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없이 기뻐하고 원없이 슬퍼하렴 끝내 사랑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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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없이 기뻐하고 원없이 슬퍼하렴 끝내 사랑하렴
  • 장진희
  • 승인 2021.01.10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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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희 시편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그 아이 결혼식

-장진희

 

니 아베는 천상 촌놈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농사꾼들은
사람 노릇하고 살기 어려워
군대 다녀온 뒤
인천으로 공장 다니러 갔다
몇 달 만에 멀쩡한 젊은놈이 혈압이 올라
도로 바닷가 시골마을로 돌아와버렸단다
그나마 각시 구하기 힘든 시골에
엄매 데리고 온 것이 소득이었단다

니 아베는 딸바보였다
니가 대책없이 유난히도 울어댈 때조차
우리 공주가 어째서 그란다냐
삐그적적 웃는 게 다였다
니 엄매는 그 많은 농삿일
잘도 해냈단다
동네 엄매들 놉 얻어서
대파모, 배추모 숭굴 적에
해다 나르고
술참 챙기고
빈틈없이 모 숭구고
까르르까르르 잘도 웃었단다
밭떼기로 대파, 배추 넘기고
잔치처럼 읍에 나가
술 마시고 노래할 때
뭔놈의 춤을 그라고도 잘 추던지
말리지 않으면
밤새 추어댈 판이었단다
다만 가끔 우울 발작이 탈이었다
니 엄매는 아베 얼굴 본 적 없이
외할매 손에서 컸다 하고
니 엄매의 외로운 엄매는
니 아베가 거두어
시앙골 묏동에 묻어주었다
일찍 잠이 깬 날
들에 나가보면
동이 트기도 전에 니 아베가 경운기를 몰고 나와 있었지

울 아들은
도시의 현란함이 데려가버리고
바닷가 외딴집에서
감자 심고
고추 심고
고동 잡고
미역 매러 다닐 때
주말이면 선물처럼 늬들이 왔다
선생님!
일고여덟놈 마을 아이들
손에 손 잡고 왔다
큰바다 마주하는 해안절벽
나무하러 다니던 산길 따라
그 옛날 누군가 백일 동안 사람 보지 않고
득도 했다는
바위틈에서 물이 똑똑 떨어지는
우리가 들어서자
수백 마리 박쥐떼가 바다 위로
줄행랑치던
동굴을 탐험하고
재잘재잘 신이 나서 글을 써냈었지
한라산 마주하는 뒷산에 올라
감꽃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목에 걸어주던 늬들
또 어느날
뒷밭에서 고추모를 심고 있을 때
그때는 약속한 공부 시간도 아니었는데
선생니임!
우르르 몰려와
고사리 같은 손으로
고추모를 꽂고
물을 떠다 부어 주었지

농삿일이 바쁜 철이면
늬들 엄매 아베 땀흘리는
밭으로 모두 갔지
어린 너도 모판에서 배추모 뽑아
맞춤 맞춤 구멍 앞에 놓아주었고
아직 거웃도 나지 않은 니 오래비는
아슬아슬 밭둑을 지나
지게 위 제 머리보다 높이 쌓인 모판을 져날랐지

언제부터인가
늬들은
선생님 부르지 않고
이모라 했다

늬들은 잘도 커갔고
이모가 시앙골을 떠난 다음해에
앞바다에서 세월호가 물에 잠겼고
이듬해
목련꽃이 된서리 맞아
까맣게 나무에 매달려 있던 날
니 엄매와
이제 막 대학에 들어간 니 오래비와
말썽쟁이 여고생 니 얘기를 밤 늦도록 하다
돌아온 다음날
새벽에 전화벨이 울렸다
새벽 전화벨은 불길하다
니 엄매가 목을 맸단다
차마 입에 담는다
산다는 게 그리도 모진가
목을 매다니
목을 매다니

니 외할매 묏동 옆에
엄매 묻던 날
넋이 나가버린 니 아베가
술잔만 기울이며
아그덜 크는 것 보고
삼년만 있다
나도 따라갈라요
그러더니

딱 네 해 지나
니 아베 복수 차서 돌아갔다
시앙골 묏동이 아니라
추모공원 납골묘에
이태 전이었다

니가 오늘 결혼식을 한다
활짝활짝 잘도 웃는 이쁜 니가
이제 어른이 다 된 총각 오래비가
축의금 접수대에 앉아 있구나
신랑신부 동시입장하고
주례사 대신 신랑 엄매가 축사를 하고
천지신명이 주례라고
코로나19로 몇 안 되는 하객들
승인함성으로 성혼선포되었다
축가를 한다더니
신랑이 하객들 중간으로 걸어나와
신부를 마주보고
메리 미, 세레나데를 부르네
나 그대 곁에 평생 우산 되어주리
보금자리 되어주리
눈물이 나네

양가 부모님한테 인사할 때
니 엄매 아베 자리에
큰엄매 큰아베 앉아 계시드라
사회 보는 예식장 직원이
아는지 모르는지
신부측 부모님한테 인사를 시키는데
니 눈에 눈물 보이더라
화장 뭉개질까 봐
애써 손가락으로 훔쳐내드라
야속한 사람들아
니 엄매 아베 얼굴 보인다

기쁨 많고
슬픔 많던
아이
재잘재잘 써서 이메일로 보내주던 큰애기
니는 지상에 와서 무슨 숙제를 하고 갈까
원없이 기뻐하고
원없이 슬퍼하렴
끝내 사랑하렴

축의금 봉투에
축복의 신명 불러 써놓고
덧붙인다
아이도 낳아주렴
그래도 라는 말은 빼고

 

장진희
돈 안 벌고 안 쓰고 안 움직이고
땅에서 줏어먹고 살고 싶은 사람.
세상에 떠밀려 길 위에 나섰다.
장터로 마을회관으로.
곡성 죽곡 보성강변 마을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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