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렛 예수는 진리와 자유가 같다고 언제나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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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렛 예수는 진리와 자유가 같다고 언제나 외쳤다
  • 박철
  • 승인 2021.02.15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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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칼럼

예수 이해의 새로운 지평

예수가 모든 사물에 비추어진 현상을 자기의 주관(主觀)에서 벗어나 객관화시켰다면 모든 시대성을 넘어서 예수의 종교적 진리를 간단히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로부터 세워진 종교가 오늘날까지 이어지면서 수많은 변천의 드라마를 연출하게 되었다. 예수의 생애 속에 나타난 여러 가지 사건들을 우리들이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기에는 조금 위험하거나 그렇지 못하다.

우리는 현대의 세계관 속에 예수의 생애를 도입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생애와 우리들의 세계관을 일치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예수를 너무 신격화 시켰다고 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한 칼 학과란의 말처럼, 초대교회에서 역사적 진리를 왜곡한 그 당시의 과오를 오늘날의 기독교가 지닌 진실성과 함께 비교해 보면 필자의 이야기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예수는 종교가 사물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무관심한 셈이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것 없이는 아무 것도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없고 사람이 힘차게 약동하는가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의 복음을 가르치려는 사람은 누구나 예수의 말씀의 본래 의미를 찾아내고 역사적 진리를 통하여 영원한 진리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교적 진리도 변천한다는 뚜렷한 사실을 인정하여야 한다. 르네상스 이후의 예술작품의 특징은 신적인 예수를 인간적인 예수로 만들어 버렸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 한다’는 명제는 서구인들에게 합리적인 사고를 하게끔 유도했다.

이런 합리적 사고의 결산으로 나온 것이 르낭의 <예수전>이다. 르낭은 프랑스에서 태어났으며, 종교사상을 공부한 사람이었다. 그가 <예수전>을 쓰고 공직에서 쫓겨난 적도 있지만 그는 용감했다. 당시 <기독교 기원사>, <이스라엘 민족사> 등을 합리적인 방법으로 서술하여 서구사회에 파문을 던졌다.

니체는 <즐거운 학문>에서 신의 죽음을 선포하였다. 동시에 그는 전통적인 서구사회에서 새로운 신의 탄생을 예고하였다. 동양적인 사고의 영향으로 서구인들은 춤추는 예수를 만들었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예언자>를 쓴 칼 지브란의 <사람의 아들 예수>와 <희랍인 조르바>를 쓴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다.

우리는 이 두 작품을 대하면서 인간이 경험하는 존재론적 양식에서 새로운 예수와 만나게 될 것이다. 예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곧, 종교와 문학은 같다는 객관적인 단언을 하게 될 것이다. 필자의 이야기가 건방지고 당돌하게 생각되어도 독자들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주기 바란다.

사람의 아들 예수

먼저 칼 지브란의 <사람의 아들 예수>를 살펴보기로 하자. 그가 <예언자>를 출판한 직후 <예언자의 동산>을 쓸 때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자신의 내면 세계에서 영감의 세계로 이르게 된다. 그때 유다가 그를 찾아온다. 그의 얼굴은 고통 받는 천사의 얼굴 같았다. 바로 그날 밤에 자기 가슴 속에 몇 해를 두고 품고 있던 <사람의 아들 예수>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형식화된 신앙 속에서 거의 죽어버린 예수를 살려내 보려고 애썼다. 그것을 위해 그는 날카롭고 풍부한 상상력으로 예수 당시의 77인의 사람을 동원해서 새로운 예수의 증언을 한 것이다. 예수는 바람을 타고 세상에 왔다. 어려서부터 나이답지 않게 어른 흉내를 내면서 풍부한 웅변으로 사람을 사로잡는 흡인력을 가졌다. 그는 언제나 사람들 옆에 서 있었다. 멀리서 피리 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피리소리는 병들고 무식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부는 피리 소리였다. 그는 꿈틀거리며 놀란 듯이 그 소릴 들었다. 예수는 울고 있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쏟아지는 별똥을 보았다. 그는 손에 세상을 볼 수 있는 거울을 들고 다녔다. 그 거울에 자신의 얼굴이 비친 것을 본 베드로는 그에게 푹 빠져들고 말았다.

예수는 사람들을 좋아했다. 그의 친구인 창녀들에게 “사람답게 살라”고 말했다. 이 한마디가 시(詩)로 들린 창녀들은 끔직하게 예수를 따랐고 좋아했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신비한 힘, 분명히 마술사였고, 요술쟁이였다. 단순한 사람들의 마음에 독을 먹였고, 마술을 하듯이 민중들을 사로잡았다. 한마디로 민중을 매력과 진언(眞言)으로 홀리는 자였다. 그는 바다와 하늘을 알았다.

그의 침묵 속에는 사막이 있었고, 그의 말 속에는 동산이 있었다. 산을 독수리가 아는 것처럼 알았고, 골짜기를 시내와 냇물이 아는 것처럼 알았다. 그는 시인이었다. 그의 심정은 저 높은 곳을 뛰어 넘었으며 그의 노래는 사람들의 귀에 들렸으며, 생명은 젊었고, 시간은 언제나 새벽이었다. 그가 지닌 한 줄의 거문고는 우뢰의 웃음소리와 비와 눈물과 바람 속에서 있는 나무들의 즐거운 춤의 소리를 퉁겼다.

그는 자신이 예수로 불리기를 원했다. 그 이유는 그 자신이 주림과 목마름을 아셨고, 또 사람이 그의 더 크신 자아를 찾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갈릴래아 사람은 하나의 술꾼이며, 땅꾼이며, 그 깨끗지 못한 목소리로 “만세, 호산나”하는 소리를 들어주고 그 명령에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 좋아서 아무 희망이 없는 불쌍한 것들의 심정에 기운을 대어주는 사람이었다. 세례 요한은 말한다.

“독사들이 나를 잡아 가두었다. 예수에게도 손을 댈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자기의 말씀을 다 선포하기 전에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기실 것이다. 그의 전차가 저들 위로 지나갈 것이요, 그의 말발굽이 저들을 짓밟아 버릴 것이다. 그는 이기실 것이다. 저들은 창과 칼을 가지고 나오겠지만, 그는 그의 영의 힘으로 저들을 대하실 것이다.”

나사렛 예수는 진리와 자유가 같다는 사실을 언제나 외쳤다. 이 때문에 가롯 유다는 칼과 창을 든 로마 군인과 도끼를 든 예루살렘 사람들을 몰고 와 예수에게 키스를 했다. 사람의 아들 예수는 잡히고 말았다. 그가 잡히던 날 닭이 세 번 울자 먼동이 훤히 밝았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의 거문고에서 흘러나온 피는 이 땅을 새롭게 했다.

그는 오늘 우리들을 향해서 걸어오고 계시다. 어떤 화살도 어떤 창도 그의 걸음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 그는 우리를 굽어보시고 우리의 모든 삶 속을 향해 오고 계시다. 시인이었던 예수는 공중의 새와 같이, 들의 백합 같이 미소를 띠고 우리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계시다.

 

 

최후의 유혹

다음은 카잔차키스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1883년 그리이스의 크레테 섬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시절 터키의 압제 밑에서 반(反)터어키의 크레테 섬의 사람들 사이에서 혁명적인 기질과 영웅주의 영향을 받으며 자라났다. 그러다가 1897년 터키 독립전쟁으로 낙소스로 이주해서 아테네 대학을 마치고 다시 파리에서 철학자 베르그송 밑에서 공부했다.

그때 고행을 통한 영적인 확신을 얻기 위해 마케도니아에 있는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그는 고행을 통해 구세주를 면대해 보려고 노력했으나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로부터 베르그송, 니체, 불교철학, 심령치료사 등을 섭렵했으나 그 어느 것에도 만족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예수가 자기를 떠났다고 찔끔거렸으나, 모든 사상을 거부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리스도에게 자제와 극기를 통하여 영원한 자유와 구원을 이루는 위대한 이상의 실존을 보았다. 그가 남긴 작품으로는 유명한 <희랍인 조르바>, <자유와 죽음>, <하느님의 가난한 사람>,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등이 있다. 1953년 이래 백혈병을 계속 앓다가 주치의의 간곡한 충고를 외면하고 중국에 다녀오다가 1957년 천연두 예방주사를 맞고 죽었다.

그의 임종을 현대의 성자 슈바이처가 지켰으며 그의 소설에 나오는 거인이 그의 하관을 도왔다는 것은 그의 생애의 사족이다. 그의 무덤에는 이런 비문이 새겨져 있다.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았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만 나는 자유로웠을 뿐이다.”

 

박철
탈핵부산시민연대 상임대표
샘터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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