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저널리스트, 도로시 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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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저널리스트, 도로시 데이
  • 로버트 콜스
  • 승인 2021.01.24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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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콜스 [Dorothy Day, a Radical Devotion] -2

도로시 데이의 가족 배경을 보면 성실하고 애국적인 중산층 가족이었다. 그의 아버지 가족은 스코트랜드­아일랜드 계통이었고 테네시에 자리를 잡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남북전쟁 때 남부 편에서 싸웠다. 어머니가족은 영국 계통이었고 뉴욕 북부에서 왔으며 전쟁 때 북부 편에 있었다. 그의 부모는 그리니치 빌리지의 페리 가에 있는 감리교회에서 결혼했다. 아버지 존 데이는 저널리스트로 경마에 열중했으며 후에 플로리다의 첫 번째 경마장인 하일리야를 설립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세상을 떠날 즈음에 그는 경마사업을 감시하는 뉴욕주 위원회의 위원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이들을 돌보고 격려했으며 무엇이 문제이고 아닌가를 그들에게 말하곤 했다.

존과 그레이스 데이의 세 번째 아이이며 첫 번째 딸인 도로시 데이는 1897년 11월 8일 뉴욕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두 오빠들, 도날드와 샘 휴스톤은 둘다 존경받는 보수주의자 저널리스트들이 되었다. 도로시의 유일한 여동생 델라는 도로시 보다 두살 아래였고 언니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도로시가 7살인 1904년 가족은 뉴욕에서 샌프란치스코로 이사했다. 1906년 샌프란치스코의 지진 때문에 많은 건물들이 무너졌고 그중에는 존 데이가 스포츠 작가로 일했던 회사건물도 있었다. 데이 가족은 곧 시카고로 떠났고, 그들은 시카고 남부 지역에 자리를 잡았다. 1907년 아버지가 시카고의 한 신문에 스포츠 편집인으로 일자리를 얻어 가족은 시카고 북부지역으로 이사했다.

16살 때에 도로시는 울바나에 있는 일리노이 대학교에 입학하였고, 그는 그곳에 2년을 머물렀다. 학교에 있는 동안 그는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불렀고, 수십 년 전 남부와 목초지방 지역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던 미국 인민주의를 신봉하고 있는 사람들과 우정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대학에서 그는 보통성적의 학생이었다. 장학금을 받기 위해서 그는 허스트 신문이 주최하는 대회에서 이겼고 지역 Y에서 침대카바와 식당일을 하였고 교수들의 집안일을 하기도 하였다. 그도 역시 저널리스트, 작가가 되려는 꿈을 갖고 있었다. 그는 부유한 유대인 기업가의 딸인 레이나 시몬스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같은 학교 학생이었다. 곧 둘은 사회주의에 대한 희망과 관심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 두 학생들은 좋은 친구가 되었고 한 방에서 지냈으며 충격적으로 극적인 특별한 삶들을 살게 될 것이었다.

레이나는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중국을 거쳐 러시아로 갔다. 그의 ­정치적 도덕적 순례­는 빈센트 쉬안의 <개인적 이야기>에 나타나 있다. 빈센트는 레이나와 결혼하기를 간절히 원했고, 레이나도 그에게 확실히 끌렸지만, 결혼을 거부하였다. 레이나는 1927년 모스코바에서 뇌염으로 죽었다. 도로시 데이와 만난지 약 10년이 넘어서였다.

 

사회주의 저널리스트, 도로시 데이

19살이 되었을 때 도로시 데이는 대학을 떠나 뉴욕에서 살면서 사회주의 신문인 「부름」에 리포터로 일하고 있었다. 져널리스트로서의 삶이 시작되었고 죽을 때까지 그 삶은 계속될 것이었다. 20대 초반에 그는 진보적인 그리니치 빌리지 지역에 매우 빠져들게 되었다. 그의 관심과 참여는 이론과 이념에 근거하기 보다 주변세계에 대한 관찰과 정의에 대한 열정적인 감각에 근거하고 있었다.

그는 일차세계 대전 후 미국에 남아있었던 가난과 고통에 관한 “정상으로 돌아가자” 같은 팜플렛을 작성하는 일을 하였다. 그는 특히 나라를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끌렸다. 그들은 노동조합 조직과 피켓시위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뉴욕의 지식인들이 누리는 즐거움에서 등을 돌리지 않았다. 한동안 그리니치 빌리지의 맥도갈 가에 살면서 그는 계속되는 대화 속에 몰두하는 것 같았다. 점심 저녁식사 모임,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 위한 생각에 눈을 뜨고 다른 사람한테 알리는 것을 거의 참지 못하면서 생각들과 함께 잠드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1917년 겨우 20살에 그는 이미 워싱톤 감옥에 있었는데, 여성 참정권 운동자들과 함께 행진을 한 탓이었다.

뉴욕시로 돌아온 그는 다소 목적이 없었다. 그는 「부름」을 떠났고 한동안 간호원이 될까도 생각했다. 그는 부르클린의 킹스 지역병원에서 1년동안 훈련을 했으나 필요한 훈련을 계속할 수가 없어서 그만 두었다. 그는 「해방자」라는 급진적인 잡지에서 일했다. 그는 프로빈스 타운극장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유진 오닐과 긴 얘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매우 가까워졌고 친구로 알려졌으나, 관계가 얼마나 계속 되었는가는 분명치 않다.

그는 라이오넬 모이즈라는 거칠은 전직 신문기자와 불행한 애정관계에 빠지게 되었는데, 임신을 하고 낙태를 했으며 얼마되지 않아 그 충격으로 별로 알려진 것이 없고 8번이나 결혼했다는 소문이 돌았던 바클리 토비라는 사람과 결혼하였다. 그들은 1920년 유럽으로 건너갔고 일년동안 그곳에서 살았다. 도로시 데이는 그때 술을 많이 마셨다고 말한 적이 있다.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영원히 갈라섰다.

감옥살이에 대한 회고

도로시 데이는 시카고로 돌아가기로 결정했고, 그곳에서 중서부의 옛 친구들을 찾아보았다. 1920년대 미국의 보수주의에 대한 그들의 인민주의적 비판은 전혀 감소되지 않았다. 그곳에서 그는 다시 한번 감옥에 갔는데, 당시 “공산주의 사냥” 시절에 국제노동자연맹의 “위험한” 친구들과 피켓시위를 한 때문이었다. 그는 감옥에 며칠밖에 있지 않았지만, 그 특별한 체험에 대하여 늘 강한 기억을 갖고 있었다. 물론 감금되었다는 느낌도 있었지만 감옥에 갇힌 사람들과 함께 그들을 가두는 사람들의 인격이 파괴되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감옥에 들어온 다른 사람들, 경범죄로 갇힌 가난한 사람들, 슬픈 사람들이 죄가 있든 아니든 간에 갈곳이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결코 약하지 않았던 그의 감상적인 측면이 이 사람들의 구체적인 잘못들을 무시해 버리려고 노력했는지도 모른다. 이 감옥 경험에 대한 그의 이야기는 주로 한 방에 있었던 매춘부들에 대한 것이었는데, 특히 그들의 고집스러운 단호함과 그에게 보여준 관대함, 친절에 대해서였다.

나와 대화를 하는 중에도 그는 자주 그 감옥이야기로 돌아가곤 했다. 한번은 “그 때 감옥에 있었던 경험은(삶에서 온갖 정서적 혼란을 겪은 후)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관점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나에게 말했다. 그는 미국에 대한 평등주의의 꿈으로 가득 차서, 국제노동자연맹 친구들과 같은 정신을 갖고 감옥으로 갔다. 그리고 함께 있었던 여성들에 대한 덜 낭만적이고 구체적인 기억들을 갖고 감옥을 떠났다. 도로시 데이는 그들의 운명에 대해서 도덕적인 성찰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때쯤, 그는 감옥에서 지내는 동안 그를 도와준 여인들의 친절하고 사려 깊은 측면과 다시 거리로 돌아가 몸을 팔거나 훔치고 다른 사람들에게 잔인할 정도로 무관심한 또다른 측면이 함께 있다는 역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매리앤에게 배운 것

함께 얘기하면서 나는 자주 그가 어떤 기억들에 대해서 불편하게 느낀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것은 실제로 그의 초기 삶과 “방랑적인” 과거에 대한 불편함이었다. 그는 후반의 삶에 힘으로 남아있었던 과거의 어떤 측면들에 대해서까지 불편한 것 같았다. 그것은 작가로서, 정치운동가로서, 도덕적인 원칙들을 고수하기 위하여 사회의 규범을 깨뜨릴 준비가 되었던 한 여성의 측면들이었다. 여러 차례 그는 그의 “삶이 진짜로 시작된 것"은 ”피터 모린을 만났을 때“였다고 말했으며, 내가 이의를 제기할 때 불쾌하게 여겼다. 그러나 그의 삶에서 보여지는 연속성은 놀라운 것이었다. 1920년 초기의 “빠른” 삶과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의 삶 속에서 똑같은 의식과 이상들이 발견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노동자연맹 사건과 감옥생활을 기억할 때에 그는 특별한 감옥친구, 매리앤에 대하여 말하곤 했다. 매리앤은 특히 사려가 깊었고 도로시 데이가 철창 뒤의 삶을 훨씬 더 잘 견딜 수 있게 해주었다. 교육을 거의 받지 않았고 “거리의 여자”였던 매리앤은 그러나 피터 모린 못지 않게 도로시 데이에게 스승이었다. 도로시 데이가 기억했던 것처럼, 매리앤은 오직 몇 년 후에야 “시작된” 도로시의 삶에 메시지와 영향력으로 좋은 스승이 되었다.

“난 아직도 매리앤이 나에게 살아남는 법을 가르쳐주던 것이 들립니다 ­ 감옥을 운영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잘 지낼 수 있는지 말입니다,” 라고 그는 나에게 말했다. 그리고 매리앤의 가르침을 알려주었다.­ 그것은 윤리적 훈계와 실제성의 혼합이었다: ‘당신은 고개를 높이 쳐들고 당신이 그들을 무서워하거나 어떤 것을, 어떤 호의나 그 어떤 것도 구걸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아무런 힌트도 주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들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합니다 ­ 그들도 감옥에 있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마세요.‘” 잠깐 멈춤이 있었고 말이 이어졌다: “나는 그 경고를 수없이 많이 기억합니다. 매리앤은 조직화된 종교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고등학교도 끝내지 못했으나 머리와 마음속에서 우리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 있었습니다. 그때 내가 다가갈 수 있는 것보다 더 가까이 있었지요. 누가 알겠습니까,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가까이 다가갔었는지.”

도로시 데이, 성경을 읽다

감옥에 있는 동안 도로시 데이는 성서를 읽었고 시편에서 특별한 위로를 얻었다. 그러나 아직도 “제도적 종교”에 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시카고에서 그는 저널리스트로 계속 일했고 청소년들과 매춘부들을 법정이 어떻게 대우하는지 조사했다. 또한 그는 도서관의 직원으로 한동안 일했고, 교정원으로, 식당 회계로, 그리고 백화점의 직원으로도 일했다. 심지어 미술학급에서 모델노릇을 하기도 했다. “표류하고 있었다”는 말이 이 시기 그의 삶을 표현해주는 적절한 말이었다.

그렇지만 이일 저일 생계를 위해 일하면서 그는 온갖 사람들이 노동하면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단지 “방문만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16살에 대학에 가기 위해 집을 떠난 후로 그는 자신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다. 아버지와 오빠들은 그가 살아가는 방식, 정치적인 공감대나 행동주의를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1920년대에 한 여성이, 그것도 사회 경제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미국의 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한 여성이 적절한 일을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동안 그는 뉴올리언즈에서 살아봤는데, 프랑스 구역에 살면서 저널리스트로서 억압받는 여성들에 대한 관심을 다시 가져보기도 했다. “나는 댄스홀 소녀들에 대해 썼습니다,” 라고 말한 적도 있다. 그들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 그가 그런 여성들이 경험하는 것에 공감하는 것과, 그의 친구 유진 오닐 처럼 기꺼이 그런 여성들을 도덕적으로 흠이 있고 의심스러운 사람들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나머지 우리들을 심판하는 사람들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다시한번 볼 수 있다. (계속)

[원출처] <Dorothy Day, a Radical Devotion>, Robert Coles, 1987
[번역문 출처] <도로시 데이, 뿌리로부터 온전히 살다>(<참사람되어>2002, 7월호)

로버트 콜스(Robert Coles)
하버드 의과대학의 정신의학과 및 사회윤리학과 명예교수. 청소년 문제 상담 전문가로 활동해 왔으며, 50여 권이 넘는 책을 집필한 작가. 1973년 미국의 다양한 계층과 인종의 아이들을 직접 취재하고 분석한 <위기의 아이들>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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