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가난한 이들 속으로 들어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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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가난한 이들 속으로 들어가다
  • 최태선
  • 승인 2021.03.29 15: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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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얼마 전 태어난 손자로 인해 연일 즐거운 날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날마다 사진을 전송받아 보는데 그 녀석이 웃는 모습만 보아도 마음이 환해집니다. 찡그린 얼굴을 보면 무슨 일이 있나 상상을 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어제는 시장을 보았습니다. 저는 한 번 시장을 보면 두 시간 정도를 걷게 됩니다. 가장 싸고 좋은 물건들을 구입하기 위해 왔다 갔다 하기 때문입니다. 어제는 수산물 가게에서 랍스터를 보았습니다. 손바닥보다 큰 집게발을 가진 녀석이 6만 원이었습니다. 너무 멋있어서 큰 맘 먹고 살까 망설였습니다. 하지만 참았습니다. 다른 수산물 가게 아는 사장님에게 가격을 물었습니다. 그 정도 가격이 싼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예상대로 죽은 랍스터를 그 가격에 파는 것은 사기 수준이라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큼지막한 크레이피시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죽은 것이라 이만 원 정도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쪄지려면 삼십 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다른 가게에서 시간을 보낸 후 가서 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크레이피시와 함께 대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의 품질과 가격도 묻고 크레이피시와 대게 중 어느 것이 더 맛있느냐고 물었더니 대게가 낫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대게를 무척 좋아합니다. 큰 아이가 소래포구로 우리를 데리고 가서 연중행사로 대게를 먹었습니다. 큰 아이에게 전화를 걸어 대게를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는데 먹을 거냐고 물었습니다. 물으나 마나라는 걸 알지만 하루 스케줄을 알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무 일도 없고 사다 주면 너무 좋지만 그러면 자신이 너무 미안하지 않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런 건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 대게를 세 마리를 샀습니다. 큰 아이네 두 마리와 작은 아이를 위한 한 마리였습니다.

작은 아이를 차에 태워 출근 시켜주고 대게와 대게를 먹은 후 후식으로 먹을 딸기 주스와 몇 가지 다른 것들을 챙겨 싣고 큰 아이의 집으로 갔습니다. 아내가 아이를 안고 저는 대게를 잘라주었습니다. 같이 먹자고 딸 내외가 강력히 주장했지만 우리는 집에서 먹었다고 하고 먹지 않았습니다. 큰 아이가 살을 발라 입에 넣어주는 것을 어쩔 수 없이 한 번 받아먹었습니다. 내장은 따로 밥을 비벼 먹거나 라면을 끓여 먹을 것이라며 냉장고에 보관했습니다. 딸 아이 부부가 정말 맛있게 먹었습니다. 우리가 먹는 것보다 그렇게 잘 먹는 것을 보는 것이 더 행복합니다.

우리는 정말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그 행복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이브닝 근무를 마치고 작은 아이가 오기 전 대게를 먹기 좋게 잘라놓았습니다. 이번에는 계륵같은 다리 가장 마지막 부분의 살을 발라 먹었습니다. 국물로 라면도 삶아 먹었습니다. 맛이 좋았습니다. 국물 맛이 너무 좋아 라면 국물을 좀 남겨 놓았습니다. 작은 아이는 국물을 좋아합니다. 아이가 빗속을 발걸음도 가볍게 달려왔습니다. 작은 아이도 대게를 무척 좋아합니다. 내가 준비해놓은 대게를 정말 맛있게 먹었습니다. 작은 아이도 살을 발라 내게 주려고 다가왔지만 그걸 대비해서 미리 이를 닦았습니다. 작은 아이가 마지막 한 방울까지 대게를 즐겼습니다.

대게로 인해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이야기의 내용처럼 저와 아내는 대게를 안 먹었습니다. 비싸기 때문입니다. 참 이상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대게가 맛이 없어집니다. 사실 저는 회와 같은 생선살보다 조개나 게 종류를 좋아합니다. 생선회는 잘 먹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생각이 입맛을 변하게 합니다. 물론 제가 먹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면 다시 맛있어집니다. 어쨌든 저와 아내는 대게를 안 먹었지만 안 먹어서 더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대게를 먹지 않는 것은 그것이 너무 비싼 음식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능한 비싼 음식을 먹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도 가격이 비싸면 저는 맛이 없어집니다. 일전에 작은 아이가 십만 원이 넘는 일식집 점심식사를 사주었을 때도 저는 그 식사를 즐기지 못했습니다. 작은 아이도 저의 이런 행태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저를 비싼 음식점으로 데리고 갑니다. 따라가긴 하지만 저는 즐길 수는 없습니다. 아이가 그걸 무척 답답해합니다. 직장의 스트레스를 그런 곳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해소하는 측면이 있다는 걸 충분히 이해하지만 저는 그런 스트레스가 없기 때문에 그런 곳엔 가고 싶지 않습니다.

절약한 돈으로 노숙자 선생님이나 다른 힘든 분들을 돕는 것이 더 좋기 때문입니다. 저는 피곤을 덜기 위해 좋은 차를 타야한다고 말하는 목사들이 밉습니다. 목사까지 된 사람이(제 이런 표현을 가납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어떻게 좋은 차를 탈 수 있습니까. 목사는 당연히 피곤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목사가 피곤하다면 그것보다 당연하고 행복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좋은 차를 사지도 않지만 좋은 차를 태워주는 것도 싫어합니다. 목사라고 사람들이 저를 좋은 차에 타라고 하면 저는 그게 너무 싫습니다. 저는 가장 싸고 작은 차에 타서 그런 차를 타고 다니는 분과 대화하는 것이 더 행복합니다.

 

사진=한상봉
사진=한상봉

제가 오늘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가난을 이야기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 기사에서 “교회, 가난한 이들 속으로 들어가다”라는 부제를 보았습니다. 교회가 가난한 이들 속으로 들어가는 건 정말 고마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 부제를 보는 순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습니다. 교회가 가난한 이들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교회가 가난하지 않다는 말과 같습니다. 사실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보다 더 가난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사람들은 제가 이런 말을 하면 돈이 있어야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지 않느냐는 말을 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베드로가 말하기를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하고,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는 즉시 다리와 발목에 힘을 얻어서, 벌떡 일어나서 걸었다. 그는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다.

사도행전의 이 기사를 묵상해보십시오. 만일 베드로에게 은과 금이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은과 금의 일부를 나누어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걸로 끝입니다. 구걸을 하던 사람은 그 돈을 다 쓰고 나면 또 다시 구걸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에게 돈이 없었습니다. 돈이 없는 베드로는 그 사람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평생 걷지 못하던 그 사람이 걷고 뛰며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돈이 있었다면 베드로가 그를 도울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돈이 없기 때문에 일어난 일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돈이 없었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기적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성전 문 앞에서 구걸을 하던 그 사람이 성전 안으로 함께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저주 받은 죄 많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샬롬입니다.

교회가 가난한 사람 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정말 고마운 일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가난한 사람 속으로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부자라도 교회의 일원이 되기 전 가진 재산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거나, 그러지 못한 사람은 언제라도 교회에 돈이 필요한 경우가 발생할 때 사도행전의 초기 그리스도인들처럼 자신이 가진 땅이나 집을 팔아서 그것을 교회에 가져와야 하는 곳이 교회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부자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황금률이 무엇입니까. 복의 근원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은 부자로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늘 청승을 떱니다. 어제도 그랬습니다. 기왕 사는 거 대게 몇 마리 더 사서 다 같이 먹는 게 좋다는 것을 왜 모르겠습니까. 돈이 없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습관 상 저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는 돈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돈이 필요합니다. 돈은 베드로가 주님에게 그랬던 것처럼 저를 넘어지게 만들 수 있는 유혹입니다. 하지만 제가 그 유혹을 뿌리칠 때 그 돈은 가난한 사람들을 섬길 수 있는 유용한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이 모인 교회는 바로 그런 일들이 일상이 되는 곳입니다. 그런 교회에 하느님 나라가 임하고 열린다는 사실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가난한 교회에 하느님 나라가 임한다는 이 사실을 기억하시고 가난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진짜 축복을 누리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난한 이들 속으로 들어가는 교회도 좋지만 기왕이면 한 걸음 더 나아가 가난한 이들의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것이 언제나 청승맞은 저의 생각입니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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