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과 불안의 시대 건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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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과 불안의 시대 건너기
  • 정다빈
  • 승인 2021.03.29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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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빈 칼럼

“내 조건이면, 91년생 교사 만날 수 있어?”

인터넷 뉴스를 읽다 보면 종종 끼어드는 결혼정보회사의 광고다. 시선을 사로잡는 제목 옆에는 어김없이 청초한 얼굴의 여성이 웃고 있다. 여성을 위한 버전도 있다. “내 조건이면, 87년생 회계사 만날 수 있을까?” 역시 옆에는 해사한 얼굴을 한 내 또래 남성이 미소 짓는 사진이 뜬다. 소위 ‘결혼 적령기’라는 것에 들어섰기 때문인지 인터넷 광고 외에도 자기 회사의 회원으로 가입할 것을 권유하는 결혼정보회사의 홍보 전화를 종종 받았다. 뼛속까지 ‘자만추(자연스러운 만남 추구)’인 나는 이런 적극적이다 못해 공격적인 마케팅이 부담스러울 따름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광고를 통해 세상의 욕망과 우리 세대의 불안을 엿보는 유익함도 있다.

앞서 언급한 광고는 단편적으로는 여성이라면 ‘91년생 교사’, 남성이라면 ‘87년생 회계사’가 결혼을 고민하는 이성에게 가장 매력적인 나이와 직업이라는 정보를 준다. 그러나 좀 더 곱씹어 보면, 이 광고는 자신들의 강점을 홍보하기보다 잠재적 소비자의 불안을 추동하는 방식으로 광고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회사에 가입하면, 이런 이성을 만날 수 있다.”라고 말하기보다, 소비자 입장에 서서 “내 조건이면, 91년생 교사, 87년생 회계사를 만날 수 있을까?” 묻는다. 이런 광고를 클릭했을 때 이어지는 화면은 자신의 정보와 조건을 채점하는 일종의 테스트다. 결혼하고 싶은 이성의 ‘조건’은 이미 정해져 있고, 내 ‘조건’이 그에 부합한 것인지 초조하게 만드는 전략이다.

 

사진출처=itbiznews.com
사진출처=itbiznews.com

‘광고는 욕망의 연금술’이라는 말처럼 광고가 욕망을 부추기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광고는 세상의 욕망을 투명하게 비춘다. 결혼정보회사의 광고가 불편한 이유는 ‘결혼’이라는 아름다운 결합을 조건과 점수, 등급의 세계로 치환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럴듯한 조건을 갖추었는지 불안해하는 청년들의 심리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욕망과 불안을 결혼정보회사가 ‘창조’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적당한 나이와 준수한 외모의 무엇보다 안정적인 수익이 보장되는 직장이라는 조건을 갖춘 이성과 결혼하고 싶다는 의지는 어쩌면 자연스럽다. 그들은 그저 그 열망을 노골적으로 상업화하고 있을 뿐이다.

“정다빈 님 결혼하셨어요?”라는 질문에서 그치지 않고, 교제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럼 그분과 결혼하실 건가요?”까지 나아가는 무례한 텔레마케팅에 진절머리가 난 나는 관련 회사 홈페이지에 들어가 본인 인증을 하는 불편까지 겪으며 모든 광고 서비스 차단을 신청했다. “이런 광고는 나의 욕망과 합치하지 않으며, 나는 결혼하지 못할까 불안하지 않으니 그만 하세요.”라는 단호한 의지를 담아. 광고 차단을 신청한 후 적어도 더는 요즘 만나는 분 있으시냐는 전화는 오지 않았지만, 여전히 네 조건에 87년생 회계사를 만날 수 있겠냐고 물어오는 인터넷 광고는 피할 길이 없다.

빨리 선보러 오라는 결혼정보회사의 마수(?)에서 벗어난 요즘 유독 자주 보이는 광고는 “퇴근 후 1시간 투자로 월급의 몇 배를 벌었다”고 홍보하는 부업 클래스 광고다. 자신만의 노하우를 담은 PDF 파일을 인터넷에 올려두고 꾸준히 수익을 내는 방식, 디자이너가 아니어도 할 수 있다는 간단한 이미지 파일을 만들어 판매하는 것, 미국 주식투자, 웹소설 쓰기에 이르기까지 부수익을 올리는 방식도 다양하다. 연예인들도 ‘부캐’를 두고 여러 자아로 활동하는 시대에 직장인이라고 퇴근 후 제2의 직업을 가지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또 다른 자아실현의 장인 연예인의 부캐 활동과 달리 직장인의 부업은 직장에서 받는 고정 소득으로는 미래를 바라보기 어려운 청년 세대의 현실과 불안을 그대로 보여준다.

코로나19 이후 자주 보게 된 광고는 홈트레이닝을 도와주는 프로그램에 관한 것이다. 감염 위험으로 헬스장이나 요가원, 필라테스 센터를 이용하는 것이 어려워진 소비자를 위해 발 빠르게 등장한 서비스다. 매일 오늘 시청할 운동 영상을 보내주고, 트레이너와 1:1 채팅을 통해 식단 관리도 해준다. 운동 일정과 식단 관리를 도와주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각자 집에서 혼자 운동하는 것인데도 서비스를 이용하는 가격은 꽤 높다. 신청해볼까 어슬렁거리다 가격을 보고 놀란 나는 “아니 누가 신청한다고” 싶었지만, 곧 다음 달 신청이 마감되었다는 것을 보면 수요가 있는 모양이다. 코로나19 시대에도 건강을 돌보고 근사한 몸을 가꾸는 일을 향한 열망은 여전하다.

요즘은 인터넷 사용 기록을 바탕으로 개인에 맞는 광고를 보여주는데 여러 소셜 미디어 계정이 연동되어 있기 때문인지 한 번이라도 클릭한 광고에 대해서는 관련 업체 광고를 끊임없이 보게 된다. 몇 달 전, 1주일에 1번 정기적으로 샐러드를 배송해 주는 서비스를 이용한 적이 있는데 지금까지도 비슷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여러 업체의 광고가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타임라인에 뜬다. 비슷한 듯 다르게 반복되는 광고 속에서 몇 달 전 샐러드를 주문하면서 내가 가진 욕구와 필요가 영원히 그 자리에 머무르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한편 소셜 미디어를 이용하며 느끼는 것은 물건을 팔아야 할 회사들만이 아닌 자신의 소비와 생활을 보여주는 소비자들 역시 일종의 광고판이라는 것이다. 지인들의 소비는 더 확실하게 욕망과 불안을 강화하고 소비를 부추기기도 한다. 물론 나의 자아도 더는 변호사가 된 동기들이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외제차나 해외여행 사진에 욕망과 불안을 느낄 정도로 연약하지는 않다. 오히려 옛 동기들이 올리는 사진과 짧은 글에서 그들의 욕망과 불안을 읽어내며, 같은 교실에서 공부했던 우리가 지금은 얼마나 다른 세계 속에 살아가며 다른 가치를 좇고 있는지 확인할 뿐이다.

그러나 결혼정보회사가 유도하는 “네 조건으로는 결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무념하고, 친구들이 보여주는 화려한 일상에 욕망을 느끼지 않는다 해도 다른 종류와 차원의 욕망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리고 이 역시 새로운 종류의 소비를 끊임없이 부추긴다. 한동안 ‘환경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무언가를 끊임없이 사들였다. 친환경 소재로 만든 생활용품부터 동물 실험을 하지 않는 화장품, 다양한 색상의 에코백, 제각기 기능이 다른 텀블러까지 면죄부를 얻은 사람처럼 소비에 탐닉한 것이다. 진정한 녹색 소비는 친환경 물건을 계속 사들이는 것이 아니라 소비 자체를 절제하고, 자원을 아끼는 소비생활임을 몸과 마음으로 모두 받아들이는 데 꽤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이 소비의 근원에는 지구와 환경을 돌보는 마음 그 자체보다 나는 윤리적이고 가치 지향적인 소비를 하는 사람임을 보여주고 싶은 욕망이 깃들어있었음을 인정했다.

환경보호보다는 자기과시에 충실했던 잘못된 녹색 소비 탐닉이 끝나자 찾아온 것은 모순되게도 ‘미니멀 라이프’를 위한 소비의 유혹이었다. 10년 넘게 혼자 살며 켜켜이 쌓인 묵은 짐들을 털어내고 이제는 나도 단순하게 살겠노라 다짐했다. 추억이 깃든 물건들을 정리하고 나누고 일부는 당근마켓에 내놓아 판매했다. 그러나 ‘비움’에도 함정이 있었는데, 내가 원한 미니멀 라이프는 불필요한 물건을 비워내고 단순하게 사는 삶이 아니라 잡동사니 없는 깨끗하고 ‘하얀’ 집에서 살아가는 삶이었던 것이다. 오래된 짐을 비워낸 자리를 티 없이 깨끗한 하얀색 가구와 카펫 그리고 밝아진 집을 돋보이게 할 액자로 채웠다. 이번에도 역시 “아! 이거 아닌데”라고 느낀 것은 한 꺼풀 아래 숨겨진 내 욕망과 마주했을 때였다. 나는 이제 세상이 주입하는 욕망과 불안의 구조로부터 자유로워졌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저 조금 종류가 다른 유혹과 불안에 시달리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이번 사순 시기 동안 녹색 소비, 가치 소비, 미니멀 라이프를 위한 소비가 아니라 소비 단식에 도전해 보려 한다. 먹고 마시는 최소한의 소비마저 그만둘 수는 없겠지만 계절마다 사들이던 새 옷과 신발, 읽지도 않으면서 계속 주문만 했던 새 책들, 습관적으로 들르던 프랜차이즈 카페의 소비를 잠시 멈추는 것이다. 그리고 쉽게 떨치기 힘든 소비를 향한 유혹에 깃든 내 안의 욕망과 불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려 한다. 내가 느끼는 욕망과 불안의 근원과 마주하고, 그 해결책은 결코 소비가 아님을 되새기는 것이 타인의 욕망을 좇고 타인의 불안을 이용하는 이 위험한 시대를 건너는 방법임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 이 글은 종이신문 <가톨릭일꾼> 2021년 봄호에 실렸습니다. 

 

정다빈
예수회 인권연구센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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