌절하고 있었다. 그는 사코와 벤제티의 사형집행의 비극에 극심한 충격을 받고 있던 차였다. 그는 포스터가 “며칠동안 먹지도 않았고 이 비극에 망연자실해서 집주변에 앉아 있었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한번은 (그는 이 이야기를 여러 번 했었다) 그가 “사람들의 세계보다 더 친절하고 더 아름답고 더 평화스러운 자연의 세계에 피난처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삶의 이런 시점에서는 그것도 할 수 없었다. “이제 그는 삶의 많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도피하려고 애썼던 자연 속으로도 피해 갈 수가 없었다.”

분명히 그가 피할 수 없는 중대한 문제는 사랑의 깨어짐이었다 ­그리고 우정도­ 그에게 너무나 중요한 문제였다. 뿐만 아니라 딸에 대한 애정도 점점 커지고 있었다. 도로시 데이의 가까운 가톨릭 친구들과 영적인 충고자들도 그가 타말이 태어난 바로 직후에 개종하는 것에는 부정적이었다. 그들은 아버지가 아이에게 어떤 의미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포스터가 아버지가 될 것이고 아이를 아는데 시간을 보낸다면 아마 그가 훨씬 좋은 아버지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나름대로 사코와 반제티의 죽음뿐만 아니라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의 역할도 끝나가고 있었음을 슬퍼하고 있었다.

도로시 데이는 자서전의 “사랑은 넘쳐흐른다” 부분에서 이런 결과를 막기 위해 모든 가능한 것을 다 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둘 다 마음과 영혼뿐만 아니라 몸도 고통을 받았다. 그는 신앙에 대해 말하려고 하지 않았고 내가 주제를 꺼내려고 하면 완전히 침묵 속에 잠겼다. 주제를 꺼낸다는 것은 내가 가톨릭이 되고서는 그와 함께 계속 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교회나 국가의 공식적인 관리들이 하는 어떤 예식도 혐오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무정부주의자이며 무신론자였고 그래서 거짓말장이나 위선자가 될 생각이 없었다. 그는 극단적으로 성실한 인간이었고 그 성실성이 아무리 비논리적이고 때론 고약하다 해도 나는 그를 사랑했다. 그를 떠나는 것을 생각만 해도 나는 죽을 것 같았다."

매일의 현실 속에서 그는 포스터에 대한 사랑을 감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가을밤에 우리는 무척 많은 독서를 했다. 때때로 그는 썰물 때에 그리고 달이 찼을 때 미끼를 던지러 바다가에 갔다. 부두가에 나가 늦게까지 낚시를 하였고 해초나 짠 바닷물 냄새를 풍기며 들어왔다. 11월의 을씨년스러운 공기에 추워하며 침대로 들어와서 침묵 속에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아내로서 엄마로서 또한 모든 측면에서 그를 사랑하였다. 나는 그가 알고 있는 모든 것 때문에 그를 사랑했고 그가 알지 못하는 모든 것 때문에 그를 불쌍하게 여겼다. 나는 그의 이상한 행동도 사랑했다. 나는 그의 스웨터 주머니에서 물고기를 꺼내야 했고 낚시하면서 함께 가져온 모래와 조개껍질도 사랑했다. 나는 차 냄새를 풍기면서 그가 잠자리에 들 때에 그의 차갑고 마른 몸도 사랑했다. 그리고 나는 그의 성실성과 고집스러운 자존심도 사랑했다."

그렇지만 마지막에 그는 가톨릭 교회를 더 사랑하였다. 정식으로 세례를 받은 후 도로시 데이는 기도예식에 참여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처음에 예식들은 “엄하게, 차갑게” 진행되었다. 그는 자신이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민중의 아편”에 중독되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 무릎을 꿇고 앉아서 기도할 때에 “위선자”처럼 느껴졌으며 누군가 그를 보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벌벌 떨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가장 헌신적이고 기도하는 충성스러운 가톨릭이 되기를 절실히 원하기도 하였다.

“나는 가난하고 정결하며 순명 하기를 바랬다. 나는 살기 위하여 죽고 싶었고, 낡은 인간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를 입고 싶었다. 다른 말로하자면 나는 사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랑에 빠진 모든 여인들처럼 나는 나의 사랑과 일치하고 싶었다.”

그는 이 열정이 그의 초기 삶에 미친 영향을 볼 수 있었고 이제 그것이 막바지에 왔다고 생각했다. “왜 포스터가 질투하지 않겠는가? 이 사랑에 포함되지 않은 그 어떤 남자도 물론 나의 불충실, 나의 간음을 인식하게 될 것이었다. 하느님의 눈에 그분을 제외하고 피조물에 눈을 돌린다면 그것은 모두 간음이 된다. 그리고 성서는 그렇다고 반복해서 표현하고 있다.”

그는 그때 자신의 표현대로 교회와 결혼했다; 수녀로서가 아니라, 그는 그런 성소에 해당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개종한 평신자로서 결혼한 것이며, 자신을 기꺼이, 육체와 정신과 영혼을 아무리 회의가 그를 짓눌러도 교회라는 기관에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원출처] <Dorothy Day, a Radical Devotion>, Robert Coles, 1987
[번역문 출처] <도로시 데이, 뿌리로부터 온전히 살다>(<참사람되어>2002, 7월호)

 

로버트 콜스(Robert Coles)

하버드 의과대학의 정신의학과 및 사회윤리학과 명예교수. 청소년 문제 상담 전문가로 활동해 왔으며, 50여 권이 넘는 책을 집필한 작가. 1973년 미국의 다양한 계층과 인종의 아이들을 직접 취재하고 분석한 <위기의 아이들>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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