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사랑할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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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사랑할뿐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1.01.23 21: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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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오늘생각-2021.1.10

1. <성서와 함께>에서 하는 강의 준비 때문에 요 며칠 정신없이 바빴습니다. 매사에 공적인 일은 기한이 있는 것이어서 마음을 다급하게 재촉합니다. 어제 예정된 일을 마치고, 주일인 오늘은 좀 쉴 수 있으니 여간 다행인 게 아닙니다.

2. 오전엔 밀어두었던 집안 청소를 했습니다. 재활용 쓰레기도 분류하고, 구석구석 때를 벗겨내며 집안을 정돈합니다. 설거지가 그러하듯이, 내가 몸을 움직이는 만큼 깨끗해지는 공간을 바라보는 마음은 참 충만합니다. 일한 보람이 눈에 뜨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세상도 그렇게 우리가 애쓴 만큼 따박따박 제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잠시 생각합니다.

3. 코로나와 강추위로 저를 포함한 누구든 잠시 안으로 움츠러들고, 혼자만의 시간을 더 많이 가졌음직 합니다. 오늘은 볕이 조금 따뜻해지고, 아침부터 길고양이들이 밥을 먹으러 옵니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우울감'이 밀려오기 십상인데, 이젠 몸보다 마음이 먼저 지치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사진=한상봉
사진=한상봉

4. 앤서니 스토(AnthStorrony, 1920-2001)란 분이 지은 <고독의 위로>라는 책이 눈에 들어옵니다. 오늘의 렉시오 디비나로 적당합니다. 그는 "우리가 지금 고독해야 하는 이유"라는 장에서 윌리암 워즈워스의 글을 인용합니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우리 모두
좋은 본성과 너무도 오랫동안 떨어져 시들어가고,
일에 지치고, 쾌락에 진력이 났을 때
고독은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가."

5. 그리움이 사무치는 것은,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동떨어져 가슴앓이를 해봐야 사랑이 성장합니다. 사람이 지금 그토록 보고싶다면, 아마 지금에야 사람 귀한 줄 알았기 때문일 겁니다. 어젯밤에 정진영 감독의 <사라진 시간>(2019)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화재사건을 수사하던 형사가 어느날 밤 만취해 잠이들고, 깨어나 보니,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알아보고, 원래 살던 집과 가족이 증발해 버립니다. 나는 그대로인데, 나를 뺀 나머지 세계가 나와 상관없이 재구성된 것입니다. 예전에 알던 그 사람들이 "바로 그 " 사람이 아닌 거지요. 예전에 사랑을 나누었던, 사랑을 주던 대상들이 사라진 지금, 그이는 변한 세계를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당혹스럽게, 그러나 서서히 어쩔 수 없이.

4. 그래서 이런 말이 나오는 거겠죠.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하라고. (더 가슴아픈 일이겠지만) 사랑하고 사랑 받을 테지만, 그 사랑에 머물지는 말라고.

 

5. 월리엄 워즈워스는 그 고독 속에서 "불멸의 영혼"을 전합니다.

"우리는 먼지와 같지만, 불멸의 영혼은 음악의 화음처럼 자란다. 조화롭지 않은 요소들을 조화롭게 하고, 그 요소들을 하나의 공동체 속에서 밀착하게 만드는 어둡고 신비한 능력이 존재한다."

6. 그 어둡고 신비한 능력을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거룩한 영"의 작용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서로 일치하게 만드는 사랑의 작용이겠지요.

7. 이참에 사랑이란, 언제나 상대적이라는 말을 의심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만큼 그 사람도 나를 사랑하겠지, 하는 생각은 미망입니다. 단적으로 부모가 아무리 자식들을 사랑해도 자식들은 그만한 사랑으로 부모에게 되갚아 주지 않습니다. 그래도 좋은 게 진짜 사랑입니다. 나는 그 사람이 별로인데 그 사람은 나를 사랑할 수 있고,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 불가해의 바다에서 중요한 건 "그저 사랑할뿐"이겠지요.

8. 요즘 코로나 확진자가 며칠째 600명대라고 합니다. 조금 줄어들었는데, 조금씩 사정은 더 나아질 것이라 "믿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내가 가진 사랑의 총량"을 늘려가고 더 충분히 비축해 두어야겠지요. 그 에너지를 눈에 보이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시간이 오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여전히 눈빛을 바라보아야 사랑에 빠지고, 손이 맞닿아야 우정이 확인됩니다.

9. 여전히 행복하시고, 주님 안에서 햇살을 즐기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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