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민석을 변호한다
상태바
설민석을 변호한다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1.01.23 21: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상봉의 오늘생각-2021.1.4.
사진=한상봉
사진=한상봉

"연민의 원리는 모든 종교적 윤리적 영적 전통의 핵심에 놓여 있다. 자신이 대접받고 싶은 대로 타인들을 대접하라는 것이다. 연민을 품고 있으면 동료인 인간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쉬지 않고 힘쓰게 된다. 세상의 중심에서 자신을 끌어내리고 거기에 타인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모든 개개인의 불가침한 신성을 존중하게 된다. 모든 사람을 예외 없이 절대적 정의로움과 공정함과 존중감을 갖고 대하게 된다. "

1. 파커 J. 파머는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에서 가톨릭교회의 수녀에서 종교학자로 인생의 좌표를 옮긴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이 <연민의 헌장>에서 전한 말을 위와 같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타인에게로 마음의 방향이 기울어진 이들은 특별히 이 세상에서 고통받고 있는 이들에게 영혼이 온통 사로잡혀 있게 됩니다. 정치적 좌파의 바다에 몸을 던진 이들도 그렇고, 예수를 액면 그대로 따르고자 원했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마음도 그러할 것입니다. 암브로시우스와 같은 초기 교부들의 가르침엔 하나같이 이런 '연민'이 온통 그 사람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2. 김용균을 아직도 기억하는 사람들, 여전히 김진숙 곁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제주 강정의 초라한 성소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해마다 구묘역과 신묘역을 아울러 광주 망월동을 참배하는 사람들, 조성만과 노무현을 추모하는 사람들, 열사들의 이름을 목이 쉬어가며 부르던 문익환 목사님을 기억하는 사람들, 대형마트 하급노동자들을 위해 신명을 바치는 사람들, 거리에서 노숙인들에게 밥을 주는 사람들........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보이게 또는 눈에 띄지 않게 세상과 인간을 향한 연민을 매일같이 두 손으로 감당하고 있을 겁니다. 이 사람들에게 "사랑은 있다"고 애써 발음하고 희망을 찾습니다.

3. 그래요, 이제 설민석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이는 단국대학교에서 연극영화과를 나와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역사교육을 전공했다고 합니다. 최근에 팩트 오류와 석사논문 표절 문제로 논란이 되고 있고, 본인 스스로 "급사과하고, 모든 방송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습니다. 구구절절이 여기서 팩트와 표절 문제를 다룰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중강연을 하다보면, 불확실한 기억에 의존해 말하기도 하고, 석사논문은 어차피 출처를 얼마나 세밀하게 밝혔느냐의 차이만 있을뿐 "독자적인 고유한 학문적 성취"를 다루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그가 일반대학원에서 학자가 되기 위해 공부한 것이 아니라 교육대학원에서 공부했다는 점도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에게 학문적 엄중함을 요구하기엔 무리가 있다는 말입니다.

4. 문제는 그가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는 -그것도 방송에서- 강사라는 거죠. 그것도 "역사적 사실"에 초점을 두고 있는 그야말로 '역사'분야를 다루기에 더 문제가 된 것은 이해할만 합니다. 그가 철학강사였다면 문제가 좀더 쉬웠을 텐데 말입니다. 주관성을 배제한 엄정한 객관적 역사서술...어쩌구 하는 분야에 뛰어든 설민석이 불구덩이에 섶을 지고 들어간 격입니다. 나는 그를 전혀 알지 못하지만, 드러난 상황만으로도 그의 곤혹스러움을 알 것 같습니다. 이참에 생각나는 건, "사과없이 사면?" 운운하는 박근혜이명박보다는 설민석이 백배 천배 나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구구한 변명없이 이렇게 칼같이 사과하는 사람을 나는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이점에서 그이는 참 선한 사람이고 바른 사람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5. 여기서 묻고 싶네요. 지금도 광주항쟁을 두고도 갑론을박이 많은 시대에 연극대본을 쓰는 것과 역사서술을 하는 것과 얼마나 큰 거리가 있는지 의문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무대에 선 배우처럼 살아가고, 이 연극같은 인생을 엮어낸 것이 역사라는 생각을 할 때도 많기 때문입니다. 연극이든 역사든, 이걸 통해 무엇을 하자는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설민석은 팩트체크에 실수가 있었을지언정 그의 역사관은 "비통한 자들을 위한" 것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의 진보적 견해가 "참여없는" 학삐리들에게 불편했겠지요. 유명한 타인을 끌어내리면서 자신의 "학문적 선명함"을 드러내고 싶은 어느 누군가의 욕망의 결과가 "설민석의 추락"이었는지도 모릅니다.

6. 참고삼아 말씀드리자면, 저는 서강대 사학과 출신입니다. 그런데 역사에 대해선 좃도 모릅니다. 대학원에선 신학을 전공했지만, 석사논문으로 쓴 것은 제 관심사에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역사든 연극이든 신학이든 평생 배우며 의식의 지평을 넓혀갑니다. 평생 학생이고, 또한 배운 만큼, 알아차린 만큼 가르치는 선생이기도 합니다. 학생과 선생 사이에서 설민석과 마찬가지로 저 역시 한계를 느끼기도 하고 "공부의 기쁨"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니, 지저분한 몇 가지 잣대로 '공부하고 가르치는'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자질을 보고 사람을 격려하고 교정하고 지지하는 풍토가 아쉬운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7. 말 나온 김에 한 가지 더. 저는 말끝마다 "박사" 운운하는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특정대학이나 단체에 소속되어 있다면 00"교수님"나 "00장님"이라고 불리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00박사님"이라고 소개하고 소개받는 걸 자주 목격합니다. 박사학위를 받았으니 "00박사"라고 부르는 게 아직 학사학위를 받지 못한 신학생들에게 "학사님"이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덜 민망하지만, 눈꼴이 시린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참고로 저는 박사학위없는 "석사"입니다만, "00석사님"이라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분이 교수든 박사든 모두 그저 "00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때로 그렇게 저를 불러주는 것도 그닥 싫어하지 않습니다.

8. 선생님, 이라는 말처럼 좋은 말은 없습니다. 저는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00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그가 박사든 교수든 소방관이든, 가정주부든, 무직자든 학생이든 상관 없습니다. 예전에 무주에 귀농해 살면서 "표현예술심리치료"를 공부하러 다닌 적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저는 강사든 학생이든 모두가 모두에게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붙이는 걸 봤습니다. 지금 학생이었던 사람이 언제 선생이 될 지 모르고, 모든 이가 서로 존중하는 풍토를 만들기 위함이라 들었습니다. 사실 이 분야에선 내가 학생이지만 저 분야에선 선생이 될 수 있습니다.

9. <미스터 선샤인>이라는 드라마를 기억하시나요? 내놓으라 하는 양반집 규수 김태리가 처음 산중으로 총포술을 배우러 천민인 최무성을 찾아갔을 때 이야기를 나누던 장면이 지금 보아도 흐믓합니다. "애기씨, 지금 이 순간부터 소인이 애기씨의 스승입니다." "허니 하대는 곤란하겠죠, 스승에게." 양반과 천민이 뒤바뀐 스승과 제자로 만나는 순간이다. 우리는 수시로 때때로 이런저런 이유로 누구에게나 배우고 누구에게나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모두가 "선생님"이라 불릴 자격이 있습니다. 장일순 선생님이 식당하는 이에게 "이집에 밥 먹으러 오는 손님들이 하느님이다. 그이들 때문에 네가 밥을 먹으니." 라고 하신 것처럼, 노숙인들도 선생이고, 갑남을녀 모두가 선생이고, 또한 학생이라고 여기면 얼마나 좋은 세상이 올까 생각해 봅니다.

10. 설민석이 이번 기회를 은총의 순간으로 삼아, 자신의 의식지평을 더 넓힐 수 있는 좋은 계기로 삼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모든 어줍잖은 식자들에게 '따끔한 똥방망이' 하나 던져줄만한 기개와 혜안을 얻기를 기대합니다. 지식을 자기 책상에만 쌓아두고, 대학에서 (진중권도 아까워할만큼 어마무시한 권력을 가진) 교수 자리 보전하는데만 활용하는 이들에게, "세상으로 나아가 다치고 멍들고 더럽혀질 수 있는 지식"이 더 귀하다는 사실을 알려주길 바랍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종이신문 <가톨릭일꾼>(무료) 정기구독 신청하기 
http://www.catholicworker.kr/com/kd.html

도로시데이영성센터-가톨릭일꾼 후원하기
https://v3.ngocms.co.kr/system/member_signup/join_option_select_03.html?id=hva82041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