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리는 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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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는 정선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1.02.01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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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오늘생각 2021.1.30.

1. 강원도 정선. 몇 주간 벼르다 새벽같이 차를 몰았습니다. 코로나 영향인지 길에 차량은 많지 않았고, 그래도 4시간 가량 달려서 제천을 거쳐 정선에 닿았을 때 눈발이 조금씩 날리기 시작하더군요. 지난 목요일이었습니다. 강설과 강풍 예보가 있었지만, 다시 미루면 언제 가게 될지 몰라서 마음을 낸 김에 가게 된 것이지요. 아직도 높은 고개를 세 개나 넘어야 닿을 길이었습니다. 그이의 집에 닿았을 때는 세설이 함박눈이 되었습니다. 이제 고개는 막혀, 눈이 녹을 때까지 집에 돌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2. 포장된 신작로가 끊어진 곳에서 그 집 진입로가 시작됩니다. 사실은 이곳엔 길이 없습니다. 집과 신작로 사이엔 계곡이었고, 비가 오면 이 계곡은 아무도 지나갈 수 없는 물길이 되겠지요. 신작로 끝에 주차하고, 마중나온 그니를 따라서 계곡 돌밭을 걸어서 십여 분 걷다보면, 왼쪽 오르막으로 그 집 대문이 보입니다. 그곳엔 그 집 밖에 없고, 장마가 지면 오도가도 못하는 고립된 땅에 집을지었습니다. 다행히 농사용 전기가 들어와 쓰고 있지만, 인터넷도 전화도 두절인 세상입니다. LGT만 핸드폰이 터진다고 하네요. 집은 부부 둘이서 직접 지었답니다. 솜씨가 대단합니다.

 

사진=한상봉
사진=한상봉
사진=한상봉
사진=한상봉
사진=한상봉
사진=한상봉
사진=한상봉
사진=한상봉

3. 제 친구 한서정은 이곳 정선에 자리잡기 전에 제주에서 '카라'라고 하는 표현예술심리치료센터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그 집도 참 예뻤는데, 산악에 가로막힌 이 집은 더 예쁩니다. 주변환경이 그대로 그림이 되고, 이렇게 눈발이 사정없이 사방에서 몰아치는데, 영화가 따로 없습니다. 이 고적한 땅에서 행복해 보이는 두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인도 여행중에 만나 사랑을 하고, 말 그대로 "Art of Living'을 살고 있습니다.

4. 이 집 김치와 동치미 맛이 끝내줍니다. 이날 저녁은 스파게티, 다음날 아침은 누룽지였고, 풍미를 더해주는 커피 때문에 행복한 1박2일입니다. 이 산골에 들어오면서 두 사람은 차를 버리고, 대중교통을 이용합니다. 가능하면 장을 보지 않고 봄여름가을 키워낸 작물로 식사를 합니다. 저희에게 부탁한 것이 빵과 커피콩이었으니, 아마도 이게 그들이 누리는 복된 호사였던 모양입니다.

5. 이십년 전이지요. 저희가 전라도 무주 산골에 귀농하였을 때, 한서정이 처음 저희 집에 찾아왔습니다. 당시 마을 대표 역할을 하시던 허병섭 목사님 댁에 왔다가, 아마 목사님이 저희 집을 소개한 모양입니다. 귀농자 가운데 글쓰는 가톨릭 신자가 있다고. 한서정은 김제의 어느 공소에 살고 있었고, 그곳에 놀러가서 공소 마당에 있는 감을 따던 생각이 납니다. 바지런하고 씩씩한 한서정입니다. 아마 저랑 나이가 같아서 더 친해진 것 같아요.

6. 참 관계란 게 복잡합니다. 한서정은 김제 글라라수녀원에 있던 안신정을 만나 새로운 인생의 물길을 열었다고 해요. 그 한서정이 우연히 제 집을 찾아와 저랑 친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안신정이 제안해서 제가 표현예술심리치료 공부를 하게되었고, 안신정은 제 딸아이가 무주성당에서 유아세례 받을 때 대모가 되어 주었죠. 나중에 안신정은 지리산에 살다가 출가해서 스님이 되었습니다. 그이가 정연재마 스님입니다. 가톨릭 영성과 불교 수행의 세례를 듬뿍 받은 사람입니다.

 

7. 이날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시절인연이라는데, 시절을 넘어 사귀고 만나는 인연도 있는 법입니다. 근원에서 닿는 구석이 있다면 정연재마 스님이나 한서정이나 목숨이 닿는 길까지 동반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8. 이날 나눈 화두 가운데 하나가 "쓰레기를 만들지 않는 삶"입니다. 제가 파주로 이사 와서 가장 골치거리가 쓰레기 문제입니다. 날마다 쌓이는 쓰레기, 그중에 마트와 택배로 인한 포장재가 갖는 비중이 상당하더군요. 아파트에 살 때도 보면, 한 주일에 두어번 재활용 쓰레기 내놓는 날이면 단지 앞에 박스며 플라스틱, 비닐이 산처럼 쌓입니다. 듣기로는, 재활용 분류를 해서 내놓아도 결국 비용 때문에 한꺼번에 폐기하는 모양입니다. 그 산처럼 쌓인 쓰레기가 쌓여 쓰레기 산맥을 만들겠지요.

정선 이 집에선 쓰레기가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물건이 별로 없고, 내부에서 생산된 것은 쓰레기가 아니라 퇴비가 되겠지요. 그래서 한 가지 다짐을 합니다. 가능한 집가까운 이마트나 다른 대형매장이 아니라 매월 1일자와 6일자에 열리는 금촌 재래시장에 가자고 말입니다. 예전 파주 등기소 인근에서 열리는 장터는 사뭇 다른 풍경이겠지요.

 

9. 이날 저희가 이십여 년 전에 지리산 모악산 기슭에서 만났던 백인과 인덕 님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예전에 노동운동을 했다는 백인 님은 홀로 산에서 수행하던 인덕 님을 만나 농가집 하나를 얻어 살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처음 그곳에서 한 일은 모악산 계곡에 처박혀 있던 쓰레기를 치우는 일이었습니다. 이들이 산에서 들어낸 쓰레기는 시에서 화물차로 가져갑니다. 1톤 트럭 여러 대가 싣고 갔다고 해요.

그 쓰레기가 사라진 곳에는 샘이 있었고, 묻혀진 샘을 찾아내 그 물을 먹고 살았습니다. 그것도 하루 한 동이만 길어 갑니다. 물 한동이로 하루에 쓸 물을 아껴가며 씁니다. 겨울이어도 장작을 쌓아놓지 않고, 매일 산에서 부러진 가지들을 거두어 그날 하룻밤 구들을 데웁니다. "오늘 저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하는 기도가 그대로 삶으로 꽂히는 사람들입니다. 따로 돈벌이 하지 않고, 소금을 구워 주변 농부들의 쌀과 바꾸어 먹던 사람들입니다. 전기를 끊어버린 이 집에서 그날 밤 촛불을 켜고 앉아 먹던 나물과 대통 밥이 기억납니다. 참 소박하지만 거룩한 밥상입니다.

10. 인연의 물길을 열어가시는 주님은 찬미 받으소서.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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